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일이 즐거운 것은 영화가 내가 모르는 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영상으로 압축시킨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에 작용하는 창작자의 관점은 현실을 특정한 단면으로 잘라 낸다.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그러한 현실의 단면들이다. 열을 맞춰 걷던 이가 덩그러니 다른 세계로 떨어지는 방송영상과 졸업상영회 ‘GATE’의 트레일러,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두 사람이 스크린 안에서 교감하는 영화과 졸업영화제 ‘접촉; 그럼에도 다시’의 트레일러는 영화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2022년에 각각 제18회, 제24회를 맞이한 방송영상과 졸업상영회와 영화과 졸업영화제에서는 총 96편의 단편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중 여섯 편의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터>
조현서 / 2021 / 28분
묘순은 아들을 잃었다. 사인은 교통사고.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이장(移葬) 일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맡게 된 묘의 주인은 스무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작업을 위해 묘에 도착한 묘순은 고인인 윤우의 어머니이자 이 작업의 의뢰인인 금자를 만난다. 이 영화에는 무시할 수 없는 서늘함이 존재하는데, 그 근원은 바로 영화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우리 앞에 등장하는 묘순의 얼굴이다. 공허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아들을 잃은 뒤 기나긴 고통으로 인한 메마름과 아들을 차로 치고 간 범인을 찾고자 하는 오랜 열망에 젖은 눅눅함이 공존하고 있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그 얼굴을 통해 우리에게 도저히 사그라들지 않는 어떤 슬픔을 전달한다. 특히 아들의 유골함을 들고 달리다 넘어진 묘순이 부서진 유골함에서 흘러나오는 뼛가루를 손으로 그러쥐며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터뜨리는 영화 최후반부의 클로즈업 씬은 직전의 롱 숏과 대비되어 더욱 통렬히 다가온다. 문자 그대로 가슴이 찢긴 것만 같은, 듣는 사람의 가슴마저 찢어지게 하는 울음소리.
죽은 이는 모두 말이 없다는 점에서 평등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사람들의 기도 속에서 ‘양지바른 곳’에 묻히는 때, 다른 누군가는 오로지 늙고 지친 어머니의 품에서 그저 ‘흘려보내질’ 수밖에 없을 때 이 사회에서 죽음으로도 평등이 결코 실현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대답>
신지훈 / 2022 / 26분
목사가 기도에 빠져 반주를 하지 않는 반주자의 이름을 부른다. “이레야.” 이레는 대답이 없다. 그저 간절한 몸짓으로 쉬지 않고 무엇을 중얼거리고 있다. 장면이 전환되어 이레가 층계를 오를 때 보이는 글자, 이레교회. 이레는 목사의 딸이며, 신실한 신자다.
그런데 그의 앞에 시련이 닥친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등록금을 낼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목돈이 든 지갑을 발견하는 것이다. 마침 전날 이레는 기도를 한 참이다. “딱 백만 원만 저를 위해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신이 기도를 들어준 것일까? 지갑에 든 돈과 지갑의 중고 판매가를 합치면 딱 백만 원. 이레는 시험에 빠진다.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흥미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적절한 활용과 배치다. 다정다감하나 이레가 처한 현실의 무엇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 순수한 관점으로 이레를 곤란에 빠뜨리는 아이, 네가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느냐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교회 집사. 그리고 특히 눈에 띄는 한 사람, 이레와 아르바이트를 함께하는 또래의 소녀는 이레의 동전 던지기를 함께한다. 그림이 나오면 지갑의 주인을 찾아 주고, 숫자가 나오면 이레가 돈을 사용하기로 하고 동전을 던진다. 결과는 그림. 묘하게 안도하는 소녀의 앞에서 이레는 두 번 더 동전을 던진다.
이 소녀는 신의 대리자 혹은 상징과도 같아 보인다. 결국 지갑을 거래하던 현장에서 아마도 지갑의 주인일 교회 집사를 만나고, 자괴감에 빠져 교회에서 울고 있는 이레를 부르는 목소리 또한 그의 것이다. 이레가 받은 것은 과연 신의 대답일까?
<현수막>
윤혜성 / 2022 / 25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저들끼리 즐겁게 떠들며 골목을 내려갈 때 지호는 몸보다도 큰 현수막들을 어깨에 메고 그곳을 오른다. 세탁을 마친 현수막을 제자리에 걸어 놓는다. 아빠가 살아 있을 때는 아빠와 함께했지만, 지금은 홀로 하게 되었다는 점만이 다른 일상.
그런데 혹여나 현수막 속 언니를 보았다는 연락일까 부리나케 받은 전화 속에서 상대가 이상한 말을 한다. 언니가 돌아왔으니 현수막을 수거하라는 것이다. 엄마와 지호는 언니와 어색한 만남을 가진다. 곧이어 이 가족의 배경이 밝혀진다. 지호와 언니는 엄마가 다르다. 언니는 어릴 때의 충동적 판단으로, 너무나도 단란한 가족처럼 보이는 지호와 엄마, 아빠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집을 나갔다. 언니가 집을 나갈 당시 그보다도 어렸던 지호는 그런 언니와 쉽게 화해할 수 없다. 그토록 언니를 간절히 찾던 아빠가 떠나고서야 돌아온 언니에게 마음에 응어리가 남아 있다. 이러한 지호의 마음을 영화는 현수막이라는 사물을 매개로 해 드러낸다. 언니가 수거한 현수막을 멋대로 버리자 지호는 화를 낸다. 15년간 떨어져 있던 언니보다야 꼬박꼬박 세탁해 잘 보이게 걸어 두던 현수막이 지호에게는 차라리 언니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언니와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대화를 나눈 지호가 홀가분하게 현수막을 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매일같이 보기에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실종 현수막들. 그중 하나일 법한 사연을 꺼내어 보이며 영화는 통념을 벗어나는 가족의 형태를 조명한다.
<최여영의 해남 여행>
여영은 / 2021 / 28분
여영은 돈이 없고, 글을 못 썼고, 그래서 해남에 갈 생각이다. 엄마에게 돈을 빌려서. 도착한 해남에서는 지인인 지연을 만나 그의 집에서 머문다. 지연의 개와 함께 산책하고, 부족한 힘으로 장작도 패 보고, 지연과 함께 밭에서 잡초도 뽑는다. 글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는데 마감 전날이 된다. (마치 마감 직전이 되어서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여영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준다는 돈도 거절하고 자신에게 숙식을 제공한 지연을 글 소재로 써 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를 발견한 지연은 화를 내고, 여영은 ‘아직 결말을 못 썼는데 해피 엔딩으로 끝내겠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해 더더욱 지연의 분노를 산다. 우연히 지연의 개를 찾아 주어 이 모든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만월은 여영에게 순수한 열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꽤나 무거운 소재에 비해 이를 풀어 나가는 영화의 연출 방식은 경쾌하다. 여영과 지연이 아침 산책 중 마주치는 만월의 의미 불분명한(위의 조언을 하는 장면에서 의미를 알 수 있다) 움직임을 마주하는 순간, 분노로 흥분한 지연이 만월의 무릎에 술을 쏟고 이를 닦아 주려다 바지를 오픈해 버리고 마는 순간에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글 소재로 인생을 도용당할 뻔한 지연을 연기하는 것이 감독 자신이라는 점과, 틀림없이 감독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 분명한 주인공 여영의 이름은 한 명의 창작자로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의 깊이에 대한 신뢰를 더한다.
<화분>
최수빈 / 드라마 / 30분
입에 한가득 음식을 욱여넣는 여자. 다음 장면에서 먹은 음식을 그대로 토해 낸다. 그러고는 냉장고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채소들을 집어 믹서기에 간다. 연주는 끔찍하게 맛없어 보이는 초록색의 주스를 마시고, 집 앞 화단(꽃 대신 담배꽁초만 수북하다) 옆에서 담배를 피운다.
여기에 갑작스레 선호가 침투한다. 그는 화단에서 담배꽁초를 모두 걷어 내더니 코스모스를 심는다. 여름에 코스모스는 좀 뻔한 거 아니냐는 연주의 질문에는 코스모스의 의미가 우주라는, 다소 뜬구름 잡는 듯한 대답을 내놓는다. 선호는 꿈이 있어 집안의 반대를 피해 도망치고, 연주는 이룰 수 없어 보이는 꿈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연주가 쌓았을 것이 분명한 담배꽁초를 버리고 심은 코스모스는 연주의 마음속에도 피어나 영화의 엔딩에서 마침내 연주가 다시 노래하도록 만든다. 비록 아직은 옥탑방 앞마당에 불과할지라도. 졸업 작품을 가지고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상투적인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이 작품에 진심을 담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음대생 연주의 모습에는 앞으로 이어 나갈 작업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담겨 있다. 우리는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연주처럼 잠시 좌절할 수도 있고 선호처럼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래도 부러 스스로 싹을 눌러 버리지는 않기를.
<Unreal Estate>
최다은 / 다큐멘터리 / 22분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 곧 그것의 실현까지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서울에 살 자유가 있지만, 그러기 위해 소모되는 자원들은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
카메라를 무기로 든 보노보는 8/16비트 게임 그래픽으로 표현된 화면 속에서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서울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누군가는 계속 이 동네에 살고 싶지만 계속해서 오르는 집값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부모가 운이 좋았기에 서울에 집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특권이 된다. 감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한다. “산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재시작도 허용하지 않는 ‘로그라이크(Roguelike)’ 게임 같다.”1 다른 종류의 게임처럼 시작 값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당장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모두의 최종 목적지는 집이다. 한예종 방송영상과 졸업상영회라는 특성상 관객의 대부분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한예종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누구는 월세방에, 다른 누구는 전셋집에, 또 누구는 자가로 서울 및 그 근교에 살고 있다. 집이 없는 이들에게 집을 사는 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친구의 말처럼, 가질 수 없는 것은 차라리 빠르게 단념하는 것이 나은지도 모른다.
이렇게 결코 리얼해지지 않는 Unreal Estate의 터 위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현수막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누군가의 여행을 함께하며 어떤 대답을 기다린다. 진심으로 바란다. 이 모든 이야기가 차원을 넘어 내일에 닿기를, 우리의 고민이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의 다음 챕터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