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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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UNBOXING PROJECT: TODAY》

‘언박싱’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상자를 열어 본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말하는 언박싱은 단순히 상자를 개봉한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단어가 아니다. 무언가를 구매하고 네모난 상자를 뜯는 그 순간의 설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보았을 것이다. ‘언박싱’은 이처럼 상자 속 물건과 마주하기 전부터 존재하는 기대감까지를 포괄한다.

뉴스프링프로젝트의 《UNBOXING PROJECT》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우선 45.5×37.9cm 크기의 캔버스와 그에 맞는 사이즈의 포장 상자를 제작하여 작가들에게 전달한다. 작가들은 상자를 열고 캔버스를 꺼내 작품을 완성한 후 상자에 넣어서 다시 전시장에 보낸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작품은 ‘언박싱’된다. 상자는 빈 캔버스라는 역과 완성된 작품이라는 역 사이를 이동하는 열차의 역할을 한다. 갈 때는 다 같은 상자, 다 같은 캔버스지만 다시 돌아오는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상자를 언박싱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전시는 ‘언박싱’이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내세워 이 기획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언박싱에 동반되는 미지의 설렘을 상상할 수 있게끔 한다. 한편, 작품을 구매한 사람들은 직접 언박싱의 기회를 얻게 된다. 비록 그때는 어떤 작품이 들어 있을지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UNBOXING PROJECT》의 첫 주제는 ‘오늘’이다. 여기서 ‘오늘’은 시대상의 진단이라기보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일상과 현재이자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가장 응축된 시간”1이다. 요즈음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가 몸을 가눌 수 없는 거대한 폭풍우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이들은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부스럭대는 개인들의 사적이고 미시적인 시간을 들여다보고자 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24명의 작가가 참여하였고, 24개의 오늘이 만들어져 관객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비행사는 양을 그려 달라고 조르는 어린 왕자에게 상자를 그려 주고 네가 원하는 양은 여기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어린 왕자가 생각한 상자 속 양의 모습과 독자가 생각한 상자 속 양의 모습은 얼마나 같을까? 전시의 관객인 당신이 ‘오늘’이라는 주제를 듣고 생각한 작품의 모습과 상자에서 언박싱되어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의 모습은 얼마나 괴리가 있을까? ‘오늘’은 다른 평범하고 시시한 날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오늘일 수도 있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루틴의 오늘일 수도 있다. 전시의 주제를 보고 과연 작품으로 남기고 싶은 오늘은 어떤 날일지, 사람들의 오늘은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를지가 궁금했다. 전시장에는 캔버스와 상자가 함께 전시된다. 《UNBOXING PROJECT》에서는 상자 또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상자에는 작가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상자를 본연의 모습 그대로 둔 작가도 있었으며 상자를 작품 일부로 표현한 작가도 있었다. 또한 작품의 제목과 설명은 벽에 붙어 있지 않았지만, 이는 작가의 재량인 듯 몇몇 작품은 별도의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 옆에 손글씨로 쓴 글을 액자에 넣어 걸어 둔 작가도 있었다. 작업 설치 계획을 프린트한 종이를 상자 위에 올려 두어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작가도 있었고, 작품 구상안을 작품 옆에 붙여 둔 작가도 있었다.작품과 작가에 대한 설명은 별도의 카탈로그에 담겨 전시장 입구에 놓여 있었는데, 마침 내가 전시장에 갔을 땐 한 부만 남아 있었다. 내 뒤에 들어온 관객들은 ‘오늘’이라는 주제와 언박싱된 ‘상자’ 그리고 전시된 ‘작품’ 사이의 선을 직접 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설명서도 이 전시장의 완벽한 가이드는 아니었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이 작품이 왜 ‘오늘’이라는 주제 아래 그려진 것인지 그 연관성을 한참 상상해야만 했다.

©뉴스프링프로젝트 (사진 이의록)
엄유정 <Winter Tree> ©뉴스프링프로젝트 (사진 이의록)
김수연 <Two Raindrops Set>

그것은 어린 왕자가 상자 속의 양을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일이었다. 작품은 상자에서 꺼내진 채로 벽에 걸려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이라는 관념적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공연히 고정된 주제와 작품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자 애를 쓰게 되었고 내가 상상한 것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맞는지 카탈로그를 보며 체크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전시를 살펴보는 관객을 마주쳤을 때였다.
전시를 관람하는 바람직한 자세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꼼꼼한 사전 조사로 어떤 성향의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그렸는지 알아보고 가는 관객과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전시를 마주하며 작품의 이면을 상상하고 느끼는 관객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UNBOXING PROJECT》의 작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맞닥뜨리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린 왕자>에서 비행사가 양 대신 그려 준 (양이 들어 있는) 상자를 보며 상자 안에 어떤 양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은 동화 속 어린 왕자만이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 역시 상자 속 양에 대해 함께 상상하게 되는데, 이 전시를 보는 사람 또한 그랬다면 좋을 것이다.
한편 몇몇 작품은 캔버스와 상자라는 네모난 세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정해진 사이즈의 캔버스가 주어졌을 때 작품을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해진 사이즈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해진 사이즈를 벗어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앞서 전시 감상법에 우열은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작품 제작법에도 절대적 우열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차이를 알아차리는 재미는 분명히 있다. 특히 이 전시는 작품을 포장했던, 그리고 포장할 상자까지 전시 요소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김수연 작가의 <Two Raindrops Set>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빗방울을 기록한 작품이다. 2차원 캔버스엔 2차원적으로 그린 그림을, 상자 위에는 3차원적으로 입체화한 조형물을 통해 빗방울의 궤도를 표현했다. “어제와 오늘, 내일의 날씨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을지라도 모든 날의 날씨에는 미세한 변화가 있다”라는 설명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 속의 작은 변주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셔도 어제는 아메리카노, 오늘은 카푸치노를 마시면 그것이 소소한 변화인 것처럼 날씨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안규철 작가의 작품 <노을 속에서 1>은 역사적 시간과 개인적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느 하루의 해가 저무는 색채를 캔버스에 옮겨 놓은 것인데, 작가는 한 문단 분량의 글을 액자에 담아 작품 옆에 걸어 두었다. “저 노을빛은 몇 시간 뒤에는 우크라이나의 처참한 전쟁터에도 가서 닿을 것이다. (...)” 전시는 기획 의도에서 밝힌 대로 사람들의 ‘오늘’, 미시적인 시간을 들여다보고자 했지만 이 작품은 결국 이 시간 또한 시대적 상황과 완벽히 분리될 수 없음을 일깨운다. 누군가의 하루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만큼 여유롭지만, 누군가의 하루는 노을을 의식할 수도 없는 상황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좌표에 각자 존재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비단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우리의 오늘은 전혀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

이은새 <녹색의 유리들: 미니볼>
안규철 <노을 속에서 1>

이은새 작가의 <녹색의 유리들: 미니볼>은 네모난 캔버스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작품이다. 작가는 캔버스에 유리잔을 그려 놓고 상자 위에는 글라스를 올려 두어 빛이 반사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마치 수면과도 같은 흔적이 벽에 비추어 있었다. 작품을 구성하는 물체들은 평면적이었지만 작품은 전혀 평면적이지 않았다. 한편 이 작품은 ‘오늘’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관객에게 상상의 여유를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엄유정 작가의 <Winter Tree>는 주제에 충실한 작품인 것처럼 보였다. 전시 프린트에 “작가는 오후 시간 한강을 산책하며 마주한 겨울 나무의 색과 빛, 형상, 구조를 12월 5일부터 1월 18일까지의 긴 시간동안 세밀하게 관찰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확실히 이러한 작품은 작가의 제작 의도를 알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풍경에 주목해, 한 달 동안 관찰하여 작품에 담아내는 여정을 알고 동반하는 감상 또한 작품을 채우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전시장 바로 뒤편에는 노란색과 밝은 파란색의 국기가 꽂혀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있었다. 전시장 안에서 본 작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늘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전시 마지막 날 갤러리 오픈 시간에 맞춰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러나 11시 오픈이라던 갤러리는 11시 10분이 되어도 열리지 않았다. 뒤이어 예정된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마음이 조급했다. 블록을 빙 돌아 갤러리 1층에 있는 소품 샵에 들러 오늘 갤러리 오픈은 언제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소품 샵을 지키고 있던 주황색 옷의 남자는 잠시 당황하더니 갤러리 담당자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고, 미안하니까 대신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따듯한 커피? 차가운 커피? 더운 날씨에 차가운 커피를 달라고 했다.
커피를 기다리며 앉아 있으려니 조금 황당한 마음과 더불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 내린 드립 커피는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려 나왔다. 커피 원두는 에티오피아산 무슨 원두인데 차갑게 식으면 맛이 변하는 특징이 있고, 같이 나온 조그만 견과류는 마카다미아에 말차 초콜릿을 입힌 것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이어진 일정에 늦게 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에 훨씬 좋아진 기분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나의 오늘 하루를 언박싱했을 때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내가 《UNBOXING PROJECT: TODAY》에 작품을 낼 수 있었다면 ‘오늘’의 이 장면을 담아내었을 것이다.

글 이다은
1 《UNBOXING PROJECT: TODAY》 전시 설명 프린트. 이 글의 인용은 모두 전시 설명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