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STORY

올해 15번째로 열린 독일의 ‘카셀 도큐멘타’는 전세계에서 주목받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예술 축제다. 5년마다 100일간 열린다. 이번 도큐멘타에서 반유대주의 작품 전시로 논란이 있었다. 주최 측의 책임을 더 강하게 묻는 것은 그 영향력과 명성이 세계적으로 대단하기 때문일 테다. 2022년의 ‘도큐멘타 15’의 주제는 ‘룸붕’에서 착안했다. 룸붕이란 인도네시아어로 ‘쌀 헛간’이라는 뜻인데, 미래를 위해 수확물을 공동으로 저장하고 분배하는 개념을 전시에 적용했다. 룸붕의 목표는 공존이다. 공존을 꾀하기 위해서 최우선으로 고려할 가치는 다양성이다. 세계 최대 미디어 아트 축제인 ‘2022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의 주제 또한 ‘다른 삶의 가능성 모색’이었다. 생태 환경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슬로건을 ‘But how?’로 마무리한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다양성과 불확실성으로 요약된다. 어쩌면 이 두 단어는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또는 각 개념이 서로의 시작과 끝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기존 모범 사례의 알고리즘을 따라가도 같은 값이 도출되지 않는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 다양성을 더 다양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메타버스’(가상세계)의 개념이 보편화되면서 예술계에서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적극적으로 메타버스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첨단 기술을 이용해 가상 세계를 구현하면서 우리는 이전엔 머리로 상상하기만 했던 미래의 이미지를 눈과 귀로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도래하지 않은 ‘다른 세계’가 생생하게 다가옴과 동시에 인류의 문제들에 대한 예술적 해법의 필요성도 임박했다. 지금 여기에서 한예종은 어떤 예술적 시도로 미래를 그려 보고 있을까?

2015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기관으로 융합예술센터가 생겼다. 융합예술센터는 아트앤테크놀로지(Art & Technology)랩과 아트콜라이더(Art Collider)랩으로 구성되어 있고, 두 랩 모두 석관동 캠퍼스에 있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이 6개원의 경계를 넘어 서로 교류하며 창작에 첨단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아트앤테크놀로지랩(이하 AT랩)은 주로 영상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하고 기획, 지원·관리, 배급·사업화 업무를 한다. 또 그와 관련한 대외 사업과 산학협력을 도모한다. 예전에는 미디어콘텐츠센터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20년에 융합예술센터와 통합되었다. AT랩은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융복합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기획했다. 그 시작인 <퍼스트 크라이시스(First Crisis)>(2018)는 국내 최초로 VR(가상현실)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을 선보였다. 바오밥 스튜디오와의 기술 협업을 통해서였다. 멀티 유저가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Nine VR>(2018)은 <나인: 아홉 번의 시간 여행>(2013)을 원작으로 한 스핀오프 성격의 작품으로 CJ 미래경영연구원과 함께 개발했다.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대만 가오슝 영화제, 미국 텍사스 SXSW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미국 선댄스 영화제 프런티어 엑시비션 부문에 초청된 <허수아비(Scarecrow)>(2019)는 마그네틱 방식의 스마트 슈트,열전도소자,페이셜스캔등여러최첨단기술을 접목한 실시간 VR 공연이다. LBE(Location Based Entertainment), VRC(VRChat), H(Hybrid), A.P(Audience Participation) 4개의 버전으로 상연된다. ‘허수아비’는 작품의 가상세계 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허수아비’ 역을 맡은 실제 배우가 현장에서 관객/참여자와 물리적으로 교감한다. 참여자는 가상세계 속 눈사람을 만지며 글러브를 통해 실제로 차가움을 느끼고 허수아비 역의 배우와 포옹한다. 또 현장에서 인센스와 향수를 활용해 가상세계의 환경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렇듯 작품 체험에는 시청각을 넘어 촉각과 후각까지, 다양한 감각이 동원된다. <허수아비>와 함께 볼류메트릭 캡처 기술(복수의 카메라로 인물의 360도 전방위를 동시에 촬영하여 입체 영상 제작)을 활용한 시적 VR 다큐멘터리 <레인 프루츠(Rain Fruits)>(2019)는 이듬해에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까지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트앤테크 활성화 창작지원작으로 선정된 <이중으로 걸어다니는 자>(2020)는 8명의 플레이어와 관객이 참여하는 멀티 유저 이머시브 공연이다. 또한 2020년과 2021년에는 틱톡과의 산학협력으로 세로형 초단편 영화들을 제작하고 그 작품들을 틱톡에서 공개했다.
AT랩은 외부 기관,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아직 학내에서 갖추기 어려운 첨단 기술 제작·상영·배급 환경을 확보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더 넓은 창작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언급되지 않은 작품들도 명성 있는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또한 틱톡처럼 모바일 환경에서도 한예종 학생들의 작품들이 상영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한다. 2022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에 한국 대학 최초이자 단독으로 초청되었던 <발레 메타니크(Ballet Metanique)>(2022)는 실감형 메타버스 작품이다.
고전 무용인 발레와 최첨단 실감 기술을 접목했다. 참여자들은 HMD(머리에 착용하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끼고 가상세계 속 발레리나를 만난다. 이상 기후로 해수면이 상승되자 잠길 위기에 처한 발레리나를 구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펌프를 눌러야 한다. 발레리나의 움직임과 참여자들의 펌핑 행위가 함께 일종의 안무를 이룬다. <사물(Samul)>(2022)은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볼류메트릭 캡처 기술을 활용해 가상공간에서 재현한 VR 작품이다. 연주자들의 손놀림과 표정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모션 캡처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상모 돌리기가 그리는 곡선, 사물 복장의 주름과 양감까지 착실히 담아냈다. 올해 영국 레인댄스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국내에서는 올해 11월 18일에 열린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 공공외교주간 행사에서 초연되었다. 같은 자리에서 <허수아비 A.P>도 함께 상연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AT랩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관객을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작품의 이야기 진행에 개입하게 하는 사용자로 초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AT랩이 그리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예술의 미래란 스토리리빙(story-living)인 것이다. 그리고 매년 다른 컨셉과 플랫폼을 모색하며 다양한 학생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있다.

예술적 충돌을 의미하는 아트콜라이더랩(이하 AC랩)은 예술과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를 모색하여 융합적 창작 방법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기획한다. AC랩은 ‘접근하기(입문)-실험하기(창작 실습)-이야기하기(발표 비평)’의 단계적인 탐구 방법을 제안한다. 이를 바탕으로 강연과 토론, 기술 워크숍, 해외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AC랩의 프로그램에 주목할 점은 ‘장벽이 낮은, 사용하기 쉬운 기술’ 사용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향성의 이유는 처음 융합예술 창작에 접근하는 학생들이 비교적 접근이 쉬운 기술을 다양하게 실험해 보며 자신의 예술세계에 맞는 매체를 찾아 나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트콜라이더 아카데미>는 우리 학교 학생들의 융합 예술 교육을 도모한다. 역시 ‘기초-심화-발표’의 3단계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기초과정은 융합예술에 대한 놀이적 접근을 목표로 한다. 심화 과정은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실습하고 창작한다. 발표 과정은 발표 방법을 교육하고 쇼케이스를 열어 그동안의 창작 연구 지원의 결과를 보여 준다. 아트콜라이더 월드와이드랩은 융합예술 국제교류 온라인 플랫폼이다. 세계 최고의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과 협력하고 있다. 2020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가든 서울: 서드라이프 정원>으로 시작해 2021년에는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아카데미와 협력하여 코로나 시대의 온라인 창작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다. 2022년에는 지난 2년간의 온라인 융합예술 교류의 다음 단계로서 앞으로 도래할 웹 3.0 환경의 디지털 아카이브 방식인 NFT(non-fungible token)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월드와이드랩 홈페이지를 통해서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온라인 전시도 개최했다.
디지털-온라인 환경을 활용해 예술 교육의 확장을 시도한다는 AC랩은 그 포부에 걸맞게 그간의 연구 결과와 작품의 웹 아카이빙을 해 왔다. 각 프로젝트가 목표했던 바와 진행 과정, 참여자들의 피드백 등이 텍스트와 사진 및 비디오로 기록되어 있고, 몇몇 프로그램의 경우 온라인 전시장의 링크도 함께 제공된다. 또 AC랩에서 주최한 세미나 영상 기록, 제작하거나 창작 지원한 작품들의 튜토리얼도 유튜브 채널 ‘Art Collider 한예종 융합예술센터’에 업로드되어 볼 수 있다. 예술, 기술, 사회의 융합적인 창작 방법론에 관심이 있거나 함께 창작할 동료를 구하고 싶다면 꼭 이 채널에 들러 보석 같은 정보들을 담아 가길 바란다.
올해 시범적으로 운영을 시작한 ‘K-Arts Connected Campus’에서는 디지털-온라인 교육과 창작 환경에 대해 연구한다. 상반기에는 디지털 자산화(NFT)에 대한 창작 교육 방법을 연구하여 지난 11월 11~12일에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청에서 시범교육을 진행했다. 현재 교육뿐만 아니라 각 전공에 필요한 디지털 기술 장비들(녹음실, 모션캡처장비, 미디어월등)이 갖춰진 뉴테크스튜디오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AT랩 융복합 메타버스 공연 〈허수아비〉
AC랩 〈아트콜라이더 아카데미〉 2022 VR 모션 캡처 수업 장면

융합예술센터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 바깥까지 뻗어 가 다른 기관 및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국제 교류에 매진하고, 또 가상공간에서 작업장·공연장·상영관·전시장을 마련해 주고 있다. 글의 서두에서 지금은 다양성과 불확실성의 시대라 썼다. 이런 세상에서 주저하지 않고 학교와 국가, 그리고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예종의 시도는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작품들이 반갑게 맞이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이들이다. 한예종을 비롯한 예술계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대부분 시각 중심적이다. 예술사(史)의 연표를 촘촘히 메운 기존의 예술 작품들이 그러하고, 지금 떠오르는 융합예술 작품들도 시각적 구현에 초점을 둔다. 미학을 연구하고 예술적 방법론을 탐색하는 데에도 거의 전적으로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원래 예술은 눈으로 감각하는 게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미래의 예술을 궁리하다 보면 ‘원래 그런 것’이 별로 미덥지 못하다. 일례로 점자 태블릿 피시인 ‘닷 패드’는 실시간 반응형 촉각 디스플레이를 사용한다. 그림 그리기와 음악 만들기도 가능하다.
AT랩의 <허수아비>는 가상현실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체험할 때 시청각 외에 다른 감각으로도 느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AC랩이 참여하는 창의인재동반사업의 장애인 예술가 대상 미디어 아트 교육의 범위는 시각·청각·발달장애인 예술가를 아우른다. 5월~11월 동안 진행된 멘토링 프로그램의 결과물인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 25점은 지난 11월 4일부터 8일까지 세운홀에서 진행된 결과보고전 《감각의 비경계, 맞닿은 세계》에서 공개되었다.

우리는 예술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빚고 싶다. 그 청사진은 사실 완전히 빈 종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성찰하는 가운데 미래로 향하는 표지판을 세운다. 기존의 예술 작품들이 환영하지 못했던 이들과 함께 걷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송예슬 작가는 공기, 소리, 온기 등을 활용한 ‘보이지 않는 조각들’을 만들었다. 해당 작품으로 커뮤니케이션아츠 인터랙티브 제25회 수상자로도 선정된 송예슬 작가는 “차별과 소외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경계’들을 실험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1 김진아 감독 또한 그렇다. 그가 만든 <소요산>, <동두천>은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VR 작품이다. 김진아 감독은 첨단 기술을 활용한 매체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미치는 영향을 주도면밀히 설계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VR을 매체로 작업을 한 이유에 대해 “기본적으로 2D 시네마 매체 자체에 우리가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심리학적 기제가 관음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결탁해서 영화로 장사를 하면 결국 폭력과 섹스를 벗어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화 문법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다.2

메타버스에 대한 주목은 비단 감각의 스펙터클에만 이유가있지는않다.내가서있는다른세계를경험하는 몸은 나아가 다른 사람의 세계를 기꺼이 경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만드는 작품에도 그런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아주 조금씩이라도.

글 김가은
1 송예슬 ‘보이지 않는 조각들’ 등 2개 작품 커뮤니케이션아츠 인터랙티브 부문 수상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3191138001
2 ‘소요산’ ‘동두천’ 김진아 감독, VR을 통해 여성 재현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8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