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2022

ARTISTS

화려한 무대 위 프리마돈나는 궁극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 무대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해왔다. 어떤 시간을 지나 지금의 단단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까. 노래에 대한 진심을 붙들고 인생의 매 챕터를 새롭게 열어가는 성악가 서선영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떤 계기로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노래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집 앞에 있는 교회에 가게 됐는데, 성가대에 들어가고 싶지만 소극적이어서 말을 못하겠는 거예요. 친구가 대신 얘기를 해줘서 들어가게 됐죠. 청치마에 흰 셔츠를 입고 오라고 해서 제가
혼자 옷을 다려서 입고 갔어요. 오히려 지금은 보이는 부분만 잠깐 스팀다리미로 다리고 무대에 오르는 정도인데 (웃음) 그땐 전날부터 너무 기대가 돼서 옷을 미리 다려서 걸어놓고 다음 날을 상상하고 그랬죠. 독창으로 무대에 오르는 친구가 부럽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합창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기뻤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시립소년소녀합창단 시험을 봤는데 반대하시는 부모님께 ‘제발 시켜달라’고 해서 합창단 생활을 시작했죠. 딱 한 번이었지만 교도소 위문 공연을 갔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부터 ‘아, 노래하는 것이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주변에 음악 하는 사람이 없어서 성악을 전공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동력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 선생님들께서 저를 눈여겨보시고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성악 부문 대회를 매년 데리고 가주셨어요. 다섯 명씩 나오는 대회였지만 항상 1등을 했죠. ‘5명이 아니라 500명이 있는 서울에서도 될까?’ 싶기도 했지만 무조건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에 음악적인 모델이 전혀 없었는데, 다행히 음악 선생님께서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성악가를 소개시켜주셔서 성악을 공부할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감사한 게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작곡가셨는데 남다르고 생각도 앞선 분이셨다는 거예요.

어느 날 교장실로 부르셔서 갔더니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학교가 있다. 우리 학교는 서울대를 한 명 더 보내는 게 목표지만, 네가 이 학교를 들어가는 게 더 영광스러울 것 같다’고 말씀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수능 보기 전에 한예종에 합격했을 때 선생님이 정말 기뻐하셨어요. 그해에 서울대학교를 입학한 아이들 5명은 한 플래카드에 이름이 적혔는데 저는 단독으로 걸렸어요. (웃음) 우리 학교 커리큘럼이 저에게 너무 잘 맞았고, 설립 목표처럼 세계 무대에서 바로 뛸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정말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외국인이자 학생으로 지내는 시간은 당연히 쉽지만은 않으셨겠지요.
저는 (학부 졸업 후) 이탈리아로 공부하러 가고 싶었는데 최현수 선생님께서는 꼭 독일로 가라고 하셨어요. 당시 저에게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이 독일에 간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죽어도 못 가겠는 거예요. 그런데 대학원 2학기쯤 독일에서 오신 선생님께 마스터클래스를 받으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지금까지 추구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독일로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죠.
독일에 나가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었어요. 사회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했죠. 심지어 학교 시험을 보기 전까지 6개월 동안 무소속이었어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어서 힘들더라고요. 확실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정서적으로 거의 바닥이었고요. 하루하루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독일학술교류처(DAAD)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감사했어요. 집세의 30%, 의료비, 학비 등 전반적인 것들을 지원받았어요. 제가 결혼을 하고 유학을 갔는데 남편이랑 둘이 먹고살고 공부하기에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가면무도회> ©예술의전당

어떤 악기든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특히 성악은 그날의 기분, 뭘 먹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 가장 많이 변할 수 있어요. 스스로 컨트롤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에 급격한 변화나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한 번씩 ‘내가 살림하러 왔나’ 싶을 정도로 집안일을 다 하는 와중에 공부를 해야 해요. 독일 같은 경우에는 미성년자가 혼자 살 수 없어서 많은 돈을 주고 다른 집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죠. 최대한 철이 들고 나서 유학을 하러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2009년 ARD 국제 음악콩쿠르 2위, 2010년 비냐스 국제 성악콩쿠르, 마리아 칼라스 그랑프리 우승, 그리고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까지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계세요. 매번 대단한 결과를 내셨지만 한 번 한 번이 절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 같아요. 가장 마음에 남은 순간을 꼽아본다면 언제일까요?
뒤셀도르프국립음대 입학 직전에 뮌헨에서 열린 ARD 주최 콩쿠르에서 2등을 하자 학교에 난리가 났어요. 제가 신입생으로 들어온다면서 전광판에 이름이 떴죠. 6개월 후에는 스페인 비냐스 콩쿠르가 열렸어요. 자기가 제일 자신 있는 5곡으로 출전하는 콩쿠르여서 그야말로 참가자들이 제일 많은 콩쿠르인데 1등을 했어요. 정말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때 극장 관련 명함을 정말 많이 받아서 뭔가 해야 했는데,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일을 벌였다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지 못했죠.
이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나갔을 때는 미래가 불투명해서 불안했어요. 4월에 극장 한 군데만 오디션을 봐 놓고 5월에는 졸업 연주를 한 상태였거든요. 콩쿠르 일정 자체가 2주 정도로 길고 1차, 2차, 3차, 마지막에 입상자 연주까지 총 네 번, 그러니까 3~4일에 한 번씩 무대에 섰어요. 피를 말릴 정도로 계속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살 수가 없더라고요. 원래 먹던 대로 먹어야 되는데 계속 호텔 음식을 먹으니 밥심이 안 나오고 되게 힘들었어요. 조금 부끄럽지만 사실 입상자 연주 때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서 ‘쟤가 왜 1등이야’ 할 정도로 노래를 못했어요. 유튜브에 그때 영상이 없는 건 다행이죠. (웃음) 본선 무대까지는 죽을힘을 다해서 ‘마지막이다. 견뎌보자’ 했는데 (입상자 연주 때는) 체력이 안 되더라고요.

스위스 바젤 극장의 오디션을 보고 전속 솔리스트로 발탁되어 2015년까지 활동하셨습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갔던 작품이나 인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끝나고 얼마 뒤 바젤 극장 오디션 결과 발표가 나서 연수단원 자리에 1년 계약으로 가게 됐어요. 루살카랑 미카엘라를 맡을 사람을 찾고 있던 와중에 제가 오디션을 본 거죠. 특히나 루살카 같은 경우에는 분량도 많고 타이틀 롤이어서 행운 같은 기회였어요. 이후에도 바젤에서는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하는 역할들을 월급을 받으면서 공부했어요. 아무래도 첫 작품이랑 마지막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루살카>는 2016년에 국립오페라단 데뷔도 하게 된 작품이라 ‘데뷔’하면 떠오르는 첫사랑 같은 작품이에요. 마지막 작품은 <오텔로>였어요. 데스데모나 역할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음악이 정말 아름다워요. ‘바젤에서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구나’를 알았기 때문에 당시 시즌을 준비하면서 많이 힘들고 아팠어요. 지금도 그 음악이 들리면 심장이 반응하더라고요. 동료들도 너무 좋았고 극장에서 저를 믿고 좋은 역할들만 맡겨주어서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죠.

청아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악은 다른 음악 장르와 달리 성악가의 몸을 악기로 사용하고, 또 타고난 재능의 영향이 큰 장르이기도 한데요. 소리나 노래에 있어 특별히 추구하는 교수님만의 철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발성적으로는 항상 밸런스를 생각해요. 아무래도 고음이나 큰 소리를 낼 때는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호흡의 포지션을 밑으로 두는 게 중요해요. 다만 지나칠 경우에는 소리가 무거워지거나 탁해지고, 피치가 낮아지죠. 그걸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힘을 과도하게 쓰면 성대가 상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요즘 들어서 더욱 생각하는 것이 밸런스예요.
노래는 아무래도 운동이랑 같다고 봐요. 코어 힘도 되게 중요하고, 등, 허리, 엉덩이, 다리 근육도 많이 중요하죠. 그렇다고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서 통증이 생기면 힘든 것 같아요. 많이 걷는 게 제일 좋은데 뛰는 건 조금 위험해요. 목에 찬 바람이 들어가면 온도 차 때문에 기침이 나더라고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매일 빠짐없이 발성 연습을 하는 것은 운동선수들이 기초체력을 쌓는 것과 같아요. 감정 없이 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몸이 바로 반응할 수 있게 기계적인 연습을 해야 해요.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에 있어서도 표현력을 갈고닦는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이 노래를 어떤 상황에서 부르고, 이렇게 반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대본 공부를 하는 게 가장 우선이죠. 가곡은 시에서, 오페라는 텍스트에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오는지에 따라서 소리가 많이 변해요. 그다음에는 역할과 만나야 해요. 제가 진짜 마음으로 느껴야 듣는 사람도 진심으로 느껴지는데,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진심을 다 하는 게 어렵죠. 그래서 한두 곡을 부를 때나 오페라를 할 때나 체력소모는 비슷한 것 같아요. ‘얼마나 진심을 담아서 부르냐’가 제일 관건이에요. 저는 연기에 대해서 이렇다 할 공부를 한 건 없지만 감정이입이 남들보다 조금 빠르고 깊은 편이에요.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죠. 기계적으로 내기 힘든 음도 드라마 안에서는 전혀 문제가 안 되고 오히려 더 부드럽게 나는 것을 보면, 그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마음이 준비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진심’에 더 빠지게 된 계기가 있어요. 2019년 3월 서울시립합창단에서 <유관순>을 초연한 적이 있는데, 그 작품을 공부하면서 인상 깊게 들은 소리가 있었거든요. 우리는 클래식 성악가나 오페라를 생각하면 무조건 ‘벨칸토’, 그러니까 ‘아름다운 소리를 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죠.

<토스카> ©노블아트오페라단
<라 보엠> ©국립오페라단

그런데 서대문형무소에 3.1 운동을 하시던 분의 육성이 나오는 방이 있더라고요. 목이 쉴 대로 쉬어서 목소리가 거의 안 나오는데도 ‘대한독립 만세’ 외치는 그 목소리를 직접 듣는 순간, 너무 큰 진심이 느껴졌어요. 그건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느껴지는 게 아니잖아요. 독립을 위해 목소리가 다 없어질 때까지 외치는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런 마음이 담긴 목소리를 매번 유지하려면 테크닉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 진짜 그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부터 전임교수로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또 선생님으로서 음악원 학생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것은 무엇일까요?
전임이 되기 전부터 2년간 객원교수로 아이들을 가르쳐왔는데 선생으로서 마음가짐이 달라진 계기는 작년 9월이었어요.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이 학교 오페라를 올리지 못하다가 지난 9월에 <코지 판 투테>를 올리게 됐어요. 부끄럽게도 사실 제가 <코지 판 투테>의 한 아리아를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완창하지 못했는데, 그 곡을 예술사 아이들이 너무나 잘 해내서 놀랐죠. 저는 항상 크리틱을 하는 입장에서 장점을 칭찬해주기보다 ‘뭐가 부족하지?’ 이런 시선으로 아이들을 대하잖아요. 그런데 무대에서의 모습을 보고 정말 감격 했어요. ‘아니 저렇게 잘하는 애들이 나한테 왜 배우지?’하면서. (웃음) 가르치기 시작한 후로는 방학 때만 제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 학기 중에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 그 무대를 본 이후에 제가 바뀌었어요.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함께 커나갈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이번 방학 때도 아이들에게 ‘이건 어떻게 해요? 저건 어떻게 해요?’ 연락이 많이 오는데 스스로 공부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라서 기쁘게 생각하죠. 새 학기 시작하면 제가 방학 동안 혼자 연습하고 깨달은 것들을 빨리 더 알려주고 싶어서 기대가 됩니다. 특히 노래를 버텨주는 것은 목이 아닌 몸이라는 것을 알고, 매일 발성 연습을 해서 그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련했으면 좋겠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거든요. 경쟁하는 대상을 밖에 두지 말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기를 바라요. 그러면 당연히 노력하게 되고 연습하게 되죠.

성악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아티스트로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궁금합니다.
다행히 아직 ‘하고 싶다’는 의욕이 그 옛날 노래를 처음 공부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해보지 못 한 역할도 많고 하고 싶은 역할도 많고. 이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가까이는 6월에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가 있고, 12월에는 푸치니의 <라 보엠>을 해요.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작품 자체가 다른 것보다 분량이 많아요. 시칠리아 섬의 독립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캐릭터에 더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상황에 빗대어 생각하고 있죠. 이런 작업은 방학 때만 가능해서 지금 준비 하는 중이에요.
어떤 역할을 하든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저를 또 뛰어넘고 싶어요. 아무래도 성악가가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 더 무거운 역을 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벨칸토 오페라나 모차르트 등 처음의 것들을 공유하는 상태에서 체급을 늘려야 해요. 그걸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투란도트>, <레이디 맥베스> 등 앞으로 숙제처럼 남아 있는 역할이 몇 가지 있어요. 그 역할들을 건강한 목소리로 잘 해내는 게 목표입니다.

음악적 여정과 꿈에 대해 말하는 그의 얼굴은 여태까지 거쳐온 인물의 수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교육자로서 옳은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닫지 않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은 특히나 강하고 선명했다. 이제 막 또 다른 무대에서 선생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 그로부터 학생들이 무엇보다 노래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망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

글 황은율 사진 김경수 영상 최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