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와 늑대의 시간은 ‘황혼’을 표현하는 프랑스 관용어 L’heure entre chien et loup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 질 무렵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를, 나아가 그러한 중의성을 뜻한다.
✽ 비평에서 으레 남용되는 ‘영혼’이라는 표현을 경계하면서도 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이 아닌 손에 잡히는 것으로, 최소한 정신(mentality)으로 감각되길 바란다.
✽ 이 글은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스포일러와 몇몇 잔인한 장면 묘사를 포함한다.
사악한 영혼과 가엾은 육체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사악한 영혼과 싸워야 하는데 살과 피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육신은 우리의 박동을 지배하고, 지치게 하며, 무겁게 한다. 우리는 이 땅의 중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엾은 육체들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이에겐 미래가 없으나 우리에겐 저주스러운 내일의 태양이 뜨고야 마는 것이다. 저들은 황야를 활보하는 늑대고 우리는 목줄 묶인 개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하 <쓰리>)는 이러한 유비에서 개와 늑대의 싸움이다. 둘의 그림자가 겹치는 황혼의 시각에 촌각을 다투는 꿈틀거림이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 상1을 수상하며 우리 앞에 도착한 이 영화는 시대의 전근대성과 공권력의 부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2003)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마와의 대결과 그에 수반되는 심리적인 압박의 동력으로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1995)을 연상시킬지도2 모른다. 나레이션 자막으로 시작되는 <쓰리>의 첫 장면은 본 영화가 1979년 소련, 카자흐스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연쇄살인범 실화를 모티프로 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곧장 장르적으로 전환되는 시퀀스. 여자의 다리를 절단하는 남자. 그걸 숨죽이고 벽장 틈새로 바라보는 아이. 안쪽에서 잠겨 버린 문고리. 경찰 흉내를 내며 문을 두드리는 남자. 문의 개/폐와 시선의 이동에 따른 서스펜스, 유려한 카메라 트래킹과 사운드트랙, 어떤 능욕과 구멍뚫린 국가. 위처럼 예정된 영화적 교본을 전부 무화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까지, 미끼는 충분했다.
이제 우리는 1979년, 냉전 이후 1991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이었던 드넓은 카자흐스탄의 시공간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주로 팔로우하게 될 인물, 신입 경찰관 셰르 사디코프는 아시아계 인종적 형질을 가졌고, 그의 사수인 경위 스네기레프는 러시아계 백인의 형질을 가졌다. 그 둘이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같은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것은 유라시아 북부를 연방국으로 통합한 국가 ‘소련’이었기에 가능한, 자연스럽고도 유동적인 풍경이다.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공화국이었고 세계에서 9번째로 큰 영토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올 로케이션을 카자흐스탄에서 촬영한 <쓰리>는 더 광활하며 그 안에서 헤매는 이 육체들은 더 절절하게 가늠된다.
뷰파인더와 아이컨택
신입 경찰로서 셰르가 맡은 첫 임무는 한 절도범을 심문하는 일이다. 절도범은 소시지를 먹기 위해 마트 점원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말한다. 셰르는 갈증을 호소하는 그의 요청에 물을 따르지만, 바로 주지 않고 “정말 소시지 때문에 사람을 죽였냐”는 질문을 조건부로 제시한다. 절도범은 분개하여 셰르를 공격하고 신참인 그는 흠씬 얻어맞는다. 경위의 숙련된 제압으로 짧은 난동은 종결된다. 이어 쇼트의 전환, 경위는 다친 셰르를 멋쩍게 위로한다. 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고. 이에 셰르는 묻는다. “이런 일이 보통입니까? 소시지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 말입니다.” 이에 경위는 잠시 침묵하다 말문을 돌려 버린다. 셰르는 부당하게 얻어맞은 눈앞의 사건이 아닌 ‘소시지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의 본질을 꿰뚫고자 한다. 이 가엾은 자는 불가해한 악의 본질, 혹은 거시적인 빈곤과 범죄의 매트릭스를 질문하고 답을 찾고자 한다. 그리하여 감히 사회를 구제하려 한다. 사이비 재림교와 관련한 살인 범죄가 발생하자 사건의 본질을 좇기 위해 그 교리책을 먼저 읽어 보려 하는 셰르와, 그에게서 수사 법칙에 따라 교리책을 압수하고 ‘범인을 찾는 게 먼저’라고 단언하는 경위는 이렇게 구별된다. 늑대를 잡아야 하는 목줄 묶인 개들. 법칙과 경험이 허락하는 지도 안에서 타겟을 쫓는 개와, 감히 본질을 좇는 개.
또 하나의 머리가 절단된 시체가 발견되자 수사팀은 이를 연쇄살인으로 간주하고 추적에 박차를 가한다. 동시에 연쇄살인의 자수자가 나타난다. 그의 진술은 몹시 기이하고 사디즘적인 연쇄살인의 수법과 일치하기까지 한다. 목을 베고, 피를 마시고, 몸을 잘랐다. 미심쩍은 데가 있지만 수사팀은 그의 진술에 따라 현장을 수사한다. 현장은 카메라에 담긴다. 이때쯤 삽입되는 한 쇼트에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셰르가 수사팀 동료에게 건넨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걸로 보면, 당신 영혼이 없어 보여요.” 농담으로 무마되는 이 짧은 대화는 어떤 진실을 포함한다. CCTV와 블랙박스로 일축되는 완전히 현대적인 감시체제, DNA 감정, 과학적 수사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에서 비롯된 고백. 그것은 공포스러운 대상에 대한 지배적이고 초월적인 시각 없이 영혼과 직면해야 했던 이 수사를 지시한다. 그들은 뷰파인더를 거치지 않고 사악한 영혼을 마주해야 하며, 빈틈없는 아이컨택의 순간에만 수사는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포획하고자 하는 대상과 동등하게 노출되고 손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예견된 운명이다.
총과 이빨
머지않아 범행을 자수한 이가 실은 범행의 목격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증인은 연인을 잃은 비애로 범인과 같이 체포되어 복수하기 위해 거짓을 고했다. 수사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수사팀은 최대한의 용의자를 불러 세워 놓고, 증인에게 범인의 증명을 요구한다. 극한의 긴장감 가운데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던 증인은 절묘하게 두 명의 용의자 사이에서 실신하고 만다. 수사는 히스테릭한 지경에 접어들고 셰르의 신경증은 극한에 달한다. 이제 증인을 실신시킨 용의자 둘에게 수색영장이 발부된다. 프로페셔널한 경위는 보다 확정적인 용의자를, 셰르는 덜 확정적인 용의자를 심문하게 되었다. 자, 초조함이 그를 잠식한다. 이 상황에서 셰르가 취할 수 있는 행위는 확증에 대한 강박뿐이다. 용의자가 사건 발생 시 누나의 생일 파티에 있었다는 진술을 하자 셰르는 그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20명의 이름을 모조리 쓰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20명의 이름과 신원을 모두 받아 낸들 수사는 깜깜하다. 실증으로 포착 불가능한 사악한 영혼은 유유히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셰르는 범인이 풀어놓은 개에 어깨가 물어뜯기고 수사팀은 허무하게 범인을 놓친다.
이 과정에서 셰르는 자신을 과보호하는 누나, 디나와 다투기까지 한다. 부모 없이 단둘이 살아온 남매다. 셰르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 온 디나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디나가 빨리 가정을 이루어 자신을 놓아주길 바라는 한 켠의 마음이 비난으로 퍼부어진다. 디나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클럽에서 낯선 남자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는 최후의 얼굴만을 남긴 채. 이때, 어깨 부상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셰르는 경위가 건넨 범인의 일기를 읽는다. 타락한 여인의 피를 경멸하는 경악스러운 내용이 셰르의 목소리, 나레이션으로 읽힐 때 그의 육체와 영혼은 분명 손상된다. 하지만 수사는 뷰파인더 없는 직면으로만 가능하기에, 셰르는 그것을 읽는다. 낮에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저녁엔 칸트를 읽던 그는 범인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 행방불명된 헌신적인 누나와 신원을 알면서도 체포할 수 없는 범인. 그 신경증의 극한에서 셰르는 불현듯 이치를 깨닫는다. 수사팀의 노련한 개가 경계하던 직감을 새파란 개는 겁 없이 터득한다. 개는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복종한다. ‘먹이를 주는 사람’. 이는 셰르가 범인과 동등한 나락을 겪고, 상실된 누나의 공백을 범인의 누나와 유비하여 터득한 직감이다.
신앙과 실증
범인의 얼굴과 신원을 알아도 잡을 수가 없는 상황, 수사는 방향을 잃고 증명이 깜깜한 직감만이 격동한다. 셰르의 직감에 의존하여 수사대는 한 번 더 움직인다. 그러나 불시에 쳐들어간 범인의 집엔 여전히 도망친 그를 찾을 단서가 없다. 더 이상의 수사, 증거의 수집과 보전은 무의미하며 무작동한다. 셰르의 직감은 범인의 누나가 착용하고 있는 익숙한 모양의, 디나의 귀걸이를 발견해 낸다. 하지만 이는 “어디서 샀는지 기억 안 나요”라는 인과로 단숨에 기만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직감이지만 불충분한 증거다. 셰르는 어쩔 수 없이 총구를 내린다. 팽팽하던 긴장감은 루즈해지고 창문 너머의 햇빛만이 셰르를 비춘다. 신은 죽었고 자연만이 그를 관조한다. 동시에 이 루즈한 전환은 오히려 힌트를 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사가 아니라 트릭이다. 셰르가 직감으로 발견한 ‘귀걸이’에 이어, 의심할 데 없는 현장에서 경위가 발견한 단서는 가느다란 마룻바닥의 실금 같은 ‘틈’에 불과하다. 체념한 인간의 발끝에 툭, 걸린 우연. 그러나 그것으로 함정은 폭로되고 범인은 체포된다. 결국 사악한 영혼을 포획하는 것은 직감과 우연이다.
이는 신도 과학도 아닌 우연으로 찾아오며 신도, 과학도 미비한 세계는 지독히 현상학적인 장난질로 건설된다는 증명이다. 경위가 두 번의 방아쇠로도 범인을 놓친 것처럼 총은 무력하며, 개들은 원초적 이빨로만 늑대를 잡을 수 있으리라. 그들은 수사관이 아닌 게걸스러운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
범인은 체포되었다. (그래도) 디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셰르는 이상한 꿈을 꾼다. 죽은 증인이 나타나 자신을 향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사람”이라 말한다. 비탄으로 자살한 혼령의 중얼거림이다. 셰르는 홀린 듯 경찰서로 출근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텅 빈 사무실, 전원 해고된 수사팀의 폐지다. 개인들은 국가적 은폐 아래 소리없이 흩어진다. “이 위대한 나라에 식인 살인마는 존재할 수 없”기에, 범인에게 선고된 것은 죄와 감옥이 아닌 정신병원에서의 치료다. 쏟아지는 비. 이송되는 범인. 둘의 아이컨택. 비애는 끝나지 않았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연쇄살인범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경쟁국들의 언론플레이 가운데 소련은 사건의 은폐를 택했다. 이는 당시 실제 맥락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으로, 본 사건이 “이미 정치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는 장관들의 발언 뒤로 집무실 벽에 걸린 두 개의 사진3, 당시 소련의 특권층 노멘클라투라의 사진이 프레임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셰르는 힘을 잃은 수사팀에 사직서를 내고 떠난다. 그는 기차에 탑승하는데 영화가 그 목적지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이 결말의 타이밍에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것이 모더니스트의 영화라면 셰르는 기차에 타고 레이먼드 카버의 「칸막이 객실」과 같은 여정을 떠나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그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그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방향이라면, 조만간 그는 알게 되리라.” 그러나 이 전근대의 기차는 그를 놔주지 않으며 그에게 편안한 숙면을 허락할 생각이 없다. 우연의 장난처럼, 셰르는 병원에서 탈출한 범인을 기차에서 마주친다. 이 폐쇄회로에서, 셰르와 범인의 마지막 접전이 피와 살이 튀기는 육탄전인 것은 필연처럼 보인다. 범인은 기차 밖으로 뛰어내리고 셰르도 뛰어내린다. 기차로부터 탈주한 이들에게 원시의 시간이 주어진다.
사악한 영혼이 마침내 손아귀에 잡힐 때,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가증스러운 피와 살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에게도 육체들과 동일한 목줄과 중력의 짓누름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는 이 원시의 시간에 복수를 택할 수도 있다. 그의 영혼의 일부는 분명 그것을 갈망한다. 서서히 해가 지고 한 데 뒤엉킨 둘의 형상과 같이 둘의 영혼이 살의로 겹치는 순간, 개와 늑대의 형상을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 전근대적 시간으로부터 탈주한 원시적 시간으로, 동등한 나락으로, 같은 진창을 굴러야만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불현듯 그를 멈추게 하는 환청이 찾아온다. 그것은 디나가 부르는 셰르의 이름이며, 디나가 남긴 조언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 어느덧 어둑해진 황혼 너머 고통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신앙도 주술도 잃은, 다시금 목줄 묶인 가엾은 영혼이.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4
<쓰리>가 ‘쓰리’인 이유는 3장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찾아라, 보라, 잊어라. 1장과 2장은 살인범을 쫓는 장르적 서스펜스로 충실히 내달린다. 신입 경찰 셰르를 팔로우하며 그가 느끼는 갈증, 혼란, 누나를 영영 잃어버림으로써 시험받았으나 끝내 지키게 된 인간다움을 바라보게 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악한 영혼과 육체, 국가와 개인 사이 비애,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빨려 들어간다. 반면, 3장 ‘잊어라’는 고려인 4세 감독 박루슬란의 ‘정지’다. 영화가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시사하며, 연쇄살인범의 신비화나 장르화로부터 빠져나오는 이 제스처는 침잠(immersive)이 아닌 개입(involved)으로 작동한다. 당국에 사형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여전히 강제 치료 중인 살인범을 둘러싼 실태, 2017년 공개된 자신을 수식하는 모든 형태의 언론을 거부한다는 범죄자의 글, 그리고 블랙아웃. <쓰리>는 실재하는 역사적 맥락과 함께 비애 없이 막을 내린다.
장르와 정치, 비애와 비애 없음, 이 영화적 시차 가운데 동일한 지시 대상은 역사의 흐름과 잠정하에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형형했던 국가와 전근대가 되어 사라진 국가, 강대국을 향한 야망과 실패가 예정된 반쪽짜리 사회주의, <쓰리>는 그 불가항력의 역사적 시차에 서서 소련을 응시한다. 모든 이념의 역사가 그렇듯, 오해의 역사 속에서 오인된 인간들. 헤게모니 각축의 엄명 아래 개인이 짓눌리던 시대. 연쇄살인범이 여성의 약한 피부를 도려낼 때 남성 수사관들의 단단한 근육 또한 해부되었고, 그에 드러나는 것은 벌거벗은 육체와 구멍 뚫린 내셔널리티와 다름 아니다. 늑대의 이빨에 찢기고 목줄 쥔 주인을 물어뜯을 수도 없는 개들, 그리하여 피가 낭자한 역사의 실존이 우리를 끌어들인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를 지날 때 단지 손을 떨며 촛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개와 늑대, 둘의 목줄을 쥐고 있는 ‘국가’가 드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