청소년기에 내 생리 주기는 불규칙했다. 세 달에 한 번 하는 때도 있었고, 반년간 생리를 안 하기도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안 하니까 편했지만 분명한 건강의 이상 신호이므로 엄마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에 갔다. 대기 공간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전부 어른들이었고, 저 어린애는 왜 여기에 왔나 하는 그런 시선들로 다들 한 번씩 나를 쳐다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왜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던 건지 검사의 결과는 기억이 안 나는데, 검사 진행 과정은 좀 기억이 난다. 진료 대상은 분명 나인데 의사는 엄마하고만 대화를 했다. 내 몸을 두고 나한테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설명했다. 미성년자이니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형외과나 이비인후과 같은 다른 병원을 갔을 때에는, 그때도 엄마가 함께 있었지만 의사가 나에게도 간략하게나마 진료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던 것이다.
『레즈비언의 산부인과』는 2021년 제17회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졸업&정기상영회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톡톡 깨도 돼?〉의 제작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엮은 책이다. 이은해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는 아래 내용의 SNS 게시글 캡처로 시작된다. (참고로 이 캡처는 ‘3대 섹스 망언’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아다니고 있다.)
걸그룹 팬픽에 도전했다가 “●●가 ●●의 처녀막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깨도되?”를 본 레즈를 아시오?
일단 여성의 몸에는 ‘처녀막’이라는 것이 없고, 사람들이 ‘처녀막’이라고 부르는 것은 질 입구에 존재하는 주름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어 불리는 것처럼 ‘막’ 형태도 아니고, 반드시 ‘삽입’에 의해 손상되는 것도 아니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산부인과에서는 ‘처녀막 복원’ 따위의 문구를 내걸어 질 성형술을 시행하며, ‘처녀막을 파열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성관계 경험이 없는 여성에게는 질 초음파를 해 주지 않는 등 ‘처녀막’이라는 환상을 지속시키는 데 조력하고 있다. 이는 여성들에 대한 기만이다. ‘성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고 나아가 자녀를 낳기 위한 행위여야 하며, 따라서 여성과 남성 간에만 가능하다’는 이성애 정상성 규범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여성의학과’라는 대체 용어가 일찍이 제시되었음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산부인과’라는 명칭, 이 명칭을 통해 레즈비언들은 두 번 제외된다. 첫째, (정자를 기증받는 등의 인공적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임신할 일 없으니 산모가 아니고. 둘째, 대한민국에서 여자끼리는 결혼을 못 하니 부인도 못 된다. 이름부터 찝찝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난관은 계속된다. 산부인과에서 진료 접수를 하게 되면 꼭 묻는 것이 성관계 여부인데, 여기서 ‘성관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삽입? 그러면 삽입을 통한 성관계를 하지 않는 레즈비언들은 성관계를 하지 않은 것이 되나? 그런데 애초에 성관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진료의 어떤 측면에서 필요한 것인가?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성관계 대상이 동성이었다고 밝혔을 때 불쾌한 반응을 접하게 되지 않을까? 그게 걱정되어서 두루뭉술하게, 혹은 사실과 다르게 성관계 여부를 밝히면 적합한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톡톡 깨도 돼?〉와 『레즈비언의 산부인과』는 이렇게 갈 곳 없는 물음표들을 한데 모아 두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인터뷰이들의 음성을 직접 들려줬다면 책에서는 이를 갈무리해 글로 수록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같지만 시간의 제약이 있어 영화에는 길게 넣을 수 없었던 감독의 의견과 인터뷰 내용에 대한 분석들을 책에서는 좀 더 담아내고 있다. 영화에서는 〈톡톡 깨도 돼?〉라는 제목이 취하는 형식처럼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책에서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어느 정도 스스로 결론까지도 내려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졸업영화들의 특성상 단 한 차례 상영되고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 유형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고, 그로써 레즈비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시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질염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냥 내가 잘못해서라고 생각해서 진짜 열심히.... 청소했지. (웃음)” “청소하셨냐고요. (웃음)” (p. 100-101)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는 자신들의 몸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었던 청소년기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웃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성교육 시간에 콘돔 사용법(물론 아주 중요하다) 같은 건 가르쳐 줘 놓고 우리 성기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질환에 대해서는 왜 알려 주지 않은 걸까? 주기적으로 치과 검진을 받고 안과 검진을 받듯이 여성 청소년들에게는 여성의학과 검진도 함께 받게 해 주거나, 적어도 자율적으로 받아 볼 수 있도록 권고를 해 주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의 저자인 이은해 감독이나 나 같은 20대 여성들이 성교육을 받은 것은 어언 10년이 지났는데 요즘의 성교육이 그로부터 얼마나 발전했을지, 되려 퇴화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性)은 여전히 터부시되는 것이라 공공연하게 떠들기 어렵다. 〈톡톡 깨도 돼?〉의 인터뷰이들 역시 그들끼리의 대화인데도 불구하고 종종 숨죽인 목소리를 들려준다. 2021년 기준 인구 1명당 0.81명의 자녀를 낳는1 초저출생 국가이면서 여성의 몸을 임신과 출산을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기를 멈추지 않는 대한민국.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의사가 엄마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통에 내 몸의 검사 결과인데도 그 내용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던 청소년 시절의 나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성 간의 성관계에 대해서는 겉핥기식으로나마 가르쳐 주기라도 하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해서도 안 될 것으로 취급되는 동성 간의 성관계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 초반부의 끔찍한 ‘섹스 망언’은 현실에서 비슷하게 재현될 가능성이 꽤 있다. 이를 보다 못한 어떤 GL(Girls’ Love) 소설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여성끼리 성교하는 법을 성기 각 부위의 명칭부터 A to Z로 연재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이런 글들, 『레즈비언의 산부인과』와 같은 책의 등장은 사회에서 없는 존재인 우리를 잠시간 세상에 접속시킨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한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