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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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진 소리가 울려 퍼지면 왕비는 발을 내딛는다. 붉은 치마 사이로 우아한 발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나라의 평안을 기리는 왕비의 몸짓이 시작된다. 색색의 저고리가 화려한 한복은 세상을 덮을 듯 만개한다. 전통예술원 1기 졸업생이자 국립무용단 출신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이며 한국무용가인 이소정 교수를 만났다. 교수실은 학생들이 준 편지며 롤링페이퍼, 꽃으로 가득했다. 마치 왕비의 태평무 의상에 화려한 수를 놓은 것처럼.

한국무용을 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학원을 많이 다녔어요. 피아노부터 해서 미술, 체육, 한문, 서예.... 제가 싫증을 잘 내는 편이었대요. 그런데 유일하게 무용학원은 싫증을 안내고 오래 다녔던 거죠. 처음에는 발레로 시작했는데 욕심이 생겼어요. 잠깐 쉬었다가 중학교 때부터 한국 무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는데, 선생님께서 가르마를 딱 타 보시더니 ‘너는 한국 무용이다’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시작을 했는데 매력이 있더라고요. 선의 아름다움이나 웅장함, 화려함 등에 어릴 적 제가 빠졌던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어릴 때 지방에 있어서, 서울에서 공연을 볼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무용을 보고 나니 ‘나도 출 수 있을까’, ‘나도 추고 싶다’라는 열망이 들었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기이신데, 진학 계기가 있으시다면?
중학교때 부터 살풀이, 승무 등 전통춤 위주로 배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통 춤 뿐이니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면 더 발전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험을 쳤죠.
처음엔 합격통지서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어요. 등록금 고지서에 3만원만 고지가 되어 있어서 뭐가 잘못된 건 줄 알았죠.
알아보니 수석으로 입학을 해서 전액 면제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전통예술원 무용과에 들어온 게 진짜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시절이거든요. 1기다 보니까 대학에 갖던 낭만은 없었는데도 교수님이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셨어요. 또 저희 교수님이 국립무용단 출신이셨어요. 그래서 ‘나도 국립무용단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죠. 저희는 학창 시절에 성실하지 않으면 공연을 할 수 없었어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성실하지 않고 결석, 지각하면 안 됐거든요. 그래서 공연을 제일 많이 한 사람들을 되게 성실한 사람이었다, 라고 판단을 했었죠. 그리고 1기다 보니까 허허벌판에서 동고동락하면서 교수님께 춤의 정신을 배웠고 춤의 열정을 키워 나갔습니다. 저희밖에 없었어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교를 독차지할 수 있었죠. 별 보고 와서 별 보고 들어간다는 말이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추억도 많아요. 잔디밭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1기다 보니 사명감도 있었어요. 첫 단추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힘들어도 우리가 잘 일구어 놓으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때 교수님들이 대부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선생님이셨어요. 커리큘럼에 대한 자부심도 컸고요. 지금 김덕수 선생님이 명예교수님으로 계시는데, 당시에는 선생님과 연희과와 함께 공연을 많이 다녔어요. 동고동락을 하다 보니 ‘패밀리 정신’이 생기더라고요. 어제도 기악과 공연을 보고 왔는데 정말 내 가족의 공연 같았어요. 애정이 많이 가는 친정 같은 모교입니다.

태평무
승무

그렇다면 국립무용단 입단 계기는 교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나요?
그런 희망이 컸죠. 국립무용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한 번 떨어졌다고 포기하면 안 되고 계속 도전할 자신이 있으면 오디션을 봐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열 번 떨어져도 꼭 가겠다고 마음먹었죠. 운 좋게 졸업하자마자 자리가 생겨서 2002년에 입단을 했어요.
스승님께 누가 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컸어요. 항상 ‘누구 제자냐’라는 질문을 받았기에 더 성실하게 열심히 했었고, 춤의 열정을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국립무용단에서 활동을 하시면서도 계속 학업과 개인 작업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술전문사 졸업 이후 경희대학교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개인 발표회도 여러 번 하셨는데요. 이러한 열망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무용단 생활은 공연의 연속입니다. 학교에서는 전통무용을 위주로 했던 것과는 달리 민속 무용극에서부터 민속무용, 창작무용, 협업까지 여러 장르를 해요. 그러니 제가 가진 전통무용을 희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했어요. 그래서 전통무용 공연도 틈틈히 많이 하고. 무용단을 다니느라 예술전문사는 늦게 졸업했어요. 그러니 박사는 공부할 수 있을 때 빨리 해 놓자고 생각했구요. 저는 전통무용 전공이고, 전통무용을 사랑해요. 하지만 제가 그것을 게을리하면 저도 모르게 희석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용단에 속해 있을 때도 전통무용 발표회를 꾸준히 해 왔습니다.

국립무용단에 들어가셨을 때 시행착오는 없으셨나요?
전통무용만 하다가 창작을 하게 되니까 남자와 여자의 듀엣이 어려웠어요. 전통무용에는 그런 게 흔하지 않거든요. 그 때문에 제 자신이 위축되고 자괴감도 느꼈어요. 저는 ‘전통예술원을 나와서 창작에는 약하겠지’라는 편견이 싫었기에 밤새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보여줬어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죠. 그런 여러 장르가 모여서 전통의 뿌리를 깊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제게 ‘전통 무용을 전공했는데 왜 국악원이 아닌 국립무용단을 갔느냐’고 물을 때가 있어요. 물론 국악원도 좋지만 국립무용단은 제게 꿈이었고 전통의 뿌리를 더 깊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배우고 경험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현재진행중입니다. 배움은 끝이 없으니까요.

가장 아끼는 작품이나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제가 태평무 이수자이기도 하지만, 태평무를 출 때 제일 마음이 편안해져요. 옛날에 강선영 선생님께서 ‘춤을 출 때 왕비가 되어라’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추면 출수록 더 몰입이 돼요. 내가 왕비가 되어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춤을 추고, 바라보고. 관객들은 국민 여러분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춤을 출 때는 이미지나 스토리를 제 나름대로 정해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거죠. 그러면 춤의 내용이 달라져요. 그것은 관객들이 느낍니다. 관객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져요.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가지고 진솔하게 춤을 추면 된다고 생각해요.

부채입춤
소고춤

춤을 출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요즘 협업을 많이 해요. 최근에는 클래식과 한국무용을 접목시켰고, 예전에 손연재 리듬체조 선수와 한국무용의 콜라보도 진행했어요. 그런 콜라보 작업에서는 한국무용의 일부만 보이지만 관객들이 신비롭게 생각하고 한국무용을 높이 평가해 주시더라고요. 그랬을 때 ‘아, 내가 한국무용을 하기를 잘했구나.’라고 느껴요. 다른 장르의 무용이었다면 감흥이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협업을 할 때면 너무 설레고 자부심도 많이 느끼게 되어서 행복해요.

예술가로서 이것만은 꼭 지키고 싶다는 나의 예술적인 근간이라든지, 예술 철학이 있다면?
저는 제가 직접 배우지 않으면 작품을 안 해요. 예전에 중국의 소수민족 춤을 배우러 갔다 왔어요. 호기심이 많았고, 소수민족 춤을 춘다고 해서 그들처럼 잘 추지는 못하겠지만 경험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북한 춤도 배웠고요. 한국무용은 다른 나라 민족의 춤과 다른 특수한 호흡이 있어요. 기의 흐름처럼 순환하면서 자기 몸을 둘러싼 호흡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게 달라요. 그런 호흡을 하며 다른 춤에도 적용했을 때 얼마나 큰 효과를 나타낼까 생각하면서 더 연구해요. 그러니 중국 춤과 북한 춤을 배워도 한국 무용수의 호흡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요. 다른 누군가가 침범할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의 호흡. 자부심을 가지고 다양성을 경험하라고 학생들에게도 말해요.

교육자와 예술가를 병행하는 것이 교수님한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학교 오기 전에는 공연을 많이 하고 몸이 힘들었어요. 학교에 와서는 춤추는 시간이 줄어들고 교류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예술가로서, 이제는 교육자로서, 학생들과 같이 공연하며 더 소통을 하고 서로 배워 나가야 할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교수라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학생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주고 싶어요. 그런 게 전통 예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봐요. 다양하게 경험을 해야 자기만의 모습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커리큘럼이라든지, 학교 외에서도 공연이나 행사, 협업 등을 통해서 학생들이 더 몸소 체험 한다면 전통춤의 뿌리를 더 깊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또 제가 젊잖아요. 젊어서 학생들하고 함께 춤추고 부대끼면서 지내고 싶어요. 제가 무용수로도 계속 있었지만 누구보다 학생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항상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려 하고, 선배로서 스승으로서 좋은 동반자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모교에서 교수로 강단에 서고 계십니다.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중요시 여기는 것이 있으신가요?
전통은 더 깊은 전통으로, 다양성은 더 다양하게... 이 두 가지가 시너지를 내고 전통에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해 배움이 중요하고 춤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도 전통예술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발전 방향을 가르치고 싶어요. 학교에서는 군무가 많기 때문에 개인보다 전체가 중요해요. 그러니 ‘내가 빠지면 안 되겠구나’ 하는 책임감이나 ‘이 작품은 꼭 하고 싶어’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해요.그런것을일깨워주기위해, 경험의다양성을넓혀주기 위해서 나름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 열정과 신념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데, 요즘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주의가 있죠. 연습 과정 속에서 끝없이 수련하고 자기와의 싸움을 어떻게 잘 컨트롤하면서 이겨 나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춤을 왜 추는지 생각해야 해요. 무작정 추는 게 아니라 춤사위를 하나하나 생각하고 이해하면서 춰야 해요. 아직은 교육 과정 중에 있으니 모를 수 있어요. 저 또한 몰랐으니까요. 그것을 조금이나마 빨리 느끼게 해 주고 싶기에 끊임없이 탐구하고 함께 연구해야 합니다.

작품을 만들 때는 어떤 것에 주안점을 맞추시나요?
스토리입니다. 내가 춤출 때 드는 소품의 의미와 나의 캐릭터를 찾고 나만의 스토리로 전개해 나간다면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성을 느끼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흥도 크게 와닿으리라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새야새야〉라는 작업을 했어요. ‘새야새야’는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노래예요. 태평무와 연결시켜서 한 나라의 왕후가 동학 농민의 운동과 청일전쟁에서 죽은 영혼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콘셉트를 잡았어요. 파랑새는 일본군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우리 승무의 긴 장삼을 활용해서 파랑새를 표현해 보았습니다. 〈새야새야〉는 국립합창단에서 예술한류 프로젝트로 했던 거예요.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 180° 모두 LED가 있는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는데요. 그런 기술이나 메타버스, 증강현실 같은 분야와 한국무용의 협업을 하고 싶어요. 이번 해오름 극장에서 한 정경 선생님 독주회 때는 게스트로 초대를 받아서 <새야새야> 영상에 저와 학생들이 함께 출연했습니다.

디지털 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으신 듯합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심할 때는 수업을 할 때도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만났어요. 학생들도 흥미로워하고, 앞으로 어떤 바이러스가 나타날지 모르는 시국에 대비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새야새야>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이 할 꼭 공연장이 아닌 가상현실이나 메타버스 공간에서 공연을 남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순수예술은 직접 경험하고 보여 주는 게 가장 좋은거죠.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고, 시대의 흐름에 안 맞출 수는 없거든요. 비대면 시대가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시국이니까 영상화 작업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먼 훗날엔 역사성이 있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시고, 학생들의 입장을 봐 주시니 학생들에게도 호응이 많겠어요.
맞아요. 저희는 비대면으로 수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니까 코로나 시기에 수업하기가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힘듦이 당연한 것이 되면 안 되잖아요. 나태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무엇을 가르쳐 달라고 먼저 이야기하니까 대견했어요. 상담도 많이 하고,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 상의하려 하니까 저는 고마웠어요. 제가 이젠 무용단 소속이 아닌 학교 소속이다 보니 자긍심도 그 누구보다 큽니다. 전 항상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존경이 아닌 존중의 의미로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실수도 줄여 보며 더불어 살아가자고요. 또 최고보다는 최선이라는 말을 항상 해요. 최고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과 최선을 다하다 보니 최고가 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니까요. 특히 제 스승님들은 항상 겸손해야 되고, 춤을 생활화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감동을 주는 춤꾼이 되라는 것. 그 말이 항상 마음 속에 있어서, 늘 되새기고 또 되새깁니다.

손연재 리듬 체조 선수와도 협업 작품을 만드셨는데요.
외국의 리듬 체조 선수들이 함께 와서 하는 갈라쇼였어요. 리듬 체조니까 긴 천을 이용해 부채춤과 접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천을 날리는 장면이 있거든요. 리듬 체조에 리본 동작이 있으니 쉽게 하실 줄 알았는데, 쓰는 근육이 다르더라고요. 리듬 체조는 손목 스냅으로만 한대요. 근데 저희는 등과 어깨를 사용하는 거예요. 그런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었죠.
협업할 때 세계 1, 2위인 선수들도 있었어요. 그때 추석이 다가와서 등불과 부채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만들었어요. 의외로 잘 따라 하더라고요. 사람들도 좋아하고, 꽃도 잘 만들었어요. 외국에서 오신 선수분들께도 한국무용을 알려 줄 수 있어서 뜻깊고 흥미로웠어요.

전통예술원에서 예술한류 사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하실 때와 현재, 방점을 맞추는 것에 차이점이 있으신가요?
국립무용단 있을 때는 화려하고 퍼포먼스적인 성향이 강했어요. 그런데 전통예술원에서는 더욱 고급화된 품격을 통해 원형을 지켜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해외에서 공연을 할 때 외적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원형의 우아함과 품위를 보여 주는 것이 한국을 널리 알릴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30주년을 맞았습니다.
1기 졸업생으로서,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우리 학교는 스파르타식이라는 말을 듣죠. 결코 나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실기를 전공하는 사람이고, 주역 양성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학생이기 전에 무용수의 마인드로 춤의 정신이 사장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장르를 넘나들 수 있지만 다양성을 배우는 것과 정신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전통예술원에서는 춤의 정신만 올곧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작품을 하든 중심은 하나라고 봅니다.
또 제가 1기 졸업생인데,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제가 열심히 하면 학생들이 잘 따라올 거라고 봐요.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보다는 그 제자에 그 스승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서로가 소통하면서 잘 만들어 가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강요가 아닌 자율 속에서 같이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전통예술원의 30주년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세월을 함께해야 되잖아요. 전통예술원만의 레퍼토리도 많이 만들어야 될 것이고 원형도 당연히 지켜 나가야죠. 그래서 우리 전통예술원만이 지닌 독창성으로 세계에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한국이나 세계로 뻗어 갈 때 우리는 전통예술인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충실하게 한 계단씩 쌓아 나가고 싶습니다.

글 강가영 사진 김경수 영상 최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