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2022

STORY

벡터라는 주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문과생인 저에게 벡터는 하나의 비유,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방향성을 가진 힘. 이런 정도. 자칫, 제가 잘 모르는 추상적인 이야기에 빠질 것 같기도 합니다. 뭔가를 진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주제인데, 저는 그럴 능력도 시야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좀 소박하게 제가 좋아하는 작품 이야기를 하나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입니다. 아피찻퐁은 제가 따로 소개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예술가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의 시네마에 깊은 감흥을 얻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 2010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엉클 분미>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분미(Boonmee)는 태국의 한 노쇠한 남성입니다. 그는 라오스에서 온 노동자들을 고용해 제법 근사한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복부에 플라스틱 호스를 꽂고 투석을 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처제 젠(Jen)과 조카 통(Tong)을 초대해서 어두운 야외에 차려진 식탁에서 함께 늦은 저녁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때 환영처럼 어슴푸레한 무언가가 식탁의 빈 의자 위에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분미의 죽은 아내 후에이(Huay)였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귀신과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분미의 병과 일상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번쩍거리며 온몸이 털로 뒤덮인 원숭이 형상의 또 다른 귀신이 걸어와 식탁에 앉습니다. 그는 분미의 실종된 아들 분송(Boonsong)이었습니다. 사람이었을 때, 그는 사진에 취미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정글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해 보니 거기 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가 찍혀 있었고, 거기에 강박적 관심을 느낀 그가 그 정체를 밝히러 정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원숭이-귀신들을 만나 그들과 결혼하여 그 자신도 원숭이-귀신이 된 것입니다.

죽어 가는 남자, 살아 있는 그의 처제와 조카, 죽은 아내의 귀신, 동물-귀신이 된 실종된 아들, 이들이 밥을 먹습니다. 아피찻퐁이 꾸려놓은 이 만찬의 식탁은 여러 차원의 현실들이 모순 없이 하나로 통합된 일종의 ‘내재성의 평면’(들뢰즈) 같은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만, 실제로 우리가 영화를 볼 때는 놀라고, 경탄하고, 약간은 마비된 상태가 됩니다.
강력한 미학적 효과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영화적 현실이 창조되었음을 직감하고, 어떻게 이런 상상이 가능한지 의아해하며, 그 의미를 알고자 사고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내재성의 식탁을 그려 내는 순간, 아피찻퐁 시네마에는 차이밍량이나 홍상수에게서 잘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장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외부로 가는 구멍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정글입니다. 아피찻퐁에게는 정글이 있습니다. 정글에서는 동물/인간, 죽음/삶, 과거/현재, 상상/현실이 다 뒤섞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모두가 평등해집니다. 인간-너머의 세계가 열립니다. 영혼의 세계랄까요?

아피찻퐁이 정글을 처음 발견하는 것은 2002년의 <친애하는 당신>에서입니다. 그리고 <열대병>의 후반부에서 정글의 활용은 최대치에 달하고 <엉클 분미>에 이르면 이 정글의 실체가 더 선명히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정글은 영화적 무대인 동시에 역사적 현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피찻퐁은 방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태국 북동부 이산(Isan) 지방으로 이주를 하여, 거기서 유년기를 보내고 대학까지 마칩니다. 이산 지역은 이질적 언어와 인종으로 차별을 받았고, 20세기 내내 빈곤 지역으로 남습니다. 더구나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숨어 들어간 은신처이기도 했고, 이 이유로 주민들이 정부군에 학살되거나 고문을 받은 고통의 현장입니다. 영화에서 분미는 자신이 신장병에 걸린 것을 인과응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젊었을 때, 공산군 토벌대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던 것입니다. 귀신이 나오는 정글이란 상상의 산물도 허구도 아닌 실재와 창조가 얽힌 장소인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위대한 성취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한 사람의 뛰어난 상상력이나 재능의 결과라기보다는 그가 만들어 놓은 예술적 공간 속으로 살아 돌아와 말하는 수많은 귀신들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귀신이 됩니다. 즉, 소멸하지 않는 기억 속의 생령적(生靈的) 행위자가 됩니다. 아피찻퐁 영화의 힘은 이들과의 연맹에 있습니다. 이런 연맹이 벡터일까요?

글 김홍중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