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대부분의 책을 전자책으로 구입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종이책을 좋아한다. ‘펼친다’는 행위 때문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특유의 종이 냄새가 훅 끼친다. 느슨하게 힘을 풀면 종잇장이 간지럽게 손가락을 스친다. 나는 시집을 읽을 때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거나 목차에서 제목만 보고 펼치는 식으로 시작하는데, 그래서 시집을 샀을 경우에는 어떤 구절을 펼치게 될지 기대감도 있다. 결국 이런 어떤 감각 때문에 좋아하는 책은 종이책으로 사고 싶어진다.
이 책도 펼친다는 행위가 주는 감각을 한껏 느끼게 하는 책인데, 『단어의 집』이라는 제목 때문인 것 같다. 책을 펼칠 때 그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가 어쩔 수 없이 연상되는 것이다. 현관에 올라서니 “모든 단어들은 알을 닮아 있고 안쪽에서부터 스스로를 깨뜨리는 힘을 갖고 있어요.”(p. 7)라는 말로 단어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세계를 창조할 힘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어떤 세계를 담은 말들인가 목차를 기웃거려 보면 국적이나 쓰임을 불문하고 나열되어 있는 단어들이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그 규칙을 파악할 수 없다. 페이지를 넘겨 내가 직접 단어를 꺼내 들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 주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막상 펼쳐 보면 이건 단순히 단어 하나에만 얽힌 이야기들은 아니다. 이야기들이 서로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 보이는 모양이나 만져지는 질감은 가지각색으로 다르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집’에 이어 ‘놀이터’라는 비유를 함께 사용한다. 가령 그네와 미끄럼틀이라는 단어는 서로 유사한 뜻을 갖거나 반대되는 뜻을 갖거나 하는 식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두 단어가 함께 있다면 우리는 놀이터라는 장소를 떠올릴 것이다. 시인이 이 책에서 말하기를, ‘장소’와 ‘공간’은 다른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장소에는 기억이 담겨 있다. 시인이 들려주는 단어에 얽힌 이야기를 읽어 나감으로써 우리는 그가 어떤 ‘단어의 집’에 사는 것인지 윤곽을 그려 볼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내가 방금 여기로 건너오기 위해 나온, 내 평생의 기억을 담은 ‘단어의 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단어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관계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➊ 내가 무슨 말을 해서 어제 네가 웃었더라?
➋ 너를 어제 웃게 한 말, 뭐였지?
➌ 무슨 말이 너를 어제 그렇게 웃게 했어?
이 글의 제목은 사실 위의 세 가지 문장처럼 쓰일 수도 있었다. 문장에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라고 한다면 가장 단순하게는 이런 단어 배열의 순서를 생각할 수 있다. 같은 뜻을 가지는 문장들이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제목과 같은 배열은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➊의 배열은 내가 한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 ➋의 배열에서는 ‘너’가 웃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마지막으로 ➌의 배열은 ➊과 달리 말을 한 주체가 아니라 말의 내용을 중심에 둔다. 사실 배열 이전에 단어에서도 선택의 문제는 있다. ‘네가’가 아니라 구어인 ‘니가’를 쓸 수도 있다. ‘무슨’이 아니라 ‘어떤’을 쓸 수도 있다. 이 말이 주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제목과 같은 문장 안에서는 어쩐지 ‘니가’보다는 ‘네가’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글이니까, 글답게 ‘네가’를 쓴다. ‘어떤’보다 ‘무슨’의 읽힘이라고 할지 울림이라고 할지 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무슨’을 쓴다.
글을 쓴다는 건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이다. 읽는 이의 의중을 계속해서 헤아려야 한다. 이 글 제목의 문장은 일기에 쓰려다가 여기에 가져왔다.
우리 영화 볼 때 내가 아주 낯간지러운 말을 해서 네가 웃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를 또 기쁘게 하고 웃게 해 주고 싶은데, 어제는 무슨 말을 해서 네가 웃었지?
그때의 감각을 쉼 없이 되새겨야 하고, 그것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말의 재료들을 다듬어야 한다. 이 단어들의 조합으로 그런 의미를 나타내려면 그 단어가 아니면, 이 순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궁금해진다. 이 시인은 각각의 이야기에 왜 그 단어를 제목으로 붙여 준 걸까. 그리고 또, 물론 꼭 그것을 따라서 읽지 않아도 되지만, 왜 이 이야기들은 이 순서로 놓여 있을까? 의문이 해소되지 않더라도 그 의문 자체로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보여지는 세계와 잠시 닿아 있다는, 어떤 문학적 신비를 느낀다.
내 방식으로 정의했을 때 예술이란 언어 밖으로 탈출하는 사유를 붙잡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이 책에 담긴 시인이 “보고 겪고 느낀 것들에 관한 기록”(p. 5)은 그 자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미 붙잡아 형태를 부여해 놓은 시인의 말들이 기거하는 집에 들어가 보니, 그가 어떤 것을 붙잡고 싶어 하는 종류의 사람인지 막연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갓 구운 빵, 포근하다. 종소리, 맑다. 맑고 포근한 시인의 말들은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생각을 깨운다. 보라. 세상의 신비를 어루만지던 단어들이 내 손끝으로 내려와서는 그것의 모양과 성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말들을 불러온다. 나는 그 언어 밖으로 탈출하는 사유를 붙잡는 노력으로서의 예술을 또다시 언어화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거나, 가끔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히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것이 평론의 역할이라면 후자의 것은 이론의 역할이다.
“그러니 어떤 문장이라도 좋다. 백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만의 은밀한 다락, 혹은 지하실을 열어 볼 수만 있다면. 내가 쓴 문장이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이고, 살아 있다는 건 얼고 녹고 끊고 흩어지는 모든 순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p. 174 - 「안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