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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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는 누구인가? 전시의 서문은 ‘박하’에 대해 성과 이름의 혼합체 같기도 하며, 존재하는 것 같기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특별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박하는 《바하르의 온실》(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9. 11. 27.~12. 3.)의 등장인물로 은고에 의해 창작되고 김소월에 의해 연기된 존재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를 졸업한 은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출신의 김소월이 만들어 내는 박하와 방관자를 《바하르의 온실》에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2019년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 다원 부문 창작지원작이었던 《바하르의 온실》은 공연형 다원 전시이다. “본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하는 것과 같다”고 운을 떼는 설명은 전시장 안 각 방이 연극 무대에 해당한다고 언급한다. 중간 공간은 무대로 이동하는 백스테이지, 혹은 극장 로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람객은 관객인 동시에 배우로서 전체 극의 일부가 된다. 2019년 겨울 진행되었던 《바하르의 온실》에서는 각기 다른 해에 ‘나무가 사는 집’에서 공연된 4개의 연극 실황을 녹화한 영상이 순차적으로 재생되었다.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공연되었던 네 작품 <허물>, <벼락>, <기록>, <화분>의 영상이 그것이다. 이 4개의 연극 속에서는 다양한 일상생활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연극의 공간이 되는 집은 일상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의 이야기들은 관객의 집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안락함은 낯선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과 함께 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이때 등장한 ‘박하’는 2022년의 전시 《(박하의) 방관자》(Meta Space 무악, 2022. 10. 4.~10. 24.)에서 다시 한번 세상에 나온 것이다.

©무중력지대 서대문

《(박하의) 방관자》의 서문은 2019년 김소월을 통해 세상에 나온 박하가 다시 김소월의 세상에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이전의 전시와 달리 이번 전시는 ‘박하’라는 유일한 존재에 집중한다. 김소월이 창작한 춤 ‘방관자’를 박하가 추고, 그 춤을 추는 영상 앞에 다시 창작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영상들은 여러 장소에 보여진다. 박하가 김소월이 만들어낸춤‘방관자’를추는모습을관객은방관하게된다.이과정은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박하의) 방관자’라는 제목은 박하의 춤이자 그를 담은 영상 작품이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이기도 하다.

4개의 영상 작품이 전시를 구성한다. <박하>, <창작자>, <방관자>, <박하유연>이 그것이다. <박하유연>을 제외한 세 점의 작품은 디지털 액자에서, <박하유연>은 큰 프로젝터로 상영된다. 이 작품들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인용한 구절로 공통점을 갖는 듯하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움찔거린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쾌락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보려는 격렬한 욕망을 갖는다. 이것은 곧 쾌락이다. 따라서 모두가 관음증 환자이다. 다소 노골적인 수잔 손택의 지적은 전시의 기획 의도와도 맞닿아 있다. 오늘날 수많은 영상들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폭력에 대한 영상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관음되며 방관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상들 속 주요 인물은 주로 피해자들이다. 영상 속에서 창작자와 소비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고통의 주체만이 영상 속에 오롯이 들어가 있을 뿐이며, 그들은 방관과 관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는 폭력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라는 것에 너무나 무뎌져 있다. 너무나 무디기 때문에 스스로가 피해자, 혹은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따라서 기획자는 《(박하의) 방관자》를 통해 폭력과 관련된 일련의 맥락을 가시화했다고 말한다. ‘박하’라는 인물을 빌려 고통의 주체와 창작자, 방관자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속 4개의 영상 이미지 안에는 여러겹의 존재가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폭력의 피해자, 창작자, 가해자, 방관자의 존재가 촘촘하게 층위를 이룬다. 관람객도 이 층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피해자로서, 창작자로서, 가해자로서, 방관자로서 폭력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중력지대 서대문
©무중력지대 서대문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박하>에는 두 개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좌측의 원형 영상에서는 흰 나시를 입은 여성이 특정한 행동을 반복한다. 일종의 무용이다. 우측의 원형 프레임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차례로 재생된다. 주로 화분 사진이다. 하단의 자막이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내러티브의 화자는 소극적이다. 검은 배경에 두 원형 프레임은 마치 쌍안경을 연상시킨다. 관객은 멀리서 관조한다. 쌍안경의 두 렌즈는 각각 다른 이미지를 보여 주기 때문에 그 둘은 자연스레 병치된다. 그리고 비교된다. 특정한 제스처, 아마도 ‘방관자’라는 이름의 춤을 추는 이는 얼핏 보았을 때 정적인 사진, 사진 속의 소리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작은 화분의 식물과 평행선을 이룬다. 관객은 ‘방관자’를 추는 박하와 소극적인 작은 식물을 관음한다. <창작자>에는 흰색 민소매 옷을 입은 여성이 등장한다. 역시 ‘방관자’를 추는 박하이다. 관객은 디지털 액자 너머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박하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다. 영상의 구도는 몰래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영상이 흘러감에 따라, 흰색 민소매 옷을 입은 박하는 영상 안에서 또 하나의 원형 프레임으로 제시된다. 이를 바라보며 또 다른 인물이 ‘방관자’를 춘다. 검은 배경이 대비된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박하의 영상이 영상 속 인물에게 투사된다. 빔 프로젝터로 영사되는 듯한 영상의 빛을 맞으며 인물은 ‘방관자’를 춘다. 관객은 역시나 이 모습을 바라본다. ‘방관자’가 중첩되고 제시되며 갇히고 반복되는 모습을 말이다. <방관자>에는 여러 장소와 비교적 다양한 모양의 프레임이 등장한다. 주로 도로 위를 찍은 영상이 원형, 사각형의 프레임에 의해 산발적으로 상영된다.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 관객은 영상의 시선에 따라 방관자가 된다.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콘크리트 바닥, 보도블럭 따위를 보도록 한다. 시선을 강요한다. 마지막 작품인 <박하유연>에서는 앞선 작품의 의미가 마무리된다. ‘방관자’를 추는 박하의 뒷모습과 물소리, 물이 흐르는 듯한 이미지가 겹쳐서 빔 프로젝터에 의해 상영된다.

물은 섞이기 쉽다. 경계 짓기 어렵다. 그러한 물 위에 박하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서린다. 빔 프로젝터는 디지털 액자보다 흐린 화면을 갖는다. 관객은 울리는 물소리 속에서 액체와 박하와 흐릿한 빛을 본다. 그 모든 층위와 경계가 흐려지는 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관음한다. 폭력적인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반복되는 행동과 이미지, 그리고 그 안의 다양한 층위. 관객은 그 안에서 방관자이며 동시에 창작자이고, 그렇기에 ‘박하’가 될 수 있다. 전시 《(박하의) 방관자》는 시선의 주체와 대상의 경계와 층위를 모두 흐리게 한다. 이것은 곧 사회의 표상이다.

글 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