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STORY

번역인으로서 나의 이력은 약소하다. 이미 출간되었거나 출간을 기다리는 것을 전부 셈해 봐야 그림책 다섯 권, 그래픽 노블 한 권, 그리고 아티스트북 한 권. 모두 이미지의 힘에 기대는 책이다. 초보 번역인에게 이처럼 텍스트의 양이 적은 책은 다정한 은총과 같다. 시간의 여유가 비교적 많이 주어지기에 낱말과 표현의 세세한 요소들을 살필 여지를 그만큼 많이 얻는다. 비유하자면, 바둑판에 옥돌을 놓기 전에 돌의 광채나 결에 빠져들어 넋을 잃기도 하고, 자수라면 한 땀, 그리고 또 한 땀, 풀잎 하나를 초원처럼 즐기는 작은 곤충의 발걸음처럼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 번역한 책은 앤 카슨의 『녹스』였다. 앤 카슨은 1978년 캐나다를 떠난 오빠가 2000년 덴마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비보를 듣고 토론토에서 코펜하겐으로 날아간다. 오빠의 부인에게 사진이 담긴 그의 일기장을 받고, 그들의 지난날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이 거행된 교회와 유골이 뿌려진 해안 도시에 찾아가고, 운하를 따라 거닐며 오빠라는 사람에 관하여 질문한다. 토론토에 돌아와서는 22년 동안 오빠가 보내온 빈약한 엽서와 편지를 검토하고, 오빠와 나눈 통화 내용을 복기하고, 어린 시절 가족의 삶을 회상하고, 가족 앨범을 뒤적여 사진을 분석하며 그는 누구였는지 거듭 묻는다.
『녹스』에서 카슨은 고전학자로서 고대 문헌들을 인용한다. 그중 하나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이다. “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 동사 “historein”에서 유래하며, 그것의 본래 의미는 묻다, 탐구하다, 모색하다 등이라 한다. 헤로도토스는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모으고 궁금한 것을 묻는데, 물음에 대한 답으로 어떤 경우에는 말없이 모호한 이민족의 몸짓만을 얻기도 한다. 카슨이 인용하는 다른 문헌은 기원전 1세기에 살았던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이다. 카툴루스는 머나먼 타국에서 죽은 형제의 무덤에 뒤늦게 도착하여 눈물 젖은 애도의 선물을 바치며 그것을 10행의 비가로 읊었다. 카슨은 카툴루스의 시를 구성하는 낱말 63개를 일일이 사전에서 찾아 번역한다. 『녹스』는 카슨이 헤로도토스와 카툴루스를 따라 오빠라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와 그의 흔적들을 묻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말 없음의 역사서이자 망자에게 바치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녹스』에서 어떻게 번역해야 적절할지 까다로워 오래 고심한 부분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결이 심상하지 않은 옥돌, 또는 어떤 수를 놓더라도 곱고 매끈하지 않을, 도드라질 작은 문양 같은 것. “entry”는 그중 하나였다. “entry”는 “entrance”와 마찬가지로 “enter”의 명사형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이 낱말의 의미군은 넷으로 구분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행위, 즉, 입장, 등장, 진입, 승선 같은 것, 2) 어떤 장소에 들어 가는 수단, 문, 입구, 로비, 하구 등, 3) 어떤 행위를 시작하기, 착수하기, 예를 들어, 어떤 시간의 시작점, 책이나 연설을 여는 첫 부분, 여행의 첫 발걸음, 어떤 일의 첫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4) 어떤 것을 기록하기로, 예를 들어, 장부, 일지, 리스트에 기록한 어떤 것, 어떤 것을 그렇게 데이터베이스, 장부에 기록하여 들이는 행위, 또한 사전, 백과사전, 카탈로그, 인덱스, 또는 다른 참고 문헌에서의 항목 등.

카슨은 카툴루스의 시를 번역하면서 “번역이란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 더듬거리는, 아주 모르는 방은 아닌, 하나의 방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카슨이 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고대의 시 외에 오빠라는 무언의 미지인이기도 하다. 카슨에게는 오빠 역시 하나의 어두운 방으로, 그를 번역하는 일은 마치 자잘한 사냥감을 노리는 동물처럼 그 안에서 더 이상 말을 전해 들을 수 없는 자가 남긴 극소의 흔적들을 찾아 배회하는 것과 같다. 카슨은 이 번역의 방을 온전히 “entry”들로 구성된 장소라 한다. “entry”들로 구성된 장소는 어떻게 생겼을까. 특히 방이라면, 게다가 번역의 방이라면. 상상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막힌 벽 없이 오로지 문들로만 이루어진 말들의 장소. 하나의 낱말을 옮기는 데 있어서 다양한 의미와 표현의 접근과 진입과 전달과 소통을 허용하는 시 같은 것. 여러 사람의 여러 번의 서로 다른 번역들이 무한히 들고 나는 바람의 방.
아, 그러나 카슨은 “entry”를 “어휘집 안에 배열된 항목들을 뜻하는 용법으로” 취하기를 주문하기에, 그리하여 번역자는 “entry”가 허용하는 여러 번역의 문들 중에서 그에 합당한 하나의 문만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여러 가능한 역어들 사이에서 오래 배회하다가, 마침내 사전에 기록하여 들이는 행위와 관련된 “표제어”를 골라 옮겼고, 그럼으로써 본의 아니게 다른 번역의 문들을 잠가 닫았다. 어둠의 방에 들어 앉아, 누군가 달리 옮김의 출구를 뚫어 주기를 기다린다.

글 윤경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