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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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하땅세

⊗주의 : 공연을 보며 제가 느꼈던 놀라움을 표현하기 위해 일기 형식을 택했으나, 혹 이 공연을 보러 갈 분들이 이 글로 인하여 경이로움을 덜 느끼면 어떡하지 하는 노파심이 있습니다.

라이트하우스. 꽤 많은 극장을 가 봤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지도 앱에 ‘라이트하우스’가 아닌 위 주소로
꼭 검색하세요!” 당부하는 관람 안내 문자가 왔다. 처음 타 보는 마을버스를 타고 처음 가 보는 성북동 어느 언덕에서 내려 한참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도무지 극장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꼬불꼬불한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걸으며 스스로 길 찾는 능력과 지도 앱을 거듭 의심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길은 고요했다.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간혹 좁은 길 너머 가정집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극장을 못 찾고 있음을 인정하고 왔던 길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그 순간, 시끌시끌한 말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자 거짓말처럼 ‘극장’이 나왔다.

아담한 단층 주택 담벼락 앞에 마련된 ‘매표소’에서 티켓을 찾고 마당에 마련된 ‘극장 로비’ 의자에 앉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로비 가운데에 놓인 가정용 난로 위에서 고구마가 익어 가는 달큰한 향이 났다.
기존 극장 경험과 확연히 다른 낯선 풍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기대와 달랐으나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낯섦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 주는 신기함이 조금씩 희석될 때쯤 어느 관객이 화장실 위치를 물었다. ‘어셔’가 별안간 현관문을 열어 화장실로 안내했다. “안에 들어갔는데 배우들이 ‘안녕하세요.’ 인사해줬어요. 공연 준비하는 거 봤어요!” 그가 화장실에 다녀와 일행과 나누는 들뜬 대화를 듣자 얼른 ‘객석’으로 입장하고 싶어졌다.

집으로 들어서는 것이라 신발을 벗었다. 퇴장할 때 섞여서 찾기 힘들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기 무섭게 ‘어셔’가 티켓에 번호표를 부착하더니 신발을 가지고 갔다. 방, 주방, 화장실, 창문. 이상할 것은 없지만 놀랍게도 ‘집’이었다. 방 한쪽에 단을 쌓아 만든 객석에는 크기와 디자인이 다양한 의자가 소담하게 놓여 있었다. 회차당 스무 명 남짓 관객만 관람할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옷을 맞춰 입은 ‘어셔’들이 왔다 갔다 하며 객석과 화장실 안내를 하고, 짐과 외투를 보관하며 관객 편의를 제공했다. 객석에 앉아 매표소에서 받은 공연 팸플릿을 들여다봤다. 중국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류전윈의 동명 소설을 중국 실험극의 선구자 머우썬이 각색했다는 공연 소개 글에 짐짓 겁이 났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 탓이었다. “전생, 이생, 백년에 걸쳐”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팸플릿 문구도 무서웠다. 방대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나를 채 점검해 보기도 전에 누군가 익숙한 가정용 조명 스위치를 껐다. 서서히 조명이 밝아지며 ‘집’은 ‘극장’이 되고, ‘어셔’들은 ‘배우’가 되었다. 방은 더 이상 방이 아니었다.

하남 연진 양 씨 마을에 사는 두붓집 아들 양백순의 이야기다. 내레이터가 상황을 제시하고, 배우들이 장면을 그려 낸다. 양백순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쉴 틈 없이 말을 빠르게 내뱉는 동안 양백순의 머뭇거리는 말은 쉬이 사라진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해 신세가 꼬이고 만다. 말에 치이고, 말에 베이고, 말에 찔려 커지기만 하는 상처를 품은 채로 시간은 흘러간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말로 자신과 타인을 구원하고, 사람만 바뀐 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가슴에 박힌 말 한마디를 꺼내 보며 세월을 견딘다. 그 사이 양백순은 양모세로, 오모세로 거듭 상황에 휩쓸려 직업을 바꾸고 개명을 한다.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과장되게 빠른 속도의 말과 갑자기 찾아오는 정적, 미려한 장면 전환이 독특한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간결하게 다듬어 낸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담아낸 만큼 장소 전환이 잦다. 극장의 모든 공간, 모든 동선, 안과 밖 그리고 경계 지점까지 아주 알뜰하게 사용하며 공간 변화를 이끈다. 작은 창문은 성당 고해소가 되고, 화장실 샤워기는 처량하게 내리는 비가 되고, 느닷없이 방은 강이 되며, 벽에 붙였던 합판까지도 돼지가 되고, 염색공장 수조가 된다. 심지어 별다른 조명기 없이 “72개의 창문”을 가진 대성당의 고상하고 우아한 위압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원형 전기톱으로 합판을 썰어 내며 주인공의 분노를 표현한다. 모든 장면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단 한 장면도 억지 부리지 않는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이 어우러져 놀랍게도 그 모든 변화가 납득 가능하다. 수시로 변신하는 공간처럼 배우 12명 역시 약간의 소품 변화를 주며 50여 개가 넘는 배역을 소화해 낸다. 다양한 성을 가지고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퇴장한다. 신중국 성립 전후라는 거시사 속에서 그 역사와 별개의 존재처럼 자신의 시간을 살아 내는 온갖 군상이 부대낀다. 장면 변화마다 객석에서 웃음과 감탄이 터져 나왔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1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어리숙한 인물이 숱한 비극을 견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때부터, 목적을 가지고 추동하는 인물을 더없이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괴당한 의붓딸을 찾기 위해 기차에 올라 지친 사람들 속에 섞인 오모세는 기차 안에서 이름을 묻는 질문에 잠깐 머뭇거리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름을 스스로 명명한다. 나장례. 어릴 때 좋아했던 함상꾼의 이름이다. 그의 소리, 그의 말 한마디를 품은 채 숱한 세월을 견뎌 온 것이다. “미련 없이 떠나시게!” 그토록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마디를 겨우 찾아낸 순간, 시원하고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숱한 말보다 뜨거운 기운이 객석에 맴돌고 있음이 느껴졌다.

훅 하고 전체 조명이 밝아졌다. 극 내내 흡인력 있는 내레이션을 들려준 내레이터가 이번에 준비한 1막은 여기까지이고, 2막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안내했다. 지난한 팬데믹 상황으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없다면 집에서 만나면 된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드세요.” 같은 말인가 싶은, ‘말은 쉬운’ 이 말을 극단 하땅세는 연극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마디>로 기어코 해냈다. 시간은 힘이 세다. 실제로 극단 배우들이 밥을 해 먹고, 연습을 하는 공간에서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은 관객에게 유려함을 선사한다. 훌쩍 흘러 버린 80분이 아쉬워 시간이 내려앉은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으니 배우 한 명이 다가와 묻는다. “고구마 좀 싸 드릴까요?” 여러모로 뒤통수를 계속 얻어맞는 공연을 보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춥거나 무섭지 않았다.

글 박예슬
1 박준, 시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