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2022

K-ARTS 30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 30주년 기념
故 이어령 문화부 초대 장관과 김대진 총장 대담

“총장님 말씀을 들으니 내 꿈이 몇 단계를 거쳐서 증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30년 전 내가 꿨던 그 작은 꿈이 말이지.”

2022년 1월 18일. 최저 기온은 영하 10도였고, 전날엔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을 뒤집어쓴 북악산이 내다보이는 이어령 선생의 평창동 자택 2층 서재에는 병원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국 지성의 대들보는 인생의 마지막을 서재이자 집필실에서 맞이할 작정이었다.
김대진 총장을 맞이하는 이 선생은 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걸음 보조기를 밀며 나왔다. “내가 몸이 이래서 총장님을 맞이할 때도 환자복 차림으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이걸 기사에 꼭 좀 써 줘요.” 양복과 타이로 예를 갖춘 총장을 곁에 두고 이 선생은 허허로이 웃었다.
이 선생은 몇 해 전 암을 발견했고, 적절한 시기에 수술과 치료를 중단한 뒤 자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목소리는 쉰 듯이 서걱거렸지만 기쁨이 들어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개교 30주년을 맞은 2022년의 벽두, 한국 예술 교육의 큰 기둥인 두 인물의 만남이었다. 김대진 총장은 개교 2년 후인 1994년부터 한예종에서 음악가를 길렀다. 세간에서는 그를 국제 콩쿠르에 많은 제자를 입상시킨 피아노 스승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지닌 공통점은 대회 성적이 아니다. 음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그들은 음악, 또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매달리면서 어떻게든 그 끝에 도달해 보려 한다. 그들의 이런 기질이 바로 한예종을 30년 동안 성장시킨 힘이다.
이어령 선생이 바로 그 세차게 자란 씨앗을 심은 사람이다. 개교를 위한 설치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던 1991년 12월 19일 그가 거기에 있었다. 김 총장을 만난 이 선생은 31년 전 그날의 아침 이야기를 분 단위로 끄집어내 들려줬다. 문화부 장관이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개각을 발표하는 날이라 마음이 바쁜 국무총리 앞에 설치령 안건을 몰래 밀어 넣었던 일, 불만에 찬 장관들에게 “모내기 신동이 있으면 농림부에서 학교를 만드시오”라 하고 결국 안건을 통과시킨 일까지였다. 이 장관은 그래서 한예종의 학생들을 ‘15분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마지막 국무회의의 제일 마지막 15분을 이용한 개교였기 때문이다. 그해 8월에 이미 사표를 내놨던 문화부 장관직을 4개월 연장하면서 마지막으로 통과시켜 탄생시킨 아이들이었다. 그는 “이젠 어딜 가든 예술은 한예종이 아닌가. 종합 대학 안에서 엘리트를 기르는 예술 대학 말고, 아티스트를 키우고 싶었다”고 했다.
마지막 할 일은 왜 예술 학교였을까. “라파엘로가 천장화를 그리는데 재상을 불러. ‘내가 딛고 있는 사다리 좀 잡으시오’하고. 재상이 ‘저까짓 그림 그리는 놈’하고 화를 냈지. 무슨 소리야, 총리 후보는 줄을 쫙 서 있어. 하지만 라파엘이 죽으면 그런 그림은 아무도 못 그려. 대체 불가능한 온리 원,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 아티스트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야 해. 돌멩이는 아무리 작아도 똑같은 돌멩이가 없어요. 그 빛나는 하나를 찾아내야지.” 이 선생은 또 이런 꿈을 꿨다고 했다. “음악이고 미술이고 전부 캠퍼스는 한데 있어야 하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모든 분야의 학생들이 합작해야 해요. 이렇게 칸막이를 없애고 넘나들어야지. 경계를 없애고 예술의 작은 왕국을 하나 만드는 거예요.” 김 총장은 이 부분에 크게 동감했다. “창의력을 과연 가르칠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경험하는 방법밖에는 가르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융합이 화두인데 융합은 가르칠 수가 없어요.융합은 결국 여러 경험을 자신의 안에서 혼자 합치는 일인 듯합니다. 지금 그 작업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화두는 기술이었다. 이 선생은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쓴다는데, 대 피아니스트 앞에서 음악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특유의 유머로 대화의 온도를 높였다. “베토벤 이전의 피아노를 보면 대퇴부로 페달을 밀게 돼 있었죠. 근데 귀찮아서 잘 안썼다고.베토벤의 음악을 보면 후대로 갈수록 곳곳에서 페달을 써요. 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던 거지! 당대의 모든 기술을 사용하고 통합하는 것, 그게 내가 꿈꾸던 예술학교의 모습이에요.” 김 총장도 동의했다. “피아노 연주에서도 바흐 시대에는 건반 악기에 페달이 없었는데, 현대에 바흐를 연주하면서 피아노 페달을 사용해야 하는지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 기술에서 이용할 것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 바탕에 예술을 입히느냐, 아니면 예술을 바탕으로 기술을 통해 표현하느냐의 문제인데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고 봅니다.” 소리 없는 웃음을 띤 이어령 선생은 “내가 꾸던 꿈이 증식되는 것을 본다”로 답을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안료를 만들어 썼는데, 그만 화학적 지식이 없어서 최후의 만찬이 그 당대부터 흘러내리기 시작했어요. 그 천재도! AI, 메타버스 같은 기술하고 경쟁하지 않고 올라타야 돼요. 이런 것들은 미술가로 치면 잘 써지는 색연필이야.”

이날 이어령 선생의 몸 상태를 고려해 약속된 대화 시간은 30분이었다. 하지만 음성이 약해지는 중에도 대화의 내용은 팽팽해졌고, 이야기가 끝난 때는 90분 후였다. 이 선생은 “침대에 누워만 있고 침울하다가 오늘 오래간만에 웃어 가면서 성한 사람처럼 이야기했다”고 했다. “예술가들의 피가 이런 거라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15분의 아이들’에게 필독서를 제안했다.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1966년 소설 『음악학교』다. 원제는 『The Music School』. 왜 이 책일까. 이 선생은 종교에서 시작했다. “예수님이 빵을 찢어 주면서 ‘내 육체’라 하지. 그걸 녹여 먹어야 하는데 잘 녹나? 녹여 먹으면서 종교는 하락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쉽게 가는 거지. 씹어야 돼!” 그렇게 씹어 먹는 자들이 예술가다. “그 소설에 보면 한 아버지가 딸이 다니는 음악학교에 가게 돼. 석양이 들어오는데 자기 딸이 치는 악보를 보니까 코드가 새까매. 근데 그 어려운 걸 녹여 먹는게 아니야. 자기 입술을 꽉 깨물면서 피아노를 쳐. 그때 아버지는 이래. ‘지금 딸 앞에 무릎을 꿇고 죽어도 소원이 없다.’” 예술가에게 유동식은 안 된다. 눈앞이 새까맣도록 어려워도 성체를 씹어 먹는 삶이 예술가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이 대화를 나누고 한 달쯤 지난 2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대로 성한 사람처럼 웃고 떠든 시간이 마지막 기적이었다. 공식적으로 최후의 인터뷰가 된 이날 그는 입술을 이로 깨물고 30년 동안 성장해온 이들에게 푸릇하고도 숨통 터지는 말을 남겼다. “너희들은 이 사회의 산소 호흡기야! 떼면 죽어!”

글 김호정 (중앙일보 문화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