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고요함을 벗 삼아 공들여 천천히 먹을 갈아 냈다. 깨끗한 물에 여러 번 흔들어 충분히 적셔 낸 붓을 굴려 먹을 먹였다. 꽃잎은 천천히, 꽃술과 잎맥은 빠르게. 화선지에 농담을 살려 낮에 본 작약을 그렸다. 찰나의 순간, 붓의 각도를 맞추지 못해 기대한 화형을 그려 내진 못했지만, 원하던 방향성은 나왔다. 밤이 깊도록 멈추지 않고 먹으로 꽃을 피워 냈다. 사람에 감화되는 날이면 꼭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 탓이다. 자기만의 속도로 담담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나누어 준 이진희 교수님을 만난 날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몹시도 즐거워 쉬이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닿은,
부산에서 예고를 나왔는데 한예종의 존재를 몰랐어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저한테 잘 맞을 것 같다고 입시 요강 스크랩북을 줘서 봤는데 굉장히 새로웠어요. 제가 생각했던 대학이랑 좀 달랐거든요. 교수진도 젊었고 대안학교 같기도 하고, 제 DNA랑 잘 맞는 학교일 것 같아서 너무 가고 싶었는데 미술 관련은 연극원 무대미술과밖에 없더라고요. 97년에 미술원이 개원했는데 당시 저는 전년도 입시 요강을 봤거든요. 예기치 않게 무대미술과에 가게 됐어요.
매일 잔디밭에 누워,
무대미술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보니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나름대로 예고에서는 꽤 한다는 사람이었는데 연극원에 와 보니 꼭 둔재가 된 느낌이었어요. 저는 아무래도 시각적인 언어를 배우고 온 사람이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연출과나 극작과 학생들에 비해서 잘하지 못한다는 인식 때문에 스스로 좀 위축되고 그랬어요. 그걸 극복해야겠다 생각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커리큘럼이 타이트해서 따라가기 바빴어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잔디밭에 누워 울면서 하늘 바라보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늘 그 상태였어요. 그러다 인형극 수업을 들을 때 물성적이고 시각적인 언어는 제가 훨씬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더라고요.
디자인의 완성은,
공연을 통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연출이 사용하는 언어나 은유, 배우가 쓰는 몸의 은유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그걸 활용해 공연화하면서 조그마한 성공의 기억을 계속 쌓아 갔어요. 디자인을 한다는 건 관념이거든요. 저는 디자인을 하거나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무조건 실행에 옮겼거든요. 제가 아마 무대미술과 학생 중에 공연을 제일 많이 했을걸요? 지금도 학생들에게 공연 참여를 많이 권유해요.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이 실천하고 공연화하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아직 제가 (교수로서) 학교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가 아니라 경계에 서서 관찰자 입장으로 학생들을 살폈을 때 코로나 영향도 있을 거고 커리큘럼 영향도 있는 듯한데, 학과 내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긴 해요.
우연히 의상을,
인형 수업을 듣고 인형에 매료되어서 프랑스 샤를르빌 인형극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가 났어요. 119에 실려서 본가인 부산으로 내려가 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았어요. 병실에 누워 있는데 예고 친구들이랑 선생님들이 야한 소설을 읽어야 시간이 빨리 간다며 야한 책을 많이 가지고 왔어요. 진짜 시간은 빨리 가더라고요. 그중 로즈 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패션디자이너예요. 작업 과정이나 패션에 대한 열정 같은 게 굉장히 인상적인 거예요. 나중에 인형 제작에 도움이 되니까 옷을 배워 볼까 싶어서, 입원 중에 병원복에 겉옷만 걸치고 패션 학원에 다녔어요. 학원이 3층인가 4층이었는데 목발 짚고 계단 올라가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도 배우고 싶고 호기심이 강하니까 열심히 계단을 올라가며 3개월 정도 배웠어요. 이론보다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신문에서 신입 미싱사 모집 공고를 봤어요. 공장에 취직해서 열심히 하니까 정말 예뻐라 해 주고 많이 가르쳐 주더라고요. 3개월째에 사장님이 집에 데려다주시면서 자기 남동생인 재단사 노총각이랑 결혼하면 디자이너로 키워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털어놨어요. 사실은 제가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일을 너무 배우고 싶어서 위장취업을 했다고요. 그날로 일을 관뒀어요. 제 어렸을 적 별명이 빨간 머리 앤, 럭비공이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요. 호기심이 생기면 몸을 같이 움직여서 꼭 실행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진지하게 의상을,
1학년 때는 방황도 하고 그러다가 2학년 때 체코 여행을 갔어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의 옷을 보는데 그 옷에서 처절한 시공간이 다 보이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옷이 참 무섭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4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유품 정리를 제가 했어요. 다 태우는데 어머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입었던 원피스가 있더라고요. 그 옷을 보는 순간 엄마의 삶이 보이면서 옷에 시공간을 넘어 한 사람의 삶을 담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 옷을 중심에 놓는 무대미술가로서 작업을 하고 있네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도 있고, 대종상을 받았던 영화 <안시성>도 있지만 사실 제 내면을 채워 준 작업은 연극이에요. 인형극 수업을 같이 들었던 친구들이랑 ‘극단 뛰다’를 창단하고, 광대 양식 연구를 계속했어요. <노래하듯이 햄릿>,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 <킹 리어> 이런 작품들이 광대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시각적 혹은 연출적으로 저마다 자기 파트에서 광대 양식을 찾아 나간 작업이었는데, 그걸 10년 넘게 하다 보니 광대 의상 양식은 어떤 경지에 올라선 것 같아요. 가장 애착 있는 작업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극단 뛰다에서 했던 공연들이에요. 제일 기억에 남고 만족감도 크고 재밌었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는,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게 있는지 살펴봐요. 기존에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작업인지 고려해요. 긴장감이 주는 에너지가 크다고 생각해요. 내가 해 보지 않았던 것을 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긴장감과 약간의 두려움이 가슴 뛰게 하거든요. 심장이 뛰어야 해요. 대본이 재밌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는가?’ 그게 제일 중요해요.
작업에 임할 때는,
요즘 내 관심사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요즘은 조선 초기 민화, 그 색채가 주는 야성성에 관심이 가요. 박찬욱 감독님이랑 최근에 했던 <일장춘몽>의 춤 신에서도 제 관심사를 고스란히 남겼고, 오셀로를 재해석한 <크라운 쇼>에서도 인물들의 광기를 조선 초기 민화 색채감으로 다 풀어냈어요. 어떤 작업을 하든 요즘 내가 제일 재미있어하는 것이 뭘까, 이게 제일 중요해요. 제 관심사를 작업에 어떻게든 맞춰요. 제가 즐거워야지 그 프로덕션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거든요. 미묘한 줄다리기지만 연출을 설득해 가면서 제가 원하고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맞춰서 제 관심사를 작업에 녹여 내는 편이에요.
작업의 분기점은,
<구르미 그린 달빛>을 할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색채 언어에 관심이 많은데, 트렌드적인 색채부터 심리를 건드릴 수 있는 색채까지 그 작업에 녹여 냈었거든요. 그런 걸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드라마 시청자들이 의미를 찾아내고 커뮤니티에서 자기들끼리 토론하더라고요. 꽤 정답에 가까웠어요. <성균관 스캔들> 할 때만 해도 저 스스로 뒷광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옷에 열광하고 의미를 알아주는 걸 보면서 시대가 변했다고,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시대, 소통하며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 외부적인 요인이 새로웠고 다르게 이야기하면 가슴 벅찬 순간이었어요.
학교에서 우리 같이,
초창기에 다른 학교 강의를 하러 갔었는데 학교가 나의 성장을 멈추게 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서 교육자의 길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한예종에 강의를 나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아이들과 만났는데 학생들과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학생들이 훨씬 더 열려 있고 깨어 있다 보니까 그런 부분들이 저한테 자극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제가 선배로서 앞서 경험한 것들을 나누어 주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으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요즘은 강의하면서 새로운 저의 재능을 발견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같이 성장하고 있어요. 예술이 학문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항상 있었듯이 예술은 이론만으로 정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해요. 저 역시 끊임없이 연구하고, 제 작업을 진행하고 그걸 또 수업에 반영해요. 힘들지만 작업과 교육을 병행하면서 계속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요.
좋은 무대미술가가 되려면,
무대미술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극 미술이에요. 무대미술의 기본 개념이 공간과 시간을 표현하는 장소 예술이듯 무대의상도 옷으로 등장인물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담아내는 예술이고 무대미술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죠. 저는 옷으로 무대미술을 구현하는 사람이니 옷으로 간략하게 설명해 볼게요. 무대의상은 인물의 시간성과 관계성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인물이 존재하는 공간의 지형학적, 환경적인 특징도 잘 알아야 하죠. 예를 들어 2001년 예술사 졸업 공연에서 제가 의상 디자인을 했었던 <갈매기>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이 작품은 러시아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희곡으로, 등장인물들의 어긋난 관계, 의사소통의 부재, 고립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 작품을 연구하고 준비하면서 러시아의 지형학적 사회학적 배경을 조사했어요. 러시아는 겨울은 길고 여름이 짧죠. 긴 겨울 동안 고립된 시간이 많다 보니 지식인과 예술가가 많아요.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 춥고 긴 겨울 등 이런 환경을 지닌 러시아의 의복은 더운 나라와는 다르게 매우 폐쇄적이고요. 그래서 의상의 카라(옷깃)를 높여 양식화했고, 그걸 통해 소통의 부재와 고립된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었어요. 텍스트 층위에 분포되어 있는 연극적 기호와 상징을 높은 카라를 통해 임팩트 있게 구현한 거죠.
이렇게 무대미술이 극의 재현과 장식에 머무르지 않고 시각적 기호가 되고 양식화할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기반, 사회적 이해, 지적 자산이 풍부해야 해요. 미학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실체적으로 풀어낼 힘도 있어야 하고요. 그래서 인문학적인 소양, 예술역량, 풍부한 인적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비 무대미술가에게,
저는 누구보다 학교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에요. 순수 미술을 했다면 이렇게 다양한 매체에서 작업을 확장하거나 이런 성장을 이뤄 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무대미술과에 들어와 극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미술을 공부했기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고 삶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어떤 힘이 생겼다고 생각하거든요. 커리큘럼이나 시스템도 훌륭하지만 치열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이 우리 학교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의 언어, 은유가 충돌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어요. 치열함과 열정이 있는 학생들이 많이 지원해 주면 좋겠고, 재학생들도 졸업하고 자기 작업을 할 때 지금 품고 있는 치열함과 열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다음에 나는,
열정은 호기심과 관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깨어 있고 열정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후배들, 제자들에게도 동시대의 동료 예술가로 남고 싶어요. 아무래도 밖에서 소통하던 방식과 학교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아직은 그 방법을 찾고 있어요. 결국은 제자들도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인생이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축복일지 모른다. 우연이 길 위로 이끌었을지라도 길에 선 사람이 진심으로 발을 딛으면 그 길은 마침내 운명이 된다. 입시를 치르던 시기에 미술원이 개원되지 않았던 전년도 입시 요강을 본 것, 그리하여 미술원이 아닌 연극원 무대미술과에 진학한 것, 재학 중 떠난 체코 여행에서 시간과 사건이 묻은 군복을 본 것, 유학을 떠나기 직전 큰 교통사고가 난 것…. 이 모든 우연이 마침내 옷으로 삶을 그려 내는 예술가 이진희를 만들어 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덕분에 각종 공연, 영화, 드라마에서 이토록 멋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히 단언해 본다. 이 우연이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