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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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율작가 지망생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말이 있다. 예술가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되도록 만들지 않을 것. 어떤 식으로든, ‘서사’가 필요한 장르의 입문 단계에서 한 번쯤 마주할 법한 규칙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내면에 있는 것을 예술로서 표출하는 사람이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만 몰두한 작품은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클래스>는 이러한 불문율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극장에 들어서면 당신은 흰 무대 벽에 띄워진 각 장의 제목을 볼 수 있다. 1장, 첫 번째 수업부터 9장, 마지막 수업. 그렇다. 이것은 수업에 대한 연극이다. 그중에서도 희곡 수업에 대한 연극. 다른 분야의 예술이어도 진부하다는 평을 들을 만한데, 과감히 같은 분야를 택했다. 심지어 데뷔한 작가도 아닌 예술대학교 학생에 대한 극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예술가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만들지 않을 것’ 이라는 불문율이 내포한 우려를 보여 줄 것만 같다. 허나 <클래스>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예술에 대해 다루어야만 하는, 예술 아닌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당위성이.

무대는 단 두 명의 배우와 미니멀한 세트로 구성된다. 큰 창이 뚫려서 마치 액자처럼 보이는 흰 벽이 유일한 세트다. 그 너머에는 희곡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이 있다. 관객은 이 프레임을 통해 마치 타인의 강의실을 비밀스레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교수 A와 대학원생 B는 바로 이곳에서 희곡 수업을 한다. 수강생은 B 한 명뿐. B의 졸업 작품으로 낼 희곡을 피드백하는 수업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한편 우리가 더 세심한 시선을 던져야 할 서브 플롯은 ‘클래스’의 바깥에 존재한다. 프레임 앞, 관객이 다리를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무대의 끝자락에는 강의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학생의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극은 죽은 학우에게 B가 꽃을 바치는 추모로부터 시작된다. 이 장면은 연극이 단지 ‘예술 수업’ 그 자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님을 관객에게 시사한다. 연극은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들을 담아낸다.
누군가 죽어도 세계는 돌아간다. 바로 얼마 전 룸메이트가 자살했지만 B는 졸업 작품을 제출해야 한다. 학교의 견고한 권위는 한 사람의 목숨만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교수 A는 자신을 동경하는 B에게 냉정히 대하며 선을 긋는다. 그러나 B는 그런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인물이다. 냉담한 교수의 태도에는 오히려 ‘사인해 줄 때까지 책을 들고 오겠다’고 답한다. 말하자면 카리스마와 마이페이스의 대결이다.

예술은 고통을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교육이 실제로 성행하기도 했다.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 전반에 강압적 기조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A는 학생을 인격적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 시종일관 무시하는 태도로 공격적 언사를 일삼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우아하며 지적으로 보인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학생들에게 비치는지, 자신의 어떤 태도가 학생들로 하여금 강압적 언사를 거부할 수 없게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A는 분명 위압감을 갖고 있으나 결정적인 선은 결코 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수업은 확실히 정석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들을 해 준다. 그러니 학생 입장에서는 무어라 항변하기도 어렵다. 강의실은 하나의 왕국이다. 보편적인 학생이라면 이러한 임파워링(empowering)에 금세 익숙해졌을 것이다. 배움을 받는 사람이라면 응당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허나 B는 이에 쉽게 밀리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좇는다. 어찌 되었든 B에게 A 교수는 존경하는 작가이고, 자신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다. 강압적이지만 존경받는 교수와 그를 동경하지만 추종하지는 않는 제자. 둘의 기묘한 수업은 숨이 막힌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들은 암묵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두산아트센터

극중극, 재현될 수 없는문제는 B의 졸업 작품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번번이 실패작만을 내놓던 B에게 교수 A는 진정 쓰고 싶은 이야기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이에 B는 간신히 <고독한 케이크 방>이라는 희곡을 써 온다. 둘은 이를 낭독하며 수업을 이끌어 나간다. 학생 B가 주인공인 ‘나나’ 역을, 교수 A가 나나의 ‘언니’ 역을 맡는다. <고독한 케이크 방>이라는 극중극은 A와 B 이야기만큼이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현실과 극중극의 경계를 점차 흐려 간다.
여기서 서두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자. 어째서 작가가 주인공인 극을 쓰면 안 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가 객관성을 잃기 쉽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예술가가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면 필연적으로 자아 투영을 하게 된다. <고독한 케이크 방>도 마찬가지다. ‘나나’ 는 사실상 학생 B 그 자체다. ‘나나’라는 이름 역시 그런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데, 얼핏 아이처럼 귀여운 이름이면서 ‘나 자신’을 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나나’라는 캐릭터에 미성숙한 학생 B의 자아가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나는 성인이지만 함께 사는 언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극중극은 그러한 나나의 방황을 담고 있다. 언니라는 존재는 룸메이트인지, 사촌인지, 가족인지 모호하게 표현되며 관객들은 나나와 언니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침묵 속의 공백은 묵직하게 숨을 짓누른다. 보이지 않고 실체도 없는 과거의 폭력에서 나나는 쉬이 벗어날 수 없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언니의 압박은 나나를 짓누르고, 극중극은 그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니 서사가 제대로 흘러갈 리 없다. 교수 A는 이를 지적하지만, 학생 B는 그 서사에 대해 차마 ‘말할 수 없다’.
때로 삶에는 명확하게 재현될 수 없는 감각들이 들이닥친다. 트라우마 상황이 그렇다. 갑작스러운 폭력 상황에 놓인 피해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흔은 기억과 영혼에 낙인처럼 남는다. 트라우마를 무시할 수도, 마주할 수도 없는 회색 지대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 회색 지대에 있는 한 트라우마가 투영된 작품에 객관적 시선을 던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학생 B는 ‘나나’가 자신이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교수도, 관객들도 모두 알고 있다. 심지어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하다. 그래서 교수는 작품과 작가를 분리하라고 종용하다 결국 입 밖으로 사실을 꺼내고 만다. ‘그건 너잖아’라고.
알을 안에서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밖에서 깨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교수의 선고는 명백히 후자의 행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희곡 수업’이라는 세팅이 이러한 폭력적 상황을 합리화하도록 만든다. 둘은 희곡을 쓰기 위해 만나는 관계고, 교수는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 교수로서는 학생에게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멀어지라는 충고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교수 A를 일방적인 가해자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의 입장에 공감하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허나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예술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지도라는 미명하에 학생의 인격을 파괴할 수 있는가?

폭력적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폭력은 폭력이다. 이는 <클래스>의 주 플롯과 서브 플롯을 관통한다. 교수의 위계 폭력으로 인해 자살한 학생의 서브 플롯으로 돌아가 보자. 그를 위해 붙은 교내 대자보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밥입니다.
우리는 학생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예술가입니다. 우리가 학생의 권리를 주장하면 누군가는 우리를 예술가라고 부르고, 우리가 예술가의 권리를 주장하면 우리를 학생이라고 부릅니다.’


꽤 자주, 예술가들에게는 자기 착취적 행위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는 한다. 헝그리 정신이라는 명목에서다. 허나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밥’이다. 물리적으로, 또한 심리적으로 신체와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 땅에 발붙이고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것. 신체는 가장 작은 세계다. 신체를 유지할 수 없다면 예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에서 스스로에 대한 포기를 종용하는 폭거가 예술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교수 A와 학생 B는 죽은 학생에 대한 시선에서도 대립한다. 죽은 학생은 원로 교수의 작업을 돕다 사망했다. 죽은 학생이 쓴 문장들이 원로 교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원로 교수는 학생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비만 지급하였다. 결국 작가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학생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을 택한다. 자연히 학생 B는 죽은 학생의 편을 들지만, 교수 A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묻는다. 어째서 늘 강자가 가해자이며, 약자가 피해자일 것이라 가정하느냐고. 이 극이 첨예해질 수 있는 것은 교수 A의 말에도 일부분 일리가 있기 때문이며, 학생 B가 완벽한 선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로 교수와 죽은 학생의 일은 재현 불가능하다. 교수 A는명확한증거없이원로교수를탓할수없다는입장이고,학생B는 그 증거를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둘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스는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대학원 수업이라는 제도상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만남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교수 A는 학생을 존중하지 않고, 학생 B는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무엇을 위해서 이 클래스는 지속되는가? 표면적으로 이는 오로지 졸업을 위해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들어간다면 다르다.

©두산아트센터

앙드레 말로는 ‘예술은 죽음에 저항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라는 그 유명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사람의 수명은 한정적이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기실 생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예술을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유일한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질 들뢰즈는 모든 예술 작품이 저항 행위는 아니지만, 예술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는 저항 행위로서 작동한다고 본다. 이는 예술이 비일상적이고 불가능한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은 일상적 행위로는 결코 도달 불가능한 영역에 도전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예술가의 창작 욕구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교수 A와 학생 B의 수업은 창작욕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의무감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지점은 학생 B가 이러한 압박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 클래스에 학생 B의 편은 없다. 어쩌면 클래스 바깥의 차가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사회에, 그리고 타인들에게 죽은 학생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지나간 추모 대상에 불과하다. 허나 오직 학생 B에게만큼은 그 죽음이 현재진행형의 미제 사건이다. 학생 B 역시 죽은 학생처럼 부조리에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학생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했다. 학생 B도 마찬가지다. 발화하는 것조차 어려운 과거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학생 B를 괴롭히지만, 그는 그에 대한 적법한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사는 것만으로도 저항이 되고, 쓰는 것만으로도 투쟁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학생 B와 죽은 학생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몰랐다.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일어난 일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위계 때문이다. 권력자의 지위는 피해자와 주변인의 눈을 가릴 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를 무마하기도 한다. 마치 클래스 내에서 행해지는 교수 A의 강압적 행동이 수업이라는 이유로 용인되는 것처럼. 이러한 현실 앞에서 학생B는아무것도할수없었다.그러니그현실을담아내고,이야기 속에서만이라도 해결하려 시도하는 그의 희곡 <고독한 케이크 방>은 그 자체가 투쟁이며 회색 지대의 종말을 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곡 집필, 다시 말해 학생 B의 예술 행위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비명이다. <고독한 케이크 방>은 연극 <클래스>의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이는 학생 B의 삶과 <고독한 케이크 방>이라는 예술이 분리 불가능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리를 종용한 교수 A가 가해자인 ‘언니’ 역을 한다는 점까지 모두 현실과 예술을 쉽게 분리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래도 B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끝내 희곡을 완성한 B는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와 객석에 앉는다. 마침내 작품과의 거리 두기에 성공한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는 쓰는 행위를 통해 트라우마를 어느정도 마주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수업은 성공적인 셈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지점을 경계해야 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과정이 단지 결과만으로 합리화되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졸업 작품 완성에 성공했으니 지도교수인 A는 좋은 사람일까?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허나 현실에서는 좋은 사람은 아닐지언정 좋은 교수라는 평을 들을 것만 같다. 그래서 <클래스>는 무책임한 엔딩을 내지 않는다.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 B는 원로 교수의 표절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어 제시한다.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교수 A의 몫이다. 학생으로부터 받은 케이크를 내려다보는 교수의 모습으로 극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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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출신인 극작가 진주는 <클래스>를 집필할 때 예술과 현실, 폭력과 위계, 진실, 인정, 연대, 그리고 어른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생각했다고 밝혔다. 예술과 현실을 분리하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예술과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감춘다. 현실의 땅을 딛지 않으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예술 없이 예술가의 현실이 이어지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 속에 숨겨진 폭력적 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본디 삶이란 명료하지 않은 것이므로 극 역시 이에 대해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이 극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눈앞에 놓인 케이크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 판단은 어른의 몫일 것이라고.

글 강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