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이르게 찾아온 봄이 낯설 때였다. “선배들이나 선생님들, 예전 한예종을 겪어 보신 분들이 이야기하는 ‘라떼 토크’가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들던 무렵 참석했던 매거진 기획 회의 때 오로지 재미에 기반한 아무 말 기획안을 던졌다. 당첨이었다. (아니, 왜?!) 봄, 여름호 두 번에 걸쳐 진행되는 확정 기획안을 받아 들자 막막함이 앞섰다. 대체 이 기획은 누가 제안했냐고 스스로 탓하고 있기엔 시간이 없었다. 누구보다 오랜 기간 한예종에 뿌리내리고 버텨 온 직원분들께 이야기를 나누어 달라 요청을 드렸다. 몇 번의 완곡한 거절, 몇 번의 치열한 조율, 몇 번의 갸륵한 읍소. “그래요, 일단 와 봐요.” 확답이라 믿고 싶은 회답을 얻고는 좋아서 어깨춤을 췄다. 한낮 최고 기온 28도. 빠른 속도로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던 어느 날, 석관캠퍼스를 종횡무진 누비며 ‘나의 한예종’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을 만났다.
“학교 공용 차량을 운용해요. 현장학습이나 답사, OT 같은 행사나 공연 때 스쿨버스로 학생들과 함께 움직여요. 예전에는 영상원 영화과 촬영 때도 함께 했어요. 그때는 형식이 디지털이 아니고 필름이어서 장비가 많고 무거웠거든요. 발전기 차를 가지고 같이 현장에 가서 돌려 주고 그랬어요.” 1995년에 한예종에 입사해 현재까지 운전직으로 근무 중인 한상열 선생님을 가장 처음 순서로 만나 개교 30주년을 맞은 소감을 물었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이선균, 오만석 이런 배우들이 학교 다닐 무렵에는 점심시간에 직원들하고 농구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 친구들이 이제는 교수가 되어서. 세월이 흘렀다는 게 느껴져서, 제가 늙은 것 같아서 싫어요. (웃음) 제가 참 오래 근무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300년, 3000년까지도 번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예종에 오래 근무한 죄’로 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 한상열 선생님께 근무하면서 가장 보람 있던 순간과 가장 고단했던 때를 물었다. “입사 이후 지금껏 학교가 성장하는 과정을 다 봤죠.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학교 본부가 예술의전당 한쪽에 전세 살듯 있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멋진 조경을 갖춘 캠퍼스가 됐잖아요. 배출한 학생들에게서도 굉장한 성과가 있었던 것 같고요.” 1995년부터 2022년까지, 이 오랜 시간을 한예종에서 감각해 오신 분께 ‘순간’을 여쭙다니.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자책할 즈음, 인생 선배님의 초탈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장 고됐던 건, 웃으면서 이야기할게요. 매일 별 보기 운동 했죠. 어두운 새벽에 나가서 어두운 새벽에 들어왔어요.” 고(故) 이강숙 초대 총장님을 수행하며 매년 한 개원씩 학교가 커 나가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하는 동안 너무 힘에 부쳐 사직서를 낸 적도 있었다고. “한 달에 쉬는 날이 하루 있을까 말까였어요. 1년이면 360일쯤 붙어 있었거든요. 그때 제가 20대였는데 얼마나 놀고 싶었겠어요.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느냐고, 도대체 사람을 죽이려고 그러는 거냐고 총장님 집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저 혼자 40여 분간 울분을 털어 냈어요.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내가 미안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학교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분의 진정성 때문이었단다. “그분은 학교 발전의 전부였다고 생각해요. 대신 그만큼 제가 고생했죠. 그분이 열심히 뛰어다닌 만큼 제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꼭 하고 싶네요.” 본인 입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며 멋쩍게 웃는 한상열 선생님께 나의 지론을 말씀드렸다. 당연하다고, 이런 건 생색을 내야 하는 거라고.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우리 학생들이 이 학교에 온 것이 후회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 주면 좋겠어요. 학교를 빛낼 수 있는 건 학생들밖에 없잖아요. 저희가 학생들을 위해서 보조 역할을 열심히 할 테니 학교를 좀 더 빛내 주었으면 좋겠어요. 부담스러운가요?”
고단했던 지난날을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는 일종의 숭고함 앞에 숨을 고르며 만남을 정리하고 의릉 근처에 자리한 무대미술 실습장으로 향했다. 무대미술과 졸업생인 만큼 그곳에 가는 길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반가움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2005년 3월 1일 자로 무대미술과 기자재 관리직으로 발령받아 지금껏 근무 중인 송기선 감독님 역시 “아, 녹음하시면 안 되는데요~” 하고 특유의 장난기로 반가움을 표했다. “2006년, 신 교사로 이사할 때 제일 바빴지. 임건수TD님이랑 각 호실을 다 돌아다니면서 뭐가 필요한지 파악하느라고 건물을 다 돌아다녔거든. TD님은 이사하고 앓느라 며칠 못 나왔어. (웃음)” 윤정섭 교수님, 최상철 교수님이 같은 학기에 공연을 올렸던 전설적인 해, 무대미술과 학생들 역시 저마다 레퍼토리 공연 디자인을 맡고 싶어서 경쟁했고 덕분에 재기발랄한 공연들이 많았다고. 제작소가 미술원 송추공방에 있을 때여서 궂은 날에도, 추운 겨울에도 세트를 수레에 실어 손수 극장까지 운반했던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학생들 열정만큼은 대단했단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공연에 임하는 만큼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어 주고 싶어 예산에 운송비 항목을 마련해 차량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공연 올리기 전에는 애들이 ‘감독님 죽을 것 같아요!’ 그래. 첫 공연 올라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서 돌아다녀.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애들한테 나는 그래. 다음 주 월요일이면 살아날 건데 왜 그러냐고. 내가 지켜봤는데, 절대 안 죽더라고.” 몸이 힘들어 무대 일 좀 쉬어야겠다 싶을 때도 도면을 가지고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예뻐 보인다고 덧붙였다. “계속 관찰해. 저마다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안전에 문제가 없다면 할 수 있는 건 되도록 하게끔 두는 거야. 그러다 잘못되면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을 해줘. 애들이 알아듣고 다음에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또 똑같은 실수를 하지. 처음이니까 그래, 괜찮아.” 학교 공연 무대 제작을 하면서 감독님께 야속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마치 내가 사고 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아 약 오를 때도 있었다. 소음과 분진으로 정신없는 제작소를 나와 맑은 하늘 아래 시원한 그늘 밑에서 감독님과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모든 것이 감독님의 교육 철학이었구나 싶었다. 야속함이 누그러들다 못해 되려 죄송해질 지경이었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복 받은 거야. 우리 학교처럼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나갈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데가 없어. 공연만 해도 파트별로 다 담당자가 있잖아. 고민이 있으면 찾아다니며 물어보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분야별로 다 있단 말이야. 학교 시설도 최대한 활용해서 써 봐야 해. 이런 게 있다고 알려만 주고 못 쓰게 하면 그걸 뭐 하러 갖다 놔. 교육 기자재는 써서 닳아서 없어지고 고장이 나야 해. 그 경험이 사회에 나가면 자신감이 되는 거야.”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도면을 들고 오거나 시장에서 사 온 재료들을 가져와 감독님께 이것저것 여쭤보는 무대미술과 재학생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다음 행선지는 영상원 행정조교실. 1999년부터 영상원 행정조교로 근무하는 조찬형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다른 일로 한번 찾아뵈었다가 배 아프게 웃다 나온 기억밖에 없어서 이번에는 좀 덜 웃고 진지하게 인터뷰해야지 굳게 다짐했던 터였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몰랐다….” 개교 30주년을 맞은 선생님의 소감에 내 다짐은 초반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전반적인 학사 행정, 교과 과정, 성적, 장학금, 홍보, 대외 교류, 입시, 졸업…. 업무를 물어보자 온갖 용어가 빠르게 줄지어 나왔다. 너무 많은 일을 하시는 거 아니냐 묻자 그쯤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다른 분들도 다 마찬가지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왔을 때가 막 영상원 1기 졸업생을 배출할 시기였어요. 당시는 문화예술 분야, 특히 영화나 영상 콘텐츠에 관련된 전문 교육기관이 없다 보니 갈증이 있는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굉장히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작품 만들고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주년이라니 감회가 새롭고 남다르네요.” 그때만 해도 모두가 서로 이름과 얼굴을 알고 지냈단다. 학생도, 직원도 수가 많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다. 긴밀하게 지냈던 학생들이 졸업해서 좋은 결과를 내거나 현장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 있다고. “시스템이 정착되어서 안정적으로 30년이 됐다고 생각해요. 좋은 장비 확보하고, 교과 과정 개편하고, 좋은 교수님 초빙하고 좋은 학생들 많이 뽑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활력과 에너지 그리고 유대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당시보다 조금 건조해졌다고 볼 수 있어요. 분위기 쇄신으로 예전 같은 활력을 찾으면 더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 영상원은 초창기만큼의 활력과 열정은 없지만,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아 운영되고 있으니 일장일단이 있단다. “행정조교는 업무와 신분 특성상 애매함이 있어요. 신분은 공무원이지만 1년마다 한 번씩 재임용 과정을 거쳐야 해요. 학생들, 교수님들, 공무원분들과 밀접하게 접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안 접하지도 않아요. 문득 이 업무가 꼭 관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절이 없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잖아요. 관절로서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해서 학교가 교육기관으로 적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역할 같다고 생각해요.” 근무 중 가장 고됐던 일화를 물었다가 내 일도 아닌데 울화가 치밀어서 어떻게 그 모든 걸 견디고 오래 근무를 할 수 있었냐 물었다. “탈출 시기를 놓쳤어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고, 그 자리에 엎드려 울다시피 웃었다. “학교를 막 확장하려던 시기에 (이직이 가능한) 2, 3년 언덕을 넘다 보니 일하느라 정신없어서 그 문턱을 넘는 줄도 모르고 넘어갔어요. 예전엔 제가 필요하다고 하는 다른 곳으로 갈걸 후회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후회도 기억이 안 나요. 제게 한예종은 내 에너지 반 이상을 투자한 곳이에요. 절대적인 양은 적지만 저한테는 크거든요.”
너무 많이 웃어서 허기가 졌다. 정신이 혼미했다. 이 재미와 유익함을 온전히 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인터뷰 녹음 파일을 웹으로 공개할까 생각했다가 흐느낌에 가까운 내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아서라, 그만두기로 했다. 본관 5층 테라스에서 우유 한 팩을 단숨에 들이켜고 마음을 진정했다.
마지막으로 1994년에 입사해 한예종 역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기획과 윤영선 선생님을 만나러 가야 했다. “저는 신입생들 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저는 늙는데 학교는 늙지 않고, 해마다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오니까 제가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늘 젊은 느낌인 것 같아요. 학생들이 다 자기 할 일 하면서 학교 곳곳에 있잖아요. 학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푸릇함과 생생함 덕분에 학교에 근무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 몰랐던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윤영선 선생님은 총무과에 등록금 담당자로 있었다. 가뜩이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적은 학교라 비대면 수업을 위한 환경 조성에 애를 먹었다. 실기 수업 사이에 이론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극장과 서초동 음악원 지하에 테이블과 와이파이를 설치했다. 좀 잠잠해지자 바로 총장 선거가 이어졌다. 처음으로 직선제를 도입했기에 규정을 개정했고, 모두가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와중에 국고 예산 담당자가 공석이 된 두어 달간 그 업무까지 맡았다. “원래 학교 행정 업무라는 게 내 전공 업무가 아닌데도 해야 해요. 발령 나면 업무를 배워야 하고, 당장 성과를 내야 해요. 힘든 건 있지만 한 번도 재미없던 적은 없어요. 다행히 인복이 많아서 구성원이 다 좋았어요. 구성원이 좋으면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아요.” 휘몰아치는 업무 이야기에 휩쓸려 정신을 못 차릴 때쯤 들려온,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고, 재미있었다.’는 마무리에서 어쩐지 경지에 오른 인간만이 풍길 수 있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20주년 이전에도 교수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한예종은 이미 정상이니 이제 내려갈 일밖에 없다고. 그런데 재작년 QS세계대학 평가에서 36위 하고 그랬잖아요. 우리나라 예술 분야에서는 최초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보적 위치에 있다 보니 이제는 노하우를 다른 학교와 나누면서 새로운 미래 예술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가 예산을 받는 학교로서의 책임감으로 환원하고 상생해야 하지 않을까요.” 근무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들려 달라 청하자 세월과 기억력을 탓하며 약간의 정적이 생겨났다. 지나온 많은 날을 되짚던 선생님이 갑자기 온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94년, 반포 한강공원에서 체육 행사를 할 때 학생들도 모두 와서 학교 행사를 즐겼단다. <마지막 승부>로 한창 스타덤에 오른 장동건이 농구 대회에 출전해 여직원 모두가 한마음으로 학생들을 응원했던 기억, 복도에 나가면 고(故) 이강숙 총장님이 학생들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다 환히 웃으며 손 흔들어 맞아 주셨던 기억, 교무과에 있을 때 비서실에서 삼고초려를 하며 보내온 꽃바구니를 받았던 기억…. 숱한 기억을 떠올리며 누구보다 30주년을 맞는 소감이 남다를 듯한 윤영선 선생님께 혹시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지 물었다. “등록금 업무를 하면서 학생들이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학생들을 지원하는 예산이면 정말 거의 다 지원을 해 줬거든요.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한테 있을 거예요. 학생들은 우리 직원들이 그냥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담당자가 늘 로테이션 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학교는 소중한 곳이에요. 늘 학교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햇빛도 좀 봤으면 좋겠네요.”
한겻이 지나도록 학교를 종횡무진 움직이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도대체 이 기획은 누가 한 거냐고 투덜거리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인터뷰를 마무리 짓고 가방에 짐을 챙기면서 윤영선 선생님에게 “선생님께 한예종은 뭐예요?” 물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돌아온 대답에 마음이 울컥했다. “우리 집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