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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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항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산책이 목적 없이 걷는 행위라면, 항해는 목적을 향해 가는 행위이다. 산책이 처음과 끝을정해두지않고하는일이라면,항해는처음과끝이명확하게 정해진 일이다. 우리가 예술을 하는 과정은 무엇과 더 가까운 일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올해로 개교 30주년을 맞이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1993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이 차례대로 개원했다. 건물이 생겨나고, 또 그 위치가 변화하였다. 건물은 점점 더 커졌고, 캠퍼스는 더 많아졌다. 학교에는 그만큼 많은 입구와 출구가 생겼고, 내가 들어가야 하는 입구와 빠져 나가야 하는 출구를 찾는 건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 어려움은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해 더 심화되었다. 20학번을 필두로 입학과 동시에 비대면 플랫폼 안에서만 수업을 이어 갔던 학생들은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정말’ 학교에 오게 되자 몇 학기를 보냈음에도 생경하고 낯선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새로운 학교에 진입해 학교에 소속되는 일은 단지 수업을 듣는 일 이외에도 건물과 친해지고, 지리에 익숙해지고, 다른 학생들과 대화하는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지난 3년여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교는 개교 30주년을 맞아 학교의 시간적 역사를 톺아가는 웹페이지 ‘항해일지’와 함께 학교의 물리적 공간을 소개하는 AR 앱 ‘아트로넛(Artronaut)’을 출시했다.
우주를 산책하기:AR 앱 아트로넛(Artronaut)
AR 앱 아트로넛은 캠퍼스 투어 형식의 앱으로, 한예종 게임동아리 K’Dev의 구성원들이 융합예술센터 아트 콜라이더 랩 (이하 AC 랩)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다.
앱의 이름인 ‘아트로넛’은 예술을 뜻하는 ‘art’와 탐험가를 뜻하는 ‘astronaut’의 합성어로, 예술을 항해하는 ‘항예사’(artronaut) 라는 뜻을 담고 있다.1 항예의 주된 공간은 우주이며, 앱의 사용자는 ‘대항예’의 시대에 아트로넛이 되어 K-Arts2 은하계를 탐험하게 된다. 이 앱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기능은 캠퍼스 투어이다.게임동아리 K’Dev의 회장 박민정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앱은 학교의 지리가 복잡해 길 찾기가 어렵다는 게임동아리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2022년 6월 진행되었던 동아리 거리제에서 앱의 형식으로 한 차례 선보인 바 있다. 이는 ‘아트 워크(art walk)’ 라는 앱으로 동아리에서 수집한 학생들의 작품을 영상원 곳곳에 프린트해 놓아두고, 다른 학생들이 그 프린트물을 찾아 이미지 인식을 하면 작품에 해당되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되는 보물찾기 방식의 앱이었다. 이를 전신으로 하여 범위를 캠퍼스 전체로 확장한 것이 이번에 출시된 아트로넛이다.
아트로넛에는 학교 내 길 찾기에 도움을 주는 내비게이션 기능뿐만 아니라 각 원에서 진행되는 창작의 과정을 보여주는 AR 콘텐츠도 포함되어 있다.3 이를테면, 음악원에서 체험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 콘텐츠 <우주 소라고둥의 노래>에서는 AR 내 흩어진 우주 소라를 수집하여 하모니를 만들어 내야 한다. 무용수의 움직임에서 나온 영혼석을 수집하는 무용원의 <무도의 영혼석>의 경우에는 박지영 안무가가 짠 안무를 모션 캡처 방식을 이용해 AR 앱 속 무용수의 움직임에 녹여냈다. 각 원 뿐만 아니라 학교의 장소 곳곳을 ‘광장’이라 이름 붙여 모아 놓고, AR 뷰 스팟도 마련해 두었는데, 음지못에서 구현되는 우주 거북이와 이어령예술극장 옥상에서 진행되는 <소망을 담은 행성> 미션이 그 예이다. 특히 <소망을 담은 행성>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소망 행성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소의 선정 기준은 이어령예술극장 옥상처럼 학교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나 음지못 등 학생들이 잘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아트로넛이 AR 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디지털 플랫폼의 역할과 관련된다. 한예종 개교 30주년 기념 제작물 중 아트로넛이 AR을 사용해 캠퍼스 투어의 기능을 한다면, 다른 한편에는 ‘항해일지’라는 이름으로 한예종의 30년 역사를 아카이빙한 웹페이지가 존재한다. ‘항해일지’가 디지털 환경이 가진 아카이브 저장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아트로넛은 실제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하며 앱의 출발점이었던 길 찾기에 관한 문제의식을 말 그대로 ‘현실로 소환’해 내어 해결한다.
항해가 되어 가는 산책
학생들이 길 위에서 그 끝과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의 산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동안 학교는 그 산책이 목적지에 닿을 수 있도록 혹은 신대륙의 발견으로 향하도록, 즉 산책이 항해가 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앱은 한예종 게임동아리에서 시작한 아이디어를 AC 랩에서 제작 지원하여 출시된것인데, 그 제작 지원의 과정은 상당히 인상깊다.
제작은 3개월 정도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다. 이는 동아리 원들의 앱 개발 경험이 전신인 ‘아트워크’ 개발 한 번뿐임을 고려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빠른 기간이다. 이들이 빠른 시간 내에 이토록 섬세하고 완성도 있는 앱을 개발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교의 제작 지원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처음 한예종에 ‘게임동아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AC 랩의 이다영, 임명연 연구원은 ‘게임’이라는 장르가 점차적으로 예술에 미치고 있는 큰 영향력과 그 기술 융합 적성격을 고려하여 동아리의 잠재력을 깨워 보고자 하였다. 이들의 지원은 회의 공간을 제공해 그 회의에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제공된 회의 공간에서 캠퍼스 맵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아트로넛으로 확장해 볼 것을 제안했다. 아트로넛 제작 과정에 있어서도 AC 랩과 K’Dev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매주 한 번의 피드백 시간을 가지며 진행 상황을 상세히 공유했다. AC 랩은 앱 개발에 필요한 다른 인력 및 예산 지원 등 앱 개발의 전 과정을 지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했다.’ 교육적 차원에서의 이러한 창작 지원 방식은 학생의 행보를 응원하고 독려해 주어야 하는 대학의 역할에 충실한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산책이 항해로 나아가기 위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함께 비슷한 길을 나아가는 존재의 확인이다.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다른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응원이 될 뿐만아니라 대화의 과정에서 또 다른 길을 개척해 나갈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현재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 ‘커넥티드 캠퍼스(Connected Campus)’이다. ‘커넥티드 캠퍼스’는 디지털 전환에 대응하여 학교의 디지털-온라인 환경 구축을 돕고, 나아가 이를 통해 융합과 연결의 기반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고 있는 사업이다. 커넥티드 캠퍼스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앱 개발은 디지털-온라인 창작 교육의 시범 운영 과정이자 디지털 자산화(NFT) 연구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앱속 미션을 수행 할 때마다 받을 수 있는 토큰을 모두 다 모으면 한예종 개교 30주년 기념 NFT인 ‘크리티컬 아트로넛(Critical Artronaut)’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방식이 바로 그 연관 지점이다.
NFT 제공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려는 학교의 시도이다. NFT는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환경의 특성 탓에 희소성보다도 작품의 소유 이력에 의해 그 가치가 올라간다. NFT 예술작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그 작품의 역사로의 참여이며,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4
그렇기에 NFT를 소유한 사람들 간의 커뮤니티가 곧 NFT 작품의 가치와 연동되는 것이다. ‘커넥티드 캠퍼스’ 사업에서 시행되고 있는 NFT 연구 또한 이러한 궤를 함께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트로넛과 같은 프로그램들의 NFT를 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듯 AR 앱 아트로넛의 앱 자체의 구성과 더불어 제작 과정, 그리고 그 기반에 있었던 ‘커넥티드 캠퍼스’ 사업 모두 학생의 개별적이고 과정적인 산책이 어떻게 하나의 항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트로넛의 주 타겟이었던 20학번으로서 나의 앱 사용 경험을 재구성해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산책 지도
누군가의 독서에 의해 글자가 쓰이는 책이 있다.5 마찬가지로 찾아가야만길이그려지는지도가있다.이지도는길을찾기위해 보는지도가아니라지도를보기위해길을찾게하는지도이다. 천장관에서 창조관에 가는 길은 2022년 11월 15일 오후 7시에 생겼다. “창조관에서 뵈어요.”라는 문자는 이틀 전에 받았다. 창조관에가는길은언제나그렇듯지도에서찾을수없고,나는 지도를 보고 싶어 창조관으로 향한다.
천장관에서 창조관에 가다가 이어령예술극장 옥상에 들르는 길은 같은 날 오후 7시 54분에 생겼다. 길을 빙글빙글 돌아도 착한 옥상의 푸른 인조잔디밭에 내가 인식해야 하는 배너가 쓰러져 있고, 그래서 나는 배너를 들어 올려 흙을 탈탈 털어준다. 배너를 인식하면 하늘엔 다른 사람들의 소원 행성이 등불처럼 걸려 있다. 조용한 옥상에서 행성을 바라보며 이곳은 정말 우주인데 내가 지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어령예술극장 옥상에서 창조관에 가는 길은 다음 날 오후 1시 46분에 생겼다. 창조관으로 가는 길에 켠 아트로넛에는 ‘당신의 선택에 따라 누군가의 우주가 바뀔 수 있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나오고, ‘그곳이 어디든 가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라는 말도 나온다. 나로 인해 바뀐 우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가본 곳에 대해서는전부 다 알수있게 될까, 한창 궁금해 하다보면 무성한 낙엽너머에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그 앞엔 새로운 우주로 향하는 포털이 열려있다. 지도는 새로운 길을 그릴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