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은 기나긴 입시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다. 설렘은 잠시, 혼란이 뒤이어 찾아온다. 수업은 기본 세 시간, 명확한 답이 없는 문자 그대로의 과제들이 끝없이 주어진다. 학기 동안 ‘늪’이라는 말을 최소 한 번은 입에 올리는 것 같다. “나 지금 늪에 빠졌어. 글이 안 써져(진짜다). 쓰면 쓸수록 쓰레기가 돼(정말 진짜다).” 캠퍼스가 넓지 않으니 길을 헤맬 일은 없어 다행일까?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기로 유명한 석관동 캠퍼스 별관 건물을 주로 이용하는 미술원·전통예술원 학생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1학기의 끝을 바라보며, 우리를 늪에 빠뜨리고 미로에서 헤매게 했던,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으로 그러한 수업들을 취재해 봤다.1
희곡쓰기1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1학년 수업인 이 수업에서는 일주일에 한 편씩 희곡을 쓴다. 써 온 희곡은 수업에서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수업을 소개해 준 모 졸업생의 말에 의하면 일주일이라는 기간이 묘한 것이어서 서랍 속 옛 작품의 먼지를 털어 가져가면 곧장 들킨다고 한다. 짧은 시간 안에 나올 수 있는 완성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시간에 쫓겨 제출에 의의를 두고 써 가면 왜 마무리를 안 했느냐는 지적을 받게 된다고 한다.
‘빡센’ 수업이지만 이렇게 ‘강제로’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은 쓰는 힘을 길러 주었다. 떨어져 가는 글감을 충전하기 위해 지방에서 열리는 콘텐츠 관련 강의까지 들으러 갔던 경험, 매주 찾아오는 마감을 쳐 내기 위해 커피며 단것을 달고 살다가 불면증에 시달리며 체중까지 늘었던 경험, 글 쓸 때면 늘 그렇듯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도 수업이기 때문에 끝까지 해내야만 했던 경험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글 쓰는 습관을 만들어 준 것이다. ‘쓰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지만 일단 쓰면 죽이라도 된다.’ 수업을 진행하는 박상현 선생님의 연구실에서는 이전 연도 수업의 결과물들이 제본으로 물질화되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희곡을 읽을 때 수강생들이 역할을 맡아 낭독을 하므로 서로의 숨겨진 연기력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각자가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지 스타일을 이해하게 되고, 글로 쓰여 있는 것을 눈으로 읽고 입으로 말함으로써 리딩만으로도 서로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고. 낭독 후 이어지는 피드백은 세 번의 턴을 가진다. 좋은 점, 아쉬운 점, 수정할 점을 차례대로 말한다. 한마디라도 꼭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글에서 이 세 가지 특징을 찾음으로써 또 배우고,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쓰는 희곡이 곧 “수업의 수준과 직결되기 때문에” 너무 성급하게 써서 “민폐를 끼친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희곡을 쓰게 만드는” 수업이었다.
영상과 음향
영상원 영화과 1학년 수업인 <영상과 음향>에서는 매주, 혹은 격주로 주제에 맞춰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수업은 세 명의 선생님들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각각 촬영, 연출, 편집에 대한 과제 피드백을 담당한다. 이제 막 입학한 1학년들은 대체로 열정이 넘친다. 뭐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뭐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영상과 음향>은 ‘그 열정에 찬물을 붓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아무리 단편이라고 해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영화를 제작하는 건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수강생들마다 낼 수 있는 시간이 천차만별이라 보통은 학기 초에 일주일 중 하루를 고정 촬영일로 잡고 시작한다고 한다. 과제 제출 기준도 빡빡해서 학교에서 장비를 빌려 촬영하는 경우에는 반납이 정해진 시간까지 완료되어야 과제 제출로 인정된다. 결석 한 번에도 가차 없이 두 단계씩 성적을 깎는다. 스케줄 관리 측면이나 개인의 역량은 향상된 것 같은데, 학기 내내 밖으로 놀러 나간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수강생도 있었다. 거침없는 피드백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두고 운영하는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영화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영화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전혀 그런 경험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저마다 다른 것이다.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며 학생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이 무엇인지, 그 자원을 활용하는 법은 무엇인지 배우고 터득하게 된다. 예로 한 수강생은 가장 기억에 남는 과제로 ‘리덕스’를 꼽았는데, 리덕스란 이전에 촬영과 편집이 완료된 영화를 재편집하는 것으로 재촬영 없이 작품을 이전보다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존과는 다른 작품을 볼 수 있어 새롭고, 한정된 조건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지 고민하는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나고 나니 좋았더라.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다시 하고 싶진 않다!”
매스커뮤니케이션과 사회
영상원 방송영상과 1학년 대상의 수업이다. 이렇게 방대한 범위를 다루는 수업들이 흔히 그렇듯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넘나든다. 일방적 강의가 아니라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수강생 한 명 한 명의 의견을 끌어내어 주고받는 형태의 수업이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누리2를 자주 이용한다면 한 번쯤 보았을 ‘탱자 선생’이 바로 이 수업을 맡아 온 전규찬 교수다.
수업의 난해함은 주고받는 형태의 수업이라는 특징에서 온다. 선생님이 혼자 강의를 하는 것 같다가도 학생들을 지목해 “○○, 이건 무슨 뜻 같애?” 하고 묻는데, 아무 생각도 안 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럴듯한 대답을 하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주어지는 과제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주제는 있지만 형식은 자유다. 주제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고 그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형식을 조원들과의 협의를 통해 선택해야 한다.
이런 독특한 형식으로 인해 수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관점을 배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과제를 수행하며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물론 ‘갈래’라고 칭한 만큼 이 두 성취는 완벽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뿌리에서 나온다. 첫 수업에서 전규찬 교수는 소통으로서 ‘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처음에는 막연하게 인상만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가 이후에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을 살피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타과 학생들이나 교류대학 학생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알다시피 우리 학교에서 타원, 타과와 교류할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 이 수업에서는 수업을 시작할 때 서른 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직접 부른다. 우리 학교에는 원래 전자 출결 시스템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 “학생들의 얼굴을 최대한 기억해 주시고 모든 학생들의 고민이나 의견을 수렴하고자 하시는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영상이론의 철학적 계보학
영상원 영상이론과 1학년을 위해 개설되는 수업으로, 철학자 몇을 중심으로 1년에 걸쳐 계보를 그려 나가는 수업이다. 매주 질문 2개를 포함해 복습 리포트를 제출해야 한다. 수업은 이 질문들에 선생님이 답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선생님이 준비한 원고를 강독하는 것으로 끝난다. 수강생들은 농담 삼아 이 수업의 과제를 ‘받아쓰기’라고 부른다. 강의 내용과 원고 내용을 요약해 복습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니, 강의 내용을 수업 시간에 받아 적기 때문이다. 우리 학번에서는 최대한 받아쓰는 분량을 줄이기 위해 질문을 미리 공유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형식 자체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편한 수업이다. 다만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데에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수업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이 너무 생소하거나 방대한 이론을 집대성하는 것이어서 두 학기만으로는 전부 제대로 이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 수업은 학생들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특이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영상이론과에는 이처럼 이론적 기초를 다루는 수업이 없었다. 그러던 중 10학번 영상이론과 예술사 학생들은 동기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면서 서로가 수업에서 언급되는 여러 철학적 개념들, 논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공통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에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학교 밖에서도 종종 만났기 때문에 이런 고충에 대해서 상담했고, 2011년부터 1학년을 대상으로 <영상이론의 철학적 계보학> 수업이 개설되었다. 수업 개설을 이끌어 낸 10학번 학생들에게는 필수 과목이 아니었으나 거의 반 정도가 수강했고, 사정상 수강하지 않는 학생들도 필기를 빌려 볼 만큼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애초 10학번 학생들이 기대한 것은 수업 외 세미나, 서지 목록 만들기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영상이론의 철학적 계보학>은 텅 빈 채 들어오는 신입생들의 머릿속에 필요할 때 찾아볼 수 있는 간략한 첫 번째 서지 목록을 심어 주는 수업으로 기능하고 있다.
기초스튜디오
미술원 조형예술과 1학년 대상의 수업으로, <기초스튜디오>라는 과목명보다는 ‘파운데이션’이라는 총칭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1부터 4까지로 나뉘며 1학기와 2학기 모두 이중 3개의 수업을 선택해 수강해야 한다. 1부터 4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거칠게 말하자면 표현이나 작업 형식의 차이다.3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모든 수업은 과제가 많지만 파운데이션은 그중에서도 최고(최악?)로 여겨진다. 한 신입생은 입학 전 선배들에게 파운데이션에 대해 묻는 족족 “개강 전에는 일단 쉬라”, “알바나 취미 생활은 파운데이션이 시작되면 못 한다”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시간의 절대적인 부족도 부족이지만 끊임없이 작업의 방향성을 고민하면서 만들고 부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기에 더욱 힘들다. 그 유명한 ‘악기 만들기’는 <기초스튜디오4>의 과제다. 통상적인 악기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그것의 형태가 전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악기(樂器),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소리를 나게 하는 것도 어려운데 악보를 만들어 연주도 해야 한다. 때문에 이 과제를 ‘악귀 만들기’라고 칭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파운데이션은 예술 작업의 기초 쌓기 과정이다. 시간에 쫓기며,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쫓기며 작품을 완성한 경험은 그 자체로 이후에 작업을 하기 위한 감각을 길러 준다. 작업을 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방향을 잡을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매거진 <K-Arts>의 툰 지면을 멋지게 채워 주고 있는 윤서 씨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파운데이션 당시 보았던 작품에 대한 기억이나 생각들이 모두 다 생생하다고 했다. “정말 좋은 작업은 순간의 감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작업하는 이에게 찾아오는 선물 같은 것이라는 걸 느꼈어요.”
파운데이션
미술원 디자인과에도 역시 1학년이 거쳐 가는 수업이 있다. 2D, 3D, 4D&5D <파운데이션> 중 2개 이상을 반드시 수강해야 한다. 과목명 앞쪽은 디자인의 대상을 가리킨다.4 피드백 위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과제가 많다. 포기하고 적당히 해 버릴까 수없이 고민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최대 난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터뷰에 응해 준 수강생은 함께 작업하다 보면 포기하지 않고 디벨롭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 과정은 열정 없이 불가능한 경지인 것 같아 파운데이션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열정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작업에 앞선 리서치 과정에 대해서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다른 작업물의 이미지들이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정답처럼 새겨지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질 때도 있다고 말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 자체가 가지는 여러 난점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얻어 갈 수 있는 것이 많은 수업이라고. 피드백을 통해 과제를 수정해 나가면서 이전보다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2D 파운데이션의 경우 그래픽에 대한 감각을 기르게 되고 3D 파운데이션에서는 제품에 대한 시야를 키울 수 있다고 한다. (4D&5D 파운데이션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취재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통상적인 방식이나 자신이 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또 많이 배울 수 있다. 어떤 작품들은 만드는 난이도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높은 완성도를 보여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디자인과는 디자인의 대상에 따라 세부 전공이 나뉘어 있다. 입시에서는 구분해 선발하지만 입학 후에는 세부 전공을 완전히 선택할 때까지 커리큘럼을 다소 느슨하게 운영한다. 2D부터 3D, 4D&5D까지의 <파운데이션>은 진로를 탐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어디까지나 비유지만, 늪에서 빠져나가는 법은 가라앉는 몸을 지탱할 단단한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미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침착하게 길을 복기하며 출구를 찾아내는 것이다. 스스로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 너무 막막해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지만 질척한 늪에서도 빠져나올 방법은 있고, 미로에는 언제나 출구가 있다. 나는 2019년 <영상이론의 철학적 계보학> 수강생이다.
전날 술을 마시고 피곤에 절어 내내 졸다시피 한 적도 있고,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동기들과 카톡을 하다가 “서연재, 왜 웃지?”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2019년 여름에는 동기 몇과 수업에서 다뤘던 스피노자의 에티카 읽기를 함께했다. 그런 추억이 가진 힘이 나를 계속해서 글을, 영화 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끌었다. 이 글에 언급되거나 언급되지 않은 수업들도 모두에게 그런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