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유퀴즈 한예종’을 검색해 보자. 조만간 우린 ‘박정민이 고대를 자퇴하고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계기’를 듣게 될 것이며, ‘동기 사이에서 인기 어마어마했던 김고은’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집안 대대로 바순 전공하신 한예종 자기님’에게 바순 가격을 물어볼 수 있고, ‘즉석에서 벌어지는 상모춤을 보며’ 한예종 ‘클라쓰’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종종 예기치 않게 예종인을 TV에서 만날 때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이내 궁금해진다. 대중들에게 ‘한예종 출신’이란말은어떤의미인걸까.때로는범접할수없는 천재로, 때로는 다가갈 수 없는 스타로, 혹은 비루하고 고달픈 괴짜로. 이리도 다양한 연상 작용이 가능한 걸 보면 모르긴 해도 ‘한예종 출신’이라는 말엔 남다른 함의가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네? 천재들만 간다구요?
올여름 학교가 떠들썩했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을 거쳐 한예종 음악원에 재학 중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8세의 나이로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1 대회 우승 후 한 인터뷰에서 그는 향후 유학 계획을 묻는 외신기자의 질문에 “한국에 계신 위대한 스승에게 아직 배울 것이 많다”라고 답하며 오랜 스승인 손민수 교수와 모교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국내 언론의 보도에는 어김없이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그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름도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렸으며, 학교에는 한동안 축하를 위한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이를 지켜보며 개교 25주년을 맞아 제작되었던 <나는 천재로소이다>를 떠올린다. 영상은 “한예종 학생들은 모두 천재라던데,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에 영상원 학생 박억씨는 이렇게 답한다.“아마도그런것 같아요. 근데 어릴 때 눈높이를 했는데 눈높이 선생님이 제가 천재인 걸 몰라줬어요. 눈높이가 안 맞았던 거죠...” “천재면 좋아요?” 이어지는 질문엔 무용원 학생 김용빈 씨가 이렇게 답한다. “좋죠, 제가 천재라서... 요즘엔 최저시급보다 좀 더 받고 있어요!” 이처럼 영상은 한예종 학생들의 자아도취와 자기 비하 사이를 부지런히 오고 가며 채워진다. 언뜻 우스개 같은 답변들이 반복될수록, 청자는 처음의 질문들이 어찌나 우문愚問이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러한 ‘우문우답’의 미학은 사실 천재와 바보는 ‘한 끗’ 차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운다.
다만, 어디서나 그 ‘한 끗’이 무한한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던가. 누군가는 딱 그만큼이 모자라 주저앉고, 또 누군가는 간발의 차이로 그 끝에 도달하니 말이다. 몇해 전 한예종 재학생들의 캠퍼스 풍경을 담았던 대학내일의 <네? 한예종은 천재들만 간다구요?>를 떠올린다.
이 영상에서 영상원 학생 박희연 씨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과 들어오려면 체력을 키우세요, 체력이 최곱니다.” 이어서 전통예술원 학생 김희영 씨가 이렇게 덧붙인다. “다들 연습실에서 너무 살아서 못 나와요, 그게 바로 저희랍니다...” 아마도 천재라는 빛나는 말에 가려지고 생략된 건 같은 작업을 수천 수만번 반복하는 끈기와 불확실한 미래를 오롯이 견디는 강단, 그리고 위대한 스승과 좋은 동료를 만난 천운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네? 한예종은 천재들만 간다구요?” 수없이 들어 온 질문에 이제 예종인들은 모범 답안을 제출한다.
“네, 천재 맞습니다.”
아 한예종이에요 저 친구도
<튀르키예즈 온 더 블럭>(이하 튀르키예즈)에는 다양한 게스트가 출연한다. 특유의 ‘B급 감성’을 지닌 튀르키예즈는 세련되고 고상하진 않지만, 다소 가볍고 솔직한 비주류 감성을 무기로 유튜브 내에서 흥행을 이어 가고 있다. 수많은 게스트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유튜브 클립은 <SNL 코리아>에서 ‘주기자’ 캐릭터로 이름을 알린 후 현재는 연기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 주현영 편이다. 740만 조회수를 기록한(2022. 11. 기준)
이 영상을 필자가 특별히 주목하게 된 이유는 이 영상에 뜬금없이 ‘한예종’이란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되기 때문이다.
“왜 대학 입시를 3수까지 하신 거예요?”라는 진행자 이용진의 질문에 게스트 주현영이 답한다. “제가 한예종에 제일 가고 싶었어요. 시험을 봤는데 다 떨어져 가지고...”, 이어서 이용진은 PD와 스태프를 가리키며,
“아 한예종이에요 저 친구도!”라고 말한다. 한예종 출신인데 튀르키예즈를 같이 만들고 있다는 말에 별안간 주현영은 웃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한예종 출신’이라는 말에 숨은 진짜 함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들어가기도 정말 힘들지만 졸업해도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으며, 기대치는 무진장 높아서 평범한 직장 생활이 오히려 어색하고 웃음 나는, ‘한예종 출신’이란 말은 이토록 ‘웃픈’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방송 매체에서 활약하는 한예종 출신 스타들의 최근 모습을 짚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우선 SBS의 여행 예능 <찐친 이상 출발, 딱 한 번 간다면>에는 연극원 동문 배우들(이상이, 이유영, 임지연, 수호, 차서원)이 출연한다. ‘모여라 한예종’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만큼 여행 전부터 캠퍼스 시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때문에 타 대학 출신 배우 이규형은 떠나기 전부터 소외감을 걱정하기도 한다. ‘전설의 10학번’이라고 불리는 스타들이기에 시청자들은 무언가 특별함을 기대하겠지만, 사진과 기억을 통해 그 시절을 추억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의 학창 시절도 모두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편, 한예종 출신의 두 배우 박정민과 이제훈은 씨네21의 유튜브 콘텐츠 <줌터뷰>에 출연하여 영화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줌터뷰>는 줌(zoom)을 통해 비대면으로 서로를 인터뷰하는 독특한 컨셉으로 진행되는데, 이 영상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며 그동안 걸어온 배우의 길에 대해 털어놓는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패기 같은 것이 있었다는 이제훈의 말에 박정민 역시 그때는 ‘계산이 없었다’며 그리워하는 모습이 특별히 인상 깊다. 이들은 KT seezn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어나더 레코드: 이제훈〉 촬영을 위해 한예종을 찾아 더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 저 친구도 한예종 출신이었어?’ 할 만한 이들도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의 절친이자 직장 동료인 최수연 역을 맡은 배우 하윤경은 연극원 연기과 출신이다. 또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산부인과 레지던트 추민하 역을 맡은 안은진 역시 마찬가지로 연기과 출신이다. <SKY 캐슬>에서 각각 하은별 역과 주석경 역을 맡은 최예빈과 한지현 역시 연기과 동문이며, 최근 <작은 아씨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고수임 역의 박보경도 연기과를 졸업했다. <범죄도시>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된 진선규 역시 연기과 동문이며, 잘 알려진 대로 이 두 배우는 부부 사이이기도 하다. 졸업 후 단숨에 이름을 알린 듯 보이지만 다소 긴 무명의 시기를 잘 견뎌 냈다는 점 역시 이들의 공통점이다.
장동건부터 〈오징어 게임〉의 아누팜 트리파티까지, 우리는 한예종 출신 스타들을 여럿 알고 있다. 아마도 지난 30년 동안 한예종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천재와 스타들이 넘쳐 나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개교 30년을 지나온 이 학교가 단지 ‘무수한 별들이 잉태되는 은하수’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예술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괴짜’들이 존재한다. 그들 중 몇몇은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다수는 하늘의 별이 아닌 땅속의 원석으로 살아간다. 하여 원석을 알아보고 다듬는 ‘세공사’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한예종은 그런 곳이다.
빌어먹을 예술 따위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현재 한예종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배우 진선규가 출연했다. 그는 특유의 온화하고 담담한 말투로 무명 시절 겪은 일들을 풀어놨다. “결혼하고 한동안 제가 수입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집에 쌀이 떨어진 거예요. 친한 선배 집에 쌀을 빌리러 갔는데,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는 결코 진선규 배우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술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 기꺼이 ‘빌어먹을’ 각오를 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KBS의 〈다큐멘터리 3일〉(이하 〈다큐3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새학기’ 편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9년에 방영되었다. 〈다큐3일〉은 제목 그대로 3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다. 제작진은 석관동과 서초동 캠퍼스를 분주히 누비며 우연히 만난 학생들에게 질문을 건넨다. ‘캠퍼스 생활에 대해’, 혹은 ‘예술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아니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묻는 질문에 학생들의 대답이 영 신통치 않다. “사실, 다들 너무 바빠서요... 바쁘게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 “이 바닥에 20, 30년 남아 있으면 되긴 되더라. 이 말 믿고 하는 거죠.”, “죄송한데요, 저는 민망할 정도로 진로가 확실치 않아서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다큐 속 학교의 모습은 그대로인 듯하다. 여전히 예종인들은 불확실함을 오롯이 혼자의 몫으로 견디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화려한 조명과 천재라는 수식어 뒤에는 어김없이 하루를 간신히 견뎌 내는 괴짜들의 ‘진짜’ 삶이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예술 따위>는 예종인을 담은 기록의 최신판이다. 이 작품은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웹드라마로 제작됐다. 학교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예종인의 서글픈 초상이며, 동시에 점점 무용해져 가는 예술에 대한 애도이다. 극 중 영화과 학생으로 졸업 작품의 벽에 가로막혀 연일 고뇌하는 ‘구누아(장샘이)’는 어느 날 우연히 기막힌 시놉시스 아이디어가 적힌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쪽지를 통해 누아는 ‘예술이 삭제된 세상’을 상상하게 되고, 이를 졸업 작품으로 구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2화: 떡볶이 봉투에서 나온 졸업 작품 소재’에서 떡볶이집 사장님을 향한 누아의 푸념이 인상깊다. “영화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줄 아세요? 영화는 재능도 필요하죠, 돈도 필요하죠, 사람도 필요하죠, 아 그리고 하다보면 사람들이랑 싸우죠. 그만두면 또 새로운 사람 구해야 되고... 그럼 또 돈이 들고...” 아마도 이런 푸념이 비단 영화판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예술이란 여러모로 생각보다 고단하고 복잡다단한가 보다.
‘서른’이란 말은 ‘어른’이란 말과 닮았다. 마냥 철없이 굴면 여지없이 나잇값 못한단 말을 듣고, 어른인 척 무게 잡으면 어느새 ‘젊은 꼰대’가 되어 있는, 그래서 서른은 참 애매한 나이다. 이제 갓 서른 살을 넘긴 ‘예종이’는 그 애매한 기준 속에서 제법 중심을 잘 잡아 가는 것 같다. 천재와 바보, 대중과 예술 사이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예종인들이 오늘따라 안쓰럽고 기특하다.
‘한예종 출신’이라는 말의 함의를 물으며 글을 열었다. 글을 마치며 다만 응원의 말을 남긴다. 때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성숙함으로, 때론 철없는 아이의 순수함으로 모든 예종인들이 무사히 관중의 마음 안으로 ‘엔터(Enter)’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의 중심을 지켜 내며 ‘한예종 출신’이란 수식어보다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더욱 빛나기를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