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대와 극장 시스템이 날로 발전하는 가운데, 객석은 그대로인 극장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선언한다.”
위의 선언문은 온라인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극장종말론》1 프로젝트의 첫 번째 문장이다. 이들은 왜 극장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것은 극장의 전통적인 규범이 ‘어떤 관객’을 철저히 배제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이다. 그 장벽은 여태까지 충분히 가시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자격 없는’ 관객은 객석에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ADHD가 있는 에세이스트 정지음의 글 투명한 결박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람 예술의 세계에도 (매우 간단하고도 잔인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그것은 비장애 성인을 소위 ‘일반인’으로 설정하고 나머지를 최하위 계급으로 상정하며 “자격이 없다면 이곳에 나타나지도 말아달라는 부탁”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지금껏 비장애인으로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예술 관람자라는 포지션이 누군가가 갖지 못한 일종의 ‘자격’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노 키즈 존’과 관련한 논란들을 겹쳐 떠올리게 되었다. 교양을 갖춘 성인들끼리의 편안한 시간을 위해 기꺼이 공존을 포기하겠노라는 당당한 팻말들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정지음은 이러한 것들이 당연하고도 만연한 조건이 되어 투명한 결박으로 나타났으며 자신이 영화관과 공연장을 자연스레 싫어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나 같은 사람’도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는 관람 환경을 꿈꾸며,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변화의 시작임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고백한다.
예술의 관람자로서 혹은 창작자로서 장애인들이 겪는 투명한 장벽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지했다면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시도들을 일컫는 말이 ‘배리어프리(barrier-free)’이다. 그렇다면 배리어프리를 지향하는 예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는 공공서비스의 영역으로 볼 수 있겠지만, 배리어프리를 그 자체로 예술적 시도로 본다면 여러 예술이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소수자의 문제와 정상성의 확장, 신체성과 감각 영역의 확장에 관한 넓은 논의안에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한예종에서도 배리어프리 요소를 전시나 공연에 접목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미술원 조형예술과의 제22회 졸업전시 《안녕을 위한 베타테스트》의 경우, 졸업전시로서는 처음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제안하여 배리어프리 요소를 전시 일부에 도입했다. 온·오프라인에서 펼쳐진 전시는 대체 텍스트2와 스크린 리더3, 색맹/색약 친화적인 전시 디자인, 디지털 문해력을 고려한 UI/UX, 장애인의 문화접근성에 관한 연계 교육 등과 함께했다.4 이는 ‘이타적’ 베타테스트에 관한 아이디어 중 하나로 제시되었던 기획이라고 한다. 각자의 학위 과정을 마무리하며 졸업 작품의 성과에 집중하기 마련인 졸업전시에서 이타성이란 흔히 등장하는 키워드는 아니다. 그럼에도 본 전시는 보다 다양한 감각들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기획되었다. 이번 졸업생인 이도현 작가는 “향유하는 주체들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작품을 바라보는 입장과 견해가 다양할수록 미술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전시와 기획에 참여했다고 한다. 전시 제목에 포함된 ‘베타테스트’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공식 발표하기 전에 오류가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한 테스트를 일컫는다. 베타테스트를 자칭하는 전시에서 배리어프리를 위한 시도들은 완결된 서비스이기보다는 오히려 “부족함을 아는 것에서부터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게”5되는, 더 나은 곳을 향한 몸짓에 가까워 보였다. 이 베타테스트는 가령, 점자 설명문을 제공하는 것이 시각장애인의 예술 향유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전시연계프로그램으로 열린 김태현 강사의 <장애인의 문화접근성> 강의에 의하면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약 5%에 이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작가에게는 “시각을 대체할 언어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고, 실제로 “만지는 모형이나 청각과 촉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감각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하도록 만들기도 했다.6 이는 배리어프리 지향을 ‘감각의 확장’이라는 측면으로 이끌고, 예술 매체들 사이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무는 근거를 마련하게 한다. 한 전시 리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배리어프리라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간 미술경험의 ‘배리어’로 존재하던 것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그 자체로 기존 미술문법에 대한‘낯설게하기’”로작용하기도할것이다.7 즉관객의 확장은 미술에 대한 질문으로, 미술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의 주제나 형식 측면에서 배리어프리를 다루고 있는 작업들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정상성’의 범주에서 소외되었던 목소리들을 가시화하고,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던 감각을 전면화하는 작업들이었다. 하나의 예로 박민영 작가의 <만날 뻔해서 반갑습니다>는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인터뷰 영상을 중심으로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작업이다. 전통적 의미의 ‘정상가족’이라는 견고한 토대가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투명한 장벽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 조건 너머에서 “함께 산다는 동행은 기대로 부푼 경험일 뿐만 아니라, 빈번히 불안하고 늘 조심스러운 선택”8이 되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는 작품의 형식 또한 다층적인 감각을 사용했다. 전시에서는 인터뷰 영상이 조각들 위에 분절되어 나타나고, 다른 레이어에서 보여지는 자막, 향료, 사운드 등 다양한 감각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오케스트라’를 이루었다.
허겸 작가의 경우 자폐를 지닌 자신이 감각하는 ‘이상한 세계’를 그려냈다. 그 세계에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데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벌레, 영문 모르게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와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보고 느끼는 세계가 특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 것인지를 질문한다.9 어쩐지 그가 그려낸 낯섦의 감각이 그저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내게도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데도 나에게만 거슬렸던 작은 감각들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만의 생경함을 지닌 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처럼 배리어프리의 의미는 예술을 향유하는 관객의 확장에 관한 것이자 예술을 창작하는 주체들의 확장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음악원의 <포르테 콘서트 K-Arts with 김예지>는 장애인 예술가들, 연주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지난 12월 17일 서초캠퍼스 이강숙홀에서 열린 ‘포르테 콘서트’는 한예종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장애 학생들과 비장애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주 프로그램이었다. 음악원 재학생들의 공연은 트롬본·피콜로·피아노 트리오, 피아노 독주, 첼로·클라리넷·피아노 트리오 등 다채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김대진 총장, 김예지 국회의원의 대담과 학생들의 공연을 축하하는 의미의 피아노 협주로 마무리되었다.
김대진 총장은 “음악회 자체보다 음악회를 준비하는 리허설과정이어떻게보면더의미가있다”는점을 짚어냈다. “앙상블을 잘 하기 위해 상대방의 소리를 듣는 것,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맞춰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덕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10 모든 콘서트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서로 각기 다른 악기, 각기 다른 감각의 조건들을 지닌 이들이 함께한 포르테 콘서트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지향점이었다. 배리어프리 요소의 도입은 콘서트라는 결과물 자체보다 음악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의 가치를 조명하게 했고, 연주에 포함되는 ‘시간’의 범주를 보다 넓혀 보게 했다. 콘서트에 참여한 장애인 연주자들은 사전 인터뷰를 통해 관객들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편견을 넘어 음악만을 봐주기를”, “특별하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 봐주기를”11 기대한다고 밝혔다. 실제로도 연주의 순간에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비장애인인지의 구별은 의미가 없었다. 서로를 구별할 수 없는 채 함께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남을 뿐이어서, 관객들에게는 그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던 장애 예술인에 대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한편 지난해 3월 연극원에서 한일공동연출프로젝트로 진행된 연극 <어느 마을>12은 장애를 주제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들이 함께한 작품으로, 연극원 실험무대에서 공연되고 온라인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공연의 전 회차에 수어통역, 자막해설, 음성해설이 제공되었는데, 극중 역할이기도 한 ‘극장장’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음성으로 전달하였으며 수어통역사들은 배우들의 뒤에서 수어로 대사를 전달해냈다. 시각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청각을, 청각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시각을 열어주어 무대와 연기를 감각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었다. 이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 뿐 아니라 연극의 기존 형식 자체에 대해 질문한다는 인상을 받게 했다. 미술원의 졸업전시가 배리어프리를 지향함으로써 미술의 문법 자체에 대해 되묻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에게 완전히 접근 가능한 예술이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이제 확장된 관객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공존을 위한 시도들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발생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베타테스트 단계에서 충돌하는 감각들의 불완전함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번 조형예술과 졸업전시에 참여했던 이도현 작가와 서면 인터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약 4년간 장애학생도우미로서 허겸 작가와 함께했던 학교생활에 관한 것이었기에, 이 이야기를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도현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장애학생도우미로 지원했다고 한다. 자폐증이 있는 겸이 빠르게 지나가는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매 수업시간마다 속기록과 과제들을 전달해주었으며, 작업실을 같은 곳으로 정해 함께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일상에서 도현의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나누었던 자연스러운 대화의 순간이라고 한다. “서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시시한 얘기를 나누면서 지나가는데 저는 아직도 그 순간이 잘 잊혀지지 않아요. 왜일까요. 저희는 장애학생과 장애학생 도우미로 처음 만났지만 그 어떤 거리감 없이 함께할 수 있었거든요.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노래하면서 마음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점차 겸이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거나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등 오히려 도움을 받는 순간이 늘어났다고도 했다. 그들은 졸업전시를 만드는 순간까지도 같은 행사팀에서 함께 했다. 팀장이었던 도현은 각 팀원들의 성향이나 원하는 점들을 고려해 업무를 분배했는데, 겸은 그중 전시 현장에서 진행을 돕는 일을 맡았다.
“저는 당시 모두가 함께 하는 일에서는 특히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역량을 폄하하기 쉬운 상황은 시야만 바꾸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할 수 없는 것은 도와서 하는 것, 그럼에도 어려운 일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제가 겸과 함께 졸업전시를 준비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깨달은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공연장이나 전시장의 서비스를 개선하는 것보다도 진정한 ‘배리어프리’의 정의처럼 다가왔다. 장애가 예술 창작자나 향유자가 되는 데 장벽으로 작동하지 않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며 서로 공존하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도현과 겸이 몇 년간 해왔던 것처럼 그 모든 과정을 천천히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나간다면, 단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구조가 아닌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비장애인으로서 어느덧 당연한 ‘정상’의 범위 안으로만 좁아져 있던 감각의 범주가 오히려 그들로 인해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