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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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써야 중요해지는 거야
사랑스러운 고전 소설 <작은 아씨들>은 19세기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참전한 아버지의 빈자리로 어려워진 집안이지만, 어머니는 온화한 성격의 맏딸 메그, 자유분방하며 독립적이고 작가를 꿈꾸는 조, 피아노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베스, 귀엽고 발랄한 막내 에이미 네 자매를 사랑으로 돌보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 소설의 중심인물로 볼 수 있는 것은 둘째 조인데, 여성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좋은 결혼’ 뿐이었던 시기, 좋은 남편감을 찾기보다는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조를 중심인물로 내세우는 것은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조는 지금의 시선에서 조금은 평범해졌고 그러다 보니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소녀들의 꿈과 사랑을 다룬 이 고전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그레타 거윅이 영화화한 <작은 아씨들>(2019)에서는 다소 얄미웠던 막내 에이미를 현실적이면서도 야망이 있는 입체적 인물로 바라보며, “여성 인물의 결말은 결혼 아니면 죽음”이라는 편집자의 말에 따라 조가 자신의 결말을 수정했는지 아닌지를 열어 놓으며 끝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장면은 조가 여자들만 나와 투닥대고 웃는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두겠냐고 자신의 글, 자매들의 이야기를 작고 사소한 것으로 자조할 때, 막내 에이미가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라고 대답하는 부분이다. 조는 “글쓰기는 중요함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반박하지만, 에이미는 말한다.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사소하지 않은계속 써야 중요해지는 것이라는 말처럼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이 무언가 말해 왔고 이제 우리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쌓여 삶이 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일견 사소해 보이는 것이 그저 사소한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각본을 쓴 정서경은 아니라고 답하는 것 같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투닥대는 한편, 사랑하고 아끼기도 하던 네 자매의 이야기는 21세기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범죄 스릴러의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이제 소녀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 더 거대한 권력에 맞선다. 아버지의 자리는 참전이라는 대의가 아닌 사업 실패와 도박으로 비어 있으며 어머니는 가난과 함께 남아 딸들을 살뜰히 보살피기는커녕 딸들이 모은 돈마저 들고 사라져 딸들의 삶을 가난에 짓눌리게 만든다. 부를 축적하는 것이 곧 개인의 능력이라 여기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더욱 가혹하여 건설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는 첫째와 방송국 기자로 일하는 둘째는 막내의 생일 케이크를 들고 이제 우리도 남들만큼은 산다며 웃지만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힘들게 자라서 맷집이 세다고.” 같은 말을 듣는다. 그렇게 가난은 그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남아 있다. 첫째 오인주는 어린 시절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은 셋째를 기억하고 있다. 인주에게 가난은 정말이지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므로 돈은 아버지가 도둑질을 해서라도 마련해 왔으면 했던 것이다. 반면 둘째 오인경에게 가난은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더 고군분투하며 꼿꼿하게 신념을 지켜 오게 만든 것이다.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막내 오인혜에게 가난은 자신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며, 돈은 언니들의 희생을 의미한다. 막내만큼은 자신들과 다른 세상을 경험했으면 하는 언니들의 사랑이 부담스럽기만 한 인혜는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재능으로 돈을 마련하려 한다.
세 자매 각각은 가난과 돈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저마다의 자리에서 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인 원령 가문과 얽히게 된다. 첫째 인주는 회사에서 유일하게 가까웠던 진화영이 죽으며 자신에게 남긴 20억의 출처를 좇다가 700억이라는 원령가의 비자금과 마주치며, 둘째 인경은 보배저축은행 사건 관련하여 원령가의 사위이자 서울 시장 후보인 박재상을 조사하다가 정란회라는 조직을 알게 된다. 막내 인혜는 원령가의 자녀인 효린의 친구로 원령 재단의 후원을 받다가 부유하고 화목해 보이기만 하던 원령가의 닫힌 방에 도달한다. 세자매 앞의 세 갈래 길은 촘촘하게 얽히고 설키며 거대한 사건의 중심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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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없어요, 그런 아버지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지금껏 가시화되지 않았던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로 화제를 모았다.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고 한때 결혼으로 집안을 일으켜 보려 했던, 약간 허영심이 있는 첫째 오인주는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사람을 잘 믿었고, 둘째 오인경은 직장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가글 병에 데킬라를 담아 놓고 마셨다. 언니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쏴붙이던 막내 오인혜는 원상아의 계략으로 닫힌 방에 갇힌 뒤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보배저축은행의 피해자로 어머니를 잃은 진화영은 몇 년간에 걸쳐 원령가를 상대로 차근차근 복수를 계획하다가도 인주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조종하던 악의 배후인 원상아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드라마에 등장하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희생시키던 여성은 더 이상 없었다. 사랑을 위해 죽고, 사랑을 위해 돈을 포기하는 것은 모두 남성이었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면이 남아 있는 한국이지만, 드라마 속에서만큼은 영향을 끼치든 그렇지 않든 아버지의 자리는 부재했다. 또한 빠른 속도의 전개도 인상 깊었는데, 보배저축은행과 기업 비리로 시작된 이야기는 베트남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부동산과 사학 문제 등을 건드리며 한국의 지금이, 이른바 박정희 정권 이후의 경제 부흥이 어떻게 질주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무시해 온 가치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주변 인물이나 조력자로 기능하지 않으며, 인주와 화영, 인혜와 효린 같은 혈연 바깥의 끈끈한 자매애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사의 중심을 목격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인물이 된다. 이를테면 소설 속 조가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글을 계속 써 나가고자 한다면, 드라마 속 둘째 인경은 자신의 신념을 계속 밀고 나가는 동시에 앞선 폐단을 단호히 끊어 내고자 한다. 인경을 회유하며 유사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선배 앞에서 인경은 힘주어 말한다. “필요 없어요, 그런 아버지. 나는 아무 아버지도 필요 없어요.” 부가 곧 계급이 되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정란회라지만, 정란회의 아버지 나무에 난초를 거는 행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비리를 덮어 주는 것, 그들을 위해 수동적인 인물이 되는 대가로 얻는 부와 권력을 뜻한다. 그런 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나는 아무 아버지도 필요 없어요. 기자가 뭔데. 누가 그렇게까지 기자 한대요? 나 같으면 어떻게든 렉카차 했을 거야. 렉카차 못 하겠음 다른 차 하면 되잖아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타협하지 않는 인경의 모습은 어쩌면 비현실적이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사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마냥 현실적이지는 않다. 환각 작용을 일으키며 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마다 놓여 있는 희귀한 푸른 난초는 무엇인지, 아무리 살인과 부패를 저지른 부모라도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된 효린은 괜찮을지, 효린의 통장에 남은 700억이라는 비자금을 인혜가 언니 인주와 인경에게 나눠 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의문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어린 인혜와 효린에게, 이 돈이 흘러온 그 모든 사건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소녀들에게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서경 작가가 그려 온 세계에는 언제나 동화적인 면이 있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도 소설의 설정을 가져와 펼쳐 놓으면서도 전개 과정에서는 <푸른 수염>, <분홍신> 등의 동화적 모티브가 나타났다. 이런 동화들의 여성 혐오적인 면모를 비틀어 전복시킨 것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화는 대개 유산을 물려받지만, 지금 여기의 동화에서 소녀들은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고 거기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새로운 세계를 꿈꿔 볼 가능성을 언니들에게 건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급진적인 것일까. 아니, 괜찮을 것 같다. 새로운 세대가 이전 가치를 전복시키려면 필요했던 신화 속 부친 살해의 모티브가 한국의 설화 속에서는 역으로 자녀 살해의 모티브로 나타나 보수적인 세계를 유지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이제 우리에겐 어떤 아버지도 필요 없다고,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고 말할 시점이 도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 정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