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2022
STORY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페이지를 넘깁니다. 그림 보듯 후루룩 넘기거나,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며 정독하기도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어도 읽히지 않는 문장에 갇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 후 다가오는 다음 페이지는 설렘과 기대로 가득찹니다. 인생의 한 챕터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챕터가 시작될 때야말로 그 설렘과 기대가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1992년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2022년 개교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30년을 디딤돌로 삼아 새롭게 도약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챕터가 끝나고 또 다른 챕터가 열리는 시기입니다. 올 한 해 동안 30년 역사를 돌아보는 ‘K-Arts 30’을 신설하여 예술학교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조명합니다. 우선 예술학교 탄생의 순간을 김대진 총장이 한국의 지성이라 일컫는 故 이어령 문화부 초대 장관과 만나 들어보았습니다. 예술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로서, 예술가가 이 사회의 산소호흡기로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학교를 세운 뜻을 전합니다. 학교 곳곳에서 학생들과 함께한 분들의 목소리로 그 때 그 시절 예술학교를 추억합니다. 2012년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창간한 매거진 <K-Arts> 역시 올해 창간 10주년을 맞아 1호 ‘청춘’을 시작으로 40호 ‘이상’까지 그동안 다뤄온 주제와 예술가들의 현재를 짚어봅니다.
돈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예술이 돈이 된다는 뉴스를 자주 접합니다. 연일 미술시장 호황을 분석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콘텐츠 투자 플랫폼이 활발해지면서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다며 시끌벅적합니다. 그런데 세상물정 모를 것 같은 예술은 아이러니하게도 돈으로만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며 이 사회를 앞서 끌고 갑니다. 비대면 시대에 오히려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공연을 발빠르게 자리잡도록 했습니다.
반민특위 후손을 다룬 2시간 48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0년 만에 완성하고 유튜브에 무료 공개하며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한 감독의 조용한 외침 또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예술을 창작하는 예술가가 예술을 향유하는 관객들을 확장하면서 사회와 공존, 대화를 모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은 무엇인지,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지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소프라노 서선영은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쉰 목소리에서 노래하는 진심을 깨닫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얻는 배움에 진정으로 감사함을 느낍니다. 국내외 내로라하는 영화에 소리를 입혀온 김병인 음향감독은 일상의 평범한 소리를 영상에 넣고 싶다면서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는 내일의 나를 위해 매일매일 출근하는 즐거움을 전합니다. 소설을 쓸수록 소설을 몰라 소설을 쓴다는 소설가 문진영은 절망을 웃음으로 견디며 쉽게 읽히지만 쉽게 휘발되지 않는 이야기로 독자들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예술학교를 거쳐간 예술가는 이렇듯 10년, 20년이 지나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하는 힘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나간 챕터의 인상적 장면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습니다. 예술학교를 처음 만들던 날의 긴박함, ‘청춘’을 타이틀로 매거진을 창간하던 스물의 푸릇함,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한 세대의 무게를 견디며 더 높이 뛰기 위한 도움닫기를 하는 서른의 당당한 모습까지. 누구보다 치열했기에 웃음과 행복이 더 값진 시절을 쓰다듬으며, 펼치지 않은 미지의 챕터를 함께 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