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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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타자와 나 사이에는 두 가지 오해가 존재한다. 첫째는 ‘너와 내가 다르다’이고, 둘째는 ‘너와 내가 같다’이다. 이 오해는 쉽사리 풀리지 않으며, 우리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대할 때 늘상 이 두 오해 사이를 진동한다. 간혹 이 모든 게 오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무력해지고 막막해진다. 미지의 우주에 던져지는 기분. 손끝 하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그때 그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이 던져진다. 도대체 ‘너’는 누구야? 오해가 깨어지는 순간이다. 질문이 던져지고, 그럼 ‘나’는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무력함에 얼어붙어 있던 손끝은 조금씩 꿈틀거린다. 그럼에도 답은 찾아지지 않는데, 그때 연이은 다음 질문이 출현한다. ‘나’는 누군데? ‘나’로 인해 ‘너’를 궁금해하고, ‘너’로 인해 또다시 ‘나’가 궁금해진다. 그제야 절대 닿지 않을 것만 같던 서로의 손은 살짝씩 스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오해가 깨지는, 너와 내가 서로 닿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가장 극명한 사건은 바로 타자의 죽음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애도이다. 너와 나는 다르기 때문에 네가 죽어도 나는 살아 있으며, 또 너와 내가 같기 때문에 네가 죽은 것처럼 나도 죽게 된다. 그렇기에 애도는 타자를 들고 방황하는 과정이다. 죽어 있는 타자를 나의 땅에 놓아야 할지 영원히 너의 땅에 가만두어야 할지, 망자는 깨어 대답하지 않기에 그를 든 채 우리는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서성거린다. 이러한 과정을 겪고 나면 우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했듯 ‘타자를 자기 안에 짊어지게’1 된다. 애도는 이렇듯 고정되어 있던 타자의 운반2을 야기하며 ‘너’와 ‘나’가 접하게 한다.

연극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안에서는 수많은 죽음이 발생하고 따라서 그 속에서 ‘나’와 ‘너’가 치열하게 탐구된다. 극의 가장 중심 사건은 동화 작가 영원이 지혜의 죽음 이후 지혜에게 요청받았던 작은발톱수달이 나오는 동화를 집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원은 과거의 기억과 꿈을 마주하고 그 기억의 파편들과 함께 동화 속 내용이 교차하며 극은 진행된다. 기억의 속성이 그렇듯, 연극은 질서정연하게 사건들을 배열하고 있다기보다는 파편화되어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된다. 파편화된 극의 전개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함께 얽혀 굴러가는데 이를 중심 소재인 영원의 동화를 따라가며 살펴보려 한다.

©국립극단

그때, ●●은 말했어요.
영원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은 작은발톱수달이다. 이들은 동물이지만 ‘말하는 존재’이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플라스틱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존재들이다. 이 ‘수달’이라는 명칭은 동물 ‘수달’을 지칭할 때뿐만 아니라 영원이 그의 가족 지혜와 정현을 부를 때도 사용된다. 영원은 지혜와 정현의 딸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정현의 여동생의 딸이지만, 여동생이 모종의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자 연인 사이로 추정되는 지혜와 정현이 그녀를 키우고 있다. 영원은 자신의 엄마인 지혜와 정현을 모두 엄마라 부르지 않고 ‘지혜 수달’, ‘정현 수달’이라 부른다.
동화 속 수달들은 영원의 현실 속 인물과 닮아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동일하게 비유하지는 않는다. 수달의 구체성은 생생하며 그들은 그저 영원의 이야기 옆에 병치되어 머문다.3 하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 사회 속 타자라는 사실이다. 수달은 인간이라는 오래된 주체 ‘나’에 대비되는 타자인 ‘너’이다. 이들 수달은 동물원의 재정적 이유로 혹은 귀엽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길러지다가 버려져 강가에서 생활하는 존재들이며, 또다시 인간 세계에서 만들어진 플라스틱으로 인해 죽는다. 동성 연인인 지혜와 정현 역시 사회에서 흔히 타자로 이야기되는 사람들이다.4 나아가 소방관인 정현은 화재 현장 안팎으로 마셔 댄 연기로 인해 순직했지만 사람들은 정현이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회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강력한 인간의 ‘말’들에 반해 수달들의 ‘말’은 ‘나’가 아닌 ‘너’의 말로, 들리지도 않고 인정되지도 않는다. 이는 수달의 죽음을 초래하기도(동물 수달의 죽음), 수달의 명예로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아가기도(정현의 죽음) 한다. 하지만 이를 관람하는 관객은 극 속 ‘나’들과 달리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들의 말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관객은 그들의 죽음과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에 공감하며 커다란 감정적 동요를 느끼고, 사회를 이루는 ‘나’의 말들이 아닌 ‘너’의 말들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 더불어 극의 형식적인 측면을 ‘말하기’의 맥락에서 잠시 살펴보면,
이 연극은 배우가 대사만을 발화하는 전통적 연극의 규칙을 벗어나 희곡의 지문까지도 배우를 통해 발화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각 장애인 관객들을 위한 베리어 프리(barrier-free) 장치이면서 동선의 이동이나 무대장치의 변화 등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음성해설보다는 극과 관객이 호흡하기에 더 용이한 방식이다. 공연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지문은 극중 지혜가 알고 있는 것, 행동의 원인이 되는 말과 의지는 지혜가 발화하고 지혜가 모르는 정보는 다른 인물이 발화하는 규칙에 따라 무대 위에서 읽혔다고 한다. 이런 규칙에 의해 지문이 다양한 인물들에게 나누어 읽혀 중첩되고 풍부한 함의를 품게 되며 결국 시각장애인 관객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에게 기존과는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자,●●이 들었어요.
영원의 동화 속에는 수달과 함께하는 또 다른 존재 ‘구슬’이 등장한다. 개천을 떠다니는 구슬은 개천으로 ‘떠밀려 온’ 존재들의 현실을 꾸밈없이 비추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수달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영원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구슬은 서로에 대한 수달들의 믿음을,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희망을 이따금 비추곤5 한다. 우리는 이 구슬을 통해 마음을 듣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듣는 이의 개인적인 서사로 타자의 이야기를 왜곡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온전하게 듣고 비춰내는 구슬의 투명한 방식은 우리에게 타인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경청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안하는 듯 보인다.
더불어 이 극에서는 죽음을 전달하는 주된 매체로 음성사서함이 등장한다. 영원은 지혜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음성사서함을 통해 듣고 수달을 주인공으로 동화를 쓰고자 결심하게 되며, 정현의 동료인 민재의 죽음을 보여 주는 방식 역시 음성사서함 속 민재의 음성을 통해서이다. 음성사서함은 즉각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전화와는 달리 필연적으로 전달의 지연이 일어난다. 이 지연은 극에서 언제나 죽음과 연결된 장치로 사용되며 죽음의 속성을 상기시킨다. 죽음과 상실은 의미의 지연과 유보 없이는 인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6 죽음이라는 거대한 타자를 삶 안에서 숨 쉬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며, 따라서 음성사서함은 특유의 ‘반복’ 기능을 활용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망자의 말을 들려주고 또 들려준다. 이러한 반복 속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타자를 점차 껴안을 수 있게 된다.

©국립극단

그래서 그들은 ●●을 썼어요.
이렇게 여러 존재들의 말하기와 듣기로 이루어진 동화 쓰기의 과정은 영원에게 있어 지혜를 애도하는 방법이다. 애도 직후의 개인은 얼마간 상실이 불러일으키는 슬픔으로 말미암아 망자에 대한 그 어떤 말하기도, 글쓰기도 불가능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 시간을 견딘 후 점차 망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며 그 죽음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 극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의인화된 동화가 슬픔에 빠져 있는 영원을 뒤로한 채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며 앞서서 먼저 출발해 버린다. 보통의 애도하는 말하기와 글쓰기가 얼마간 이어지는 슬픔의 침잠 상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이 극에서는 글이 글을 집도하는 주체를 앞선다. 그렇게 동화는 애도의 사후적 결과물이 아니라 영원과 애도를 함께하는 동료가 된다. 영원은 동화가 이끄는 대로 여러 기억들을 마주하며 그 혼란 속에 침잠한 채로 동화를 써 내려간다. 극의 후반에는 동화를 끝마친 48살의 영원이 71살의 지혜와 함께 지혜가 매일같이 반복하던 플라스틱 선별 작업을 함께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화가 잘 팔릴 것 같냐는 영원의 질문에 지혜는 아무 말 없이 문 밖으로 나간다.
홀로 남아 플라스틱을 선별하던 영원은 플라스틱 조각에 베여 상처를 입고, 그곳에서는 무언가 자라난다. 애도가 끝난 자리에서 지혜는 동화 속에 온전히 녹아들며 영원의 현실에서 퇴장하고, 그 죽음을 껴안은 영원은 동화를 통해 지혜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간 것이다.

동화가 앞서가며 영원의 기억을 무질서하게 끌어 올리는 과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원이 겪어 왔던 사건들 자체의 인과관계와 선후관계 파악을 모호하게 하긴 하지만 대신 온전한 애도 이전에 야기되는 상실의 혼란을 효과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극 후반부, 동화가 완성된 이후 영원의 감정에 더욱 공감하게 하며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극은 영원의 상처에서 무엇이 자라났는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 주지는 않지만 관객은 저마다의 감상을 토대로 그곳에서 무언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동화는 우리에게 읽혔다. 극을 보는 우리는 동화의 성실한 독자였고 따라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나’와 ‘너’ 사이의 간극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아가 그렇게 동화를 읽은 우리는 죽음을 함께 애도했고, 극이 진행되는 내내 ‘너’를 든 채 우리의 삶 안을 헤매었다.
살아, 남았다 와 죽어, 갔다 사이. 이곳엔 동화가 있었다.

글 오지은
1 김민영, (2019). 「데리다의 애도와 수행적 글쓰기」,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18
2 김민영, 위의 논문, p.18
3 배해률,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eBook), 걷는사람, 2022, 운영위원의 글
4 이들의 성별이 정확하게 특징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정현을 언니라고 부르는 지혜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희곡을 쓸 때 퀴어를 디폴트에 두고 극작을 했다는 배해률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동성 연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ntck1234/222719632881 (국립극단 인터뷰)
5 프로그램 북 p.16
6 김민영, 앞의 논문,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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