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내 일이에요.”
한예종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구성원은 학생과 교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마음껏 창작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는 사람이 있다. 자신은 정치인도 예술인도 아닌 공무원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한예종의 예산과 행정 등 사무국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문화예술행정가 박영국 사무국장을 만났다.
법학을 공부하시고, 다른 사법기관이 아닌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멋진 포장 없이 얘기하자면, 법대 다니면 고시 보는 게 당연했고 저는 그중 공무원이 되는 행정고시를 봤던 거죠. 제가 선택할 여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그렇게 처음은 굉장히 관료적인 업무로 시작했죠. 그런데 이게 적성에 안 맞는다고 느끼면서 문화 쪽으로 흘러오게 되었어요. 우리나라를 외국에 알리는 해외 홍보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생각해 보면 원래 어려서부터 역사, 문화, 외국어 이런 걸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결국 어렸을 때 가졌던 어떤 관심과 흥미가 저를 이쪽으로 이끈 게 아닌가 싶은데요. 해외 홍보도 역사, 문화가 다 결부된 일이잖아요. 그렇게 문체부에서 일하게 됐고 15년 정도 흐른 것 같아요.
문체부에서 오랜 기간 정책을 다루면서 어떤 고민을 갖고 계셨는지, 어떤 마음으로 임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문체부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곳이에요. 문화예술도 있고, 체육도 있고, 관광도 있고, 국정 홍보도 있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정책 고객이 연극 하시는 분, 영화 하시는 분, 시각예술 하시는 분 등 굉장히 다양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의 니즈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정책을 하는 게 아니라 이분들한테 필요한 정책이 뭔지를 찾아내서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와 법률, 정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죠. 그런데 이렇게 찾아낸 정책들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들이 생길 수도 있어요. 분야 간에 상충할 수도 있고, 좀 더 상위의 국가 정책하고 상충할 수도 있는데 그걸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화예술’은 교육, 환경, 산업 등 어떤 분야와도 연결 지을 수 있는 지점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무국장님은 ‘문화예술’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건 문화예술은 그 자체로도 굉장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동시에 다른 분야의 가치를 더 키워 주거나 보완해 줄 수 있는 역할도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문화예술이 가치 있다고 인정을 받을 때 그 주변의 다른 것들도 함께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줄 수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문화예술은 그 자체로도 본질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만 다른 분야들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이 있는 거죠. 이걸 정책적 언어로 풀어낸다면 부가 가치를 붙여 줄 수 있는,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는 분야라고도 할 수 있어요.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문화예술 분야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특징들이 문화예술 분야의 정책을 구상하실 때 반영되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문화예술’이라 하면 창작과 향유 자체에 의미를 두는 순수 분야만 생각하는데, 저는 그것뿐만 아니라 문화산업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문화산업이란 부가 가치를 창출해서 국가나 국민의 삶의 질 제고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문화예술 정책을 구상하고 구체화할 때는 ‘손에 잡히는 문화’, ‘눈에 보이는 문화’를 항상 생각했어요. 소수 창작자만이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이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맥락에서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문화 소비를 증대시킬 수 있는 정책이었는데요. 소비 증대를 위해선 결국 일반 국민들에게 그만큼 접근성이 좋은 문화예술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거든요. 시장이 넓어져야 그걸 창작하고 공급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일터가 넓어지는 것이고, 문화예술인의 창작 활동 기반이 확장되는 거죠. 이런 활성화가 이루어지도록 ‘손에 잡히는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문체부와 한예종이라는 기관과 그 구성원들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보시나요?
한예종은 문체부에서 만든 학교기 때문에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학교는 갈라파고스 같은 섬이 아니에요.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또 상호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 안에서 교수님들은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우죠. 한예종도 당연히 정책 환경이나 사회문화 환경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게 문체부와 한예종이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학교는 거꾸로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역할도 한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출되고 교수님들이 창작과 연구를 하면서 새로운 문화 정책 환경이나 사회 환경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두 기관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상·하 개념도 아닌 어떤 선순환의 고리 속에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한예종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그리고 한예종에 봉직했던 교수님들이 정부의 주요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하시는 경우도 있고요. 모두 선순환의 고리 속에 있는 존재들이고 저 역시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기관인 문체부와 교육기관인 한예종에서의 업무는 여러모로 다른 점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어떤 부분이 다르다고 느껴졌는지, 혹은 그런데도 유사하다고 생각된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정책을 만들어 내는 정책 부서 공무원과 학교의 실제 살림을 하는 공무원하고는 당연히 다릅니다. 그런데 자리와 역할이 다를 뿐 문제의식은 항상 똑같아요. 말했듯이 문화예술 생태계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일하는 존재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커다란 문화예술 생태계 안에 문체부도 한예종도 있고 상호작용하며 일하는 곳이죠. 이 생태계 안에서 일하는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문체부에서 정책을 구성하는 일을 하다가 학교에 와서 그걸 실제로 현장에 적용하는 일을 해 보는 거고. 또 현장에 적용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서 나중에 다시 정책 부서에 가서는 그걸 새롭게 반영하는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예요.
한예종에서 사무국장 업무를 수행하시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업무의 방향성이나 우선순위 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최우선순위는 역시 교육이죠. 이곳은 교육과 연구와 창작을 하는 교육기관이니까요. 그런데 제가 그걸 직접 하지는 않아요. 저는 그런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에 대한 양질의 교육, 최선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또 교수님들이 연구와 창작을 하는 데에 뒷바라지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예종에서 사무국장으로 두 번째 근무를 하고 계십니다. 과거와 현재의 한예종에서 가장 크게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꼽아본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변하지 않은 건 학교 건물이에요. 외적인 모습이라고 봐야죠. 변한 것 중 하나는 외부의 평가입니다. 옛날에는 한예종에 근무한다고 하면 어디 있는 거냐고 묻거나 다른 학교랑 헷갈려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한예종이라고 했을 때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만큼 우리 학교가 예전에 비해 사람들의 인식 속에 확실히 자리 잡았습니다. 또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학교 구성원들의 주인의식이 예전에 비해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올해 한예종이 30주년을 맞습니다. 학교 구성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한예종은 행정학적인 용어로 아주 성공적인 인스티튜션 빌딩 (Institution Building) 사례라고 생각해요. 번역하면 ‘제도 형성’ 또는 ‘기관 형성’인데, 우리 문화예술계나 교육 시스템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라고 봐요. 이 학교를 처음 만들 때 계셨던 이어령 초대 장관이나 이강숙 초대 총장 같은 선각자들이 없었다면 초기 정착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분들이 계셨잖아요. 그래서 여러 훌륭한 선생님들도 모시게 됐고 아주 재능 있는 학생들도 모으게 됐고요. 지금은 자타가 자부할 수 있는 한국 최고의 예술교육 기관이자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기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교육 방식도 한예종만의 고유한 교육 방식이 정착되고 있고요. 이런 것들을 아울러서 인스티튜션 빌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거든요.
저는 30주년을 맞아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때라고 생각해요. 30년이라는 기간이 그렇게 짧은 기간이 아니거든요. 물론 외부의 평가가 그동안 많이 형성됐지만 이제 그런 것들을 모아 제대로 이륙시켜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은 거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학교의 훌륭한 점들이 외부에 많이 소개되기는 했어요. 근데 그것들이 잘 엮어진 상태로 국민들이나 세계에 소개가 됐냐 하면 이 부분은 물음표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6개원 27개 학과가 있는데 여기서 만들어 냈던 성과들을 한데 모아 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30주년이 이제 그 작업을 해 나갈 계기라고 보거든요. 30주년이 되면서 우리 한예종의 여러 장점을 다 모아서 아주 멋진 보배를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 구성원들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국립대학으로서, 선도적 역할의 예술기관으로서 주위를 돌아보고 구성원 간의, 구성원과 외부 간의 소통 역시 더 활발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