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2022

STORY

제대로 어려운 숙제를 받았습니다. 벡터Vector. 위치, 속도, 힘, 크기와 방향성을 갖는 물리량, 기하학적 대상. 이해를 돕기 위해 찾은 첫 줄에서 이미 정신을 놓습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수포자여서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이었다고 농처럼 건네던 작가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왜 인생의 ‘나침반’이나 삶의 ‘좌표’ 같은 익숙한 상징 언어가 아닌 물리학 용어 벡터를 이 여름에 올려 두게 된 것일까요.

엔데믹을 기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어깨를 부닥치며 걷다 보면 이것은 어떤 숙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팬데믹 2년의 시간 동안 빠르게 달라진 일상, 그보다 더 빠르게 적응한 생활로 무엇이 맞는지 사고의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여행에서 길을 헤맬 때 우리가 다시 출발점을 찾아 가는 것처럼 예술하는 근육을 만들어준 처음으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예술의 기초를 쌓기 위해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권장했던 수업과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강의를 이곳을 거쳐 간 예술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동시대 흐름에 고유한 무게를 더한 창작 작업으로 스스로 대지를 만들어 가는 젊은 예술가들의 영토 확장도 들여다볼 만합니다. 존재론적 불안이 엄습하는 후배들이 헬멧이라도 쓰고 헤딩할 수 있도록 도전과 실패에 대한 생생한 후기를 들려주는 선배와의 만남 ‘아트문’이나 잠 못 드는 예술가를 위한 고요한 수면 테라피 ‘꿀잠 프로젝트’ 등은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든든한 에너지바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예술가가 서 있는 위치나 속도, 힘의 크기와 방향이 모두 마음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무대미술가이자 옷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담아내는 의상디자이너로서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언제나 실천, 실행에 먼저 나서는 이진희의 호기심을 배웁니다. 그리운 감정을 창작의 연료로 쓰면서 진하게 망가지고 놀고 헤매던 시간은 실패가 아니므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치로 오감을 작동시키는 가수 정밀아의 밀어붙이는 욕심을 새깁니다. 춤, 패션, 연기 여러 모습의 자신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그 색깔을 각인시키고픈 이채원의 패기와 스펀지 같은 놀라운 흡수력으로 몰입하는 무용수이면서도 그 춤을 더 잘 보여 주는 무대연출가를 희망하는 박세림의 꿈을 응원합니다. 1970년대 구소비에트 연방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를 한-카자흐스탄 최초 합작 영화로 제작한 고려인 4세 박루슬란 감독의 뚝심도 여기에 보탭니다.

뜨거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벡터를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벡터를 알기 위해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뒤척이는 시간, 눈감고 코끼리 뒷다리를 만지듯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려고 하얗게 불태우는 새벽 3시. 가장 예술적 공간 각자의 방에서 호기심, 욕심, 패기, 꿈을 실어 나르며 뚝심으로 버티는 예술가들이 보입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한 뿌리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그저 예술하는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그 크기와 방향을 서서히 가늠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