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2022
STORY
2006년 11월, 비가 내리던 어느 늦가을 저녁에 나는 낡고 을씨년스러운 건물 복도에서 면접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협동과정 서사창작과 전문사 과정. 당시 나는 9년 차 작가 지망생이었고 대학원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호기롭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그날 저녁을 생각하면 몇 가지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등에 닿던 벽의 냉기. 축축하고 어두웠던 복도.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던 다른 과 지원자. 너, 문지혁 맞지?
면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에 답을 하던 도중 불쑥 면접관 한 명이 웃긴 얘기를 해 보라고 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군대에서 있었던 일 하나를 말했고(빵 하나 우유 하나를 사 오라고 했는데 바나나 우유를 사 가서 혼났던 이야기), 다른 면접관은 크게 웃어 주었지만 정작 질문을 했던 면접관은 냉담했다. 나는 떨어져도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면접장을 나왔다.
건물 밖에는 먼저 면접을 본 Y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말을 걸었던 그는 중학교 동창으로, 우리는 십여 년 만에 대학원 면접장에서 재회했다. 어쨌든 끝났다.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묵은지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책에 비유한다. 사실 책은 일종의 죽은 메타포지만, 클리셰가 강력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삶과 책 모두 시작과 끝이 있고, 한 장씩 천천히 넘겨야 하며, 주인공은 시련을 겪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펼쳐졌던 책은 독서가 끝나면 닫힌 채로 책장에 꽂힌다. 대부분의 책은 한번 책장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으면 잊히는 우리의 이웃들처럼.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대로 결국 우리는 모두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든, 시시한 이야기든.
김치찌개를 나눠 먹으며 알 수 없는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걱정했던 Y와 나는 이듬해 봄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를 붙여 주다니. 전문사 첫 학기에는 신이 났던 것 같다. 마침 학교는 새 건물을 지었고 면접을 봤던 우중충한 건물은 점차 갈 일이 적어지다가 몇 년 후에는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밤이면 지하에서 귀신이 나온다던 건물, 억울한 고통과 비밀스런 사연이 있다던 건물, 택시에 타서 학교 이름을 대면 몰라도 “안기부 건물 가 주세요” 하면 알아듣던 그 랜드마크는 역사 속으로, 기억 밖으로 추방되었다. 나에게도 학교에도 새로운 챕터가 열렸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플롯이 있기 마련이고, 플롯의 원래 뜻은 음모다. 주인공을 거꾸러뜨리고 괴롭히고 죽이려는 음모. Y와 나는 서로 다른 책을 살고 있었지만 둘 다 각자의 플롯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만남은 뜸해졌고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거울에 비친 Y의 다크서클과 한숨은 짙어졌다. 아마 그에 눈에 비친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처음 전문사라는 페이지를 시작했을 때의 기대와 달리 나는 실패의 목록만을 잔뜩 늘린 채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챕터를 찾아 태평양 너머의 낯선 나라로 떠났다.
라틴어로 책의 앞장은 렉또(recto), 뒷장은 베르쏘(verso)다. 그렇다면 인생은 렉또와 베르쏘의 연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릴 때는 책에 적힌 것이 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책에 적히지 않은 것이 책이라고 생각한다. 앞장에서 뒷장으로 넘어갈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잠깐의 심연, 순간의 어둠이야말로 진짜 책이다. 챕터와 챕터가 나뉘는 그 공백,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눈길이 곧 책이다. 누구나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베르쏘에 무엇이 적혔는지 알 수 없고, 시간이 흘러 알게 되는 순간 그 페이지는 렉또가 되어 멀어진다.
Y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원고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가 원래 목적은 잊은 채 포털사이트에서 의미 없는 클릭과 새로고침을 반복하고 있는데, 메인화면 가장 큰 광고 자리에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언어 영역의 마스터. 국가대표 1타 강사. 무제한 반복수강 290,000원. 엔젤투자자를 찾은 스타트업 대표처럼 보이는 남자가 안경테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머리와 옷차림이 바뀌고 이름마저 달라졌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건 분명 Y였다.
한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쓰며 여기저기 말과 글을 팔고 다니는 내 모습이 그 위로 겹쳤다. 우리는 같은 챕터로 들어가서 다른 챕터로 나왔다. 그의 플롯은 그를 저기로, 나의 플롯은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앞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의 새로운 챕터가 안녕하길 비는 것뿐. 다가올 나의 베르쏘가 그러길 바라듯이. 마침내 내 검지손가락이 살짝 움직였고 새로고침 된 화면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어딘지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