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2022

STORY

“가장 새로운 건, 가장 현재의 것이다.(The New, The Now)”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모더니티의 강령이다. 이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테제인데, 중세에서 벗어나 과거와의 고리를 끊고 지금 눈에 보이는 현재를 강조하게 된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모더니티의 다섯얼굴 의 저자 M.칼리니스쿠 역시 현재의 사람들을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난쟁이’이며1, 따라서 과거라는 거인의 어깨를 딛고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이들로 설명한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나아가 이 시대에 대한 인식은 예술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이 되어 왔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듯하다.
‘벡터(Vector)’는 물체에 힘을 가할 때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세게 미는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값이다. 본 글에서 소개할 글릿(Glit), 레몬 사운드(Lemon sound), 그리고 전시 《Binary Garden》은 각자만의 벡터값을 지닌 채 예술이라는 좌표계에 새로운 점을 찍으며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을 파생시키는 손을 현재로 상정했을 때, 현재는 그들을 어느 방향으로, 또 얼마만큼의 세기로 밀어내고 있을까?

지금의 방법: 글릿(Glit)
‘음악을 글로 잇다’는 뜻의 글릿은 음악을 ‘읽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콘텐츠 플랫폼이다. 이들은 유튜브, 텀블벅, 뉴스레터 구독 시스템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가장 주된 활동은 뉴스레터라고 할 수 있는데,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클래식 음악 한 곡과 그에 관련한 이야기를 구독자의 메일로 보내는 구독 서비스이다. 이러한 뉴스레터를 통해 그들은 백인 귀족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던 기존 클래식 음악계의 문제에서 벗어나 여성과 유색인종을 조명하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딱딱한 문체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듯 편안히 소개하는 방식에 감각적으로 이를 체험할 수 있는 음악의 선곡까지 더하며 클래식에 대한 문턱을 낮춰 주고 있다. 뉴스레터 이외의 활동 중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유튜브 콘텐츠로,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콘텐츠는 클래식 플레이리스트와 WW(What’s on this women’s desk)이다. 플레이리스트는 오늘날 유튜브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콘텐츠 형식으로 특정 주제를 설정하고 (예: 초록이 그리운 겨울을 위한2) 그 주제에 맞는 음악을 큐레이션하는 형식이다. 플레이리스트는 음악의 장르보다는 그 음악이 포함된 주제에 따라 사람들에게 선택되는 경우가 많기에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플레이리스트의 방식은 이들의 목표대로 클래식을 사람과 ‘잇는’ 데 유용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WW(What’s on this women’s desk)는 음악하기의 과정에 있는 여성의 책상을 들여다봄으로써 이들이 중심에 두고자 했던 주제 중 하나인 ‘여성’을 조명한다. 음악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을 조명하기 위해 그들의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질문과 답으로만 구성되는 인터뷰보다 그들의 음악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글릿 뉴스레터 2022.4.15 / 글릿 유튜브 채널 화면

지금의 협업: 레몬사운드
레몬사운드는 영화, 광고, 전시, 웹툰, 공연 등에 필요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주문받아 작곡하는 그룹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출신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작곡 스타트업’ 혹은 ‘작곡 엔터테인먼트’라는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이들은 작곡을 ‘의뢰’받아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필요한 음악을 만든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사업이 출발하게 된 계기인데, 협업이 부족한 학교 생활에 대한 문제 해결의 한 방식으로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3 한예종은 최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며 예술가들을 길러 내고 있지만, 이들이 협업할 만한 적당한 계기는 아쉽게도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문제를 이들은 창업을 통해 실천적으로 해결해 내었다.
이들의 의뢰는 주로 홈페이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홈페이지에서는 작업해 왔던 포트폴리오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 앰비언스 / 몽환적인 / 이국적인 / 재즈 / 자연 / 클래식 등 그들이 작업하는 곡의 스타일들을 맛보기식으로 들어 볼 수도 있다. 소속된 아티스트 역시 작곡가, 작사가, 연주가, 성우, 음향디자이너 등4 다양하여 작곡뿐만 아니라 음악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모든 다채로운 협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의 주제: 전시 《Binary Garden》
2022학년도 1학기 미술원 복도갤러리에서 개최된 두 번째 전시인 《Binary Garden》(5.9~5.16)은 김지우, 이찬열, 임영택으로 이루어진 팀 √(루트)의 전시로, 디지털 이미지, 암호화폐, 인터넷 등 가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들의 실제성을 이야기하는 전시이다. 데이터베이스는 충격과 진동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안정된 땅을 필요로 하고, 지진이 해저 케이블을 끊으면 고속 인터넷이 마비되며, 암호화폐 채굴에 의해 발생되는 열을 효율적으로 식히기 위해서 극지대에 채굴장이 세워지는 등 가상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들은 실은 모두 현실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5 이러한 주제성을 전달하기 위해 전시장에는 흙, 식용식물과 3D렌더링 모델, 인터넷 유통망 등이 함께 병치되어 이들 모두가 사실은 실제적인 현실에 발 붙어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5월 9일에 있었던 전시 오프닝에서는 갤러리에 설치한 정원에서 허브를 직접 채집하여 요리하고 그 요리를 참여자들과 나누는 퍼포먼스가 진행되기도 했다.
NFT, 뉴미디어 아트 나아가 가상화폐, 디지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담론 중 대다수는 가상의 것들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직접 신체로 감각해 낸 것이 아닌 전산 속에서 관계하는 것, 전시 서문의 말을 빌리자면 ‘지구의 중력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만연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가상을 가상 자체로만 파고들며 생각하거나 10실제와의 이항대립적 관계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역시도 곧 실제라는 관점에서 실제의 가장 원초적 형식인 흙과 식물을 모태로 생각해 보는 방식은 가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상과 실제의 대립적 성질까지 무화시킨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레몬사운드 의뢰 홈페이지 화면

새롭다는 건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 ‘새로움’은 ‘지금까지 있은 적 없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지금’이다. 새로움은 지금을 기준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 ‘지금’이라는 것은 고정된 시점이 아니며 역동하는 시간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파생되는 것이며, 순식간에 피어나고 곧바로 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재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실체 그 자체로 고유의 무게가 있다. 탄생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그 탄생의 흔적은 무엇보다 강렬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현재의 손들이 예술에 힘을 가하고 그 방향을 바꾸면 그 움직임의 족적은 선명히 남는다. 그때그때마다 모래밭 위에 선연히 남은 바퀴 자국. 이리저리 움직인 궤도. 그곳에서 예술의 새로움은 피어난다. 가장 현재의 것에서.

글 오지은
《Binary Garden》
1 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얼굴』,이영욱 역, 시각과 언어, 1993, p.25
2 글릿의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
3 해당 내용이 포함된 대표 박신정의 인터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opk6OOkVqY&t=5s
4 2022년 5월 12일 기준, 아티스트 카테고리에 성우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소속된 성우가 있는 상태는 아니다.
5 전시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