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면한 풍경 앞에서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 일견 평평해 보이는 지층 아래 겹겹이 쌓인 시간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사람. 장편 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으로 2009년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문진영은 긴 공백기를 깨고, 2021년에 단편 소설 「두 개의 방」으로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보다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 행위에 집중하는 그는, 일견 단순하고 평이해 보이는 서사 안에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갈 인물들을 그려낸다. 어둠 속에 성냥불을 건네는 마음으로, “쉽게 읽히지만, 쉽게 휘발되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문진영 소설가를 만났다.
2021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김승옥문학상에서 호명해주신 덕분에 10년 동안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청탁이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일시적이긴 하겠지만 일단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예전에 “나를 쓰게 하는 것은 마감이다” 같은, 다른 작가들의 말을 들으면 부럽고, 나도 마감의 압박을 받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까 마냥 좋지는 않더라고요. 하지만 마감이 없을 때는 내가 이 소설을 끝냈다는 확신을 갖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계속 수정하게 되고 끝이 안 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부족하더라도 마감과 함께 한 편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 마감 없이도 글을 마무리했던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기도 해요(웃음).
소설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자퇴했는데요. 일 년 간의 고등학생 시절에 괴짜 친구를 한 명 만났어요. 우연히 짝꿍이 되어 친해졌는데, 그 친구의 책상 서랍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라카미 하루키의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같은 책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전까지 저는 컴퓨터 게임에 경도되어 있던, 책이라는 걸 읽지 않던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어요. 그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아무래도 읽는 게 재미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로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오전에는 입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혀서 글을 쓰고요. 자유롭고 풍요로웠던 시절이에요.
『담배 한 개비의 시간』으로 2009년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셨습니다. 첫 작품으로 장편을 쓰신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를 장편으로 구상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그걸 쓸 당시에는 ‘이게 장편에 어울리는 이야기겠다, 이걸 장편으로 써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 같아요. 그저 당시에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어떤 이야기가 있었고, 정신없이 쓰고 나니까 장편이 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아요. 『담배 한 개비의 시간』에는 제가 이십 대 초반에 경험한 것들이 비선형적으로 응축되어 있어요. 대학에 입학하고, 자취를 시작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기도 했고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경험 속에서 내게 일어난 변화와 감정을 글로 쓰고 싶다는 들끓는 마음이 있었어요.그전까지 저는 컴퓨터 게임에 경도되어 있던, 책이라는 걸 읽지 않던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어요. 그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아무래도 읽는 게 재미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로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오전에는 입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혀서 글을 쓰고요. 자유롭고 풍요로웠던 시절이에요.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읽은 작가님의 주변 사람들이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작가님께서는 실제 경험의 일부를 소설로 옮길 때 특히 고민하거나 조심하는 지점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잖아요. 그래서 ‘이건 온전히 내 경험이야, 혹은 이건 타인의 것이야’라고 칼로 베듯이 분리하기는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소설로 옮길 때는 그 경험을 완전히 재가공하고 변형시켜서 허구 속에 녹여내야 하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우연히 뉴스에서 서정인 소설가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요. 그 말씀에 굉장히 공감이 갔기 때문에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나는 100% 내가 경험한 것만을 썼다. 그런데 단 하나도 경험한 대로 쓰지는 않았다.”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2010년 문장 웹진 인터뷰), “소설이란 게 정말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021년 김승옥문학상 수상 소감)는 인터뷰를 보고, 소설이 무엇인지보다 소설이 무엇인지 자꾸만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궁금해졌습니다. 작가님은 언제부터, 왜 소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나요?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점이 있어요. 제가 장편으로 첫 책을 내고, 얼마 뒤에 한 평론가분께 제가 쓴 단편소설 몇 개를 보여드릴 기회가 있었어요. 그분이 그걸 읽어 보시고, 조심스럽게 “이것들은 소설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나?”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무척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어요. 저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건데, 소설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어떤 것을 소설이게 하고, 소설이지 않게 하는 게 무엇일까? 소설이 대체 뭐지?”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소설가로서는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질문이 그때를 계기로 생겼던 거죠. 지금도 소설이 뭔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소설이 무엇인지 저 스스로 질문하고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소설쓰기’라고 생각합니다.
등단 이후 한동안 글을 발표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백기 이후에 한예종에 입학하셨는데요, 다시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단은 청탁이 없기도 했고요.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난 다음에, 제가 그걸 해결하려고 붙들기보다는 회피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내가 쓴 게 소설이 맞는지 계속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투고를 하거나 응모를 하지 못했고, 그런 시기가 꽤 오래 이어졌어요. 하지만 이십 대 중반쯤 취직을 할 수 있었던,해야 했던 시점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걸 우선순위에 둘 것인지 고민 끝에, 취직 대신 ‘소설 쓰기’를 더 집중해서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서른 살이 다 되도록 저의 지지부진함이 나아지지 않는 거예요.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해결되지 않는 질문,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학교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요.
한예종에 들어와서 얻게 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자신 있게 내놓지 못했어요. 누군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제가 하는 다른 일인 편집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그걸 직업으로 대답하곤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 들어와 보니까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나 소설을 읽고 쓰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인 거예요. 그 사이에 있는 게 안전한 느낌이 들었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조금 더 편안하게 느껴지게 되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혹은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실 수업 하나하나, 특히 전공 수업들 모두 기억에 남아요. 제가 윤성희 선생님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학교 와서 선생님 수업을 두 학기 연속으로 듣게 되었어요. 하나는 <졸업 작품>이었고, 또 하나는 <소설창작워크숍>이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작가에게 배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또 윤성희 선생님이 시원시원하고 재미있으시거든요. 제가 “이런 게 안 돼요. 여기서 막혔어요.”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지!” 하시면서 제가 거대한 것처럼 여기고 끙끙거리고 있던 문제를 사소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윤성희 선생님께서는 쓰다가 막히면 같은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시점과 각도로 몇 번이고 새로 쓰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도 힘들어하시기보다 아이처럼 즐기시는 모습이었어요. 오랫동안 써 오셨는데도 이렇게 즐겁게 소설을 쓰신다는 것에 감명 받았고 그런 태도를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또 김경욱 선생님 수업도 여러 개 들었는데요, 선생님이 자주 해주신 말씀, “좋은 소설에는 좋은 씨앗이 있어야 하고, 좋은 씨앗은 곧 좋은 질문이다”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도 제가 소설을 쓸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말이에요.
소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학교에 왔는데, 시 수업이 필수잖아요. 어떠셨나요?
이수명 선생님, 강성은 선생님 수업을 들었는데요, 솔직히 시 수업은 힘들기도 하고 어려웠어요.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 시를 읽어 보면, 이 친구는 시인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저는 시 수업을 듣기 전에는 소설을 많이 읽었지,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기에 시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현대 시를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요. 강성은 시인의 『단지 조금 이상한』과 신해욱 시인의 『생물성』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김혜순 시인의 시들도 좋았고요. 수업을 통해서 예전보다 시를 좀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어요. 이후로 소설을 구상할 때, 가사가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시집을 들춰 보곤 해요. 그 문장들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방향 설정에 활용하기도 하고요.
한예종에서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으셨나요?
언젠가 권희철 선생님과 대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요. 소설이 뭔지 궁금해서 학교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지금은 소설이 무엇인지 알 것 같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 저는 소설이 ‘사람에 관한 것’임을,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겠다고 대답했어요. 학교에 오기 전에는 나 아닌 사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쓰기보다는 나 자신의 이야기에 골몰해 있었거든요. 어렴풋하게나마, 소설이 사람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고 가늠해서 글이라는 형태로 옮겨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뒤로는 제가 쓰는 소설이 변하게 되었어요. 내 이야기, 내 경험에서 머무르지 않고, 나에게서 벗어나서 세계를 더 넓게 보게 되었어요.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윤리의 차원에 근접해 있음을 이 소설이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설득했’다는 평을 받은 「두 개의 방」에는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려는 인물이 나오는데요, 작가님에게 ‘소설쓰기’를 지속하는 것은 ‘기억’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결국 나마저 잊어버리면, 이미 사라진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닐까” 「두 개의 방」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제가 늘 유효하게 가지고 있는 질문이었기에 소설을 통해서 풀어 보고 또 질문을 건네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억에 관한 주제가 저의 ‘소설쓰기’를 추동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소설이라는 장르가 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맞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간에 지금 여기의 현실을 옮겨 놓게 되니까요. 소설을 읽음으로써 사회적 문제라든지 묻어 두었던 감정이라든지, 보이지 않아서 잊고 있었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과 다시 대면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소설의 역할이 아닐까요?
「두 개의 방」에서 두 인물이 함께 술을 마시며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기억이 담겨 있는 공간을 찾곤 하는데요. 혹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공간이나 산책 코스가 있나요?
저는 제가 사는 동네를 주로 돌아다니곤 해요. 「두 개의 방」에서 두 인물이 공유하는 사소하지만, 인상 깊은 동네의 풍경들, 소용은 없지만 왠지 소중한 풍경들(“어느 집 앞 화분에 화분보다 더 큰 늙은 호박이 용케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 쌀가게 앞 보도블록에 몰려드는 비둘기들이 얼마나 뚱뚱한지에 대해”)은 제가 산책을 하며 수집해 놓았던 것들이에요. 저는 골목길, 특히 주택가 골목골목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매번 같은 길을 다녀도 거기 사는 사람들이 그 풍경을 매번 바꾸어 놓기 때문에 매번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꼭 특정한 공간을 여행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사는 동네를 새로운 눈으로 거닐다 보면 재미있고 소중한 장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잘 웃습니다. 종종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을 때도 웃곤 해서 무언가를 꾹 참는 웃음 같기도, “누군가에게 성냥불을 건네는 마음”에서 나오는 웃음 같기도 합니다. 작가님에게 ‘웃음’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 중 하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웃음’은 섣부른 희망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절망을 견디는 방법에 가까워요. 또, 웃음이란 제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어요. 삶이 아무리 별 볼 일 없더라도 내가 하는 시답지 않은 농담에 웃어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최고로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런 생각들이 소설에도 자연스럽게 담기게 되는 것 같고요.
다음에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이런 이야기를 이런 주제로 써야겠다고 계획하고 정해놓지는 않고, 그때그때 제가 관심이 가는 것들을 쓰는 편이에요.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을 조금 이야기하자면, ‘남자 없는 여자들’ 시리즈를 쓰고 있고, 외국인과의 관계를 소재로 한 것이 몇 편 있어요. 글을 발표하지 않던 시기에 써 놓았던 글들은 재작년에 소설집 『눈속의 겨울』로 엮었기 때문에, 지금은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쓰고 있어요.
『눈속의 겨울』을 읽어 보니 1인 가구 이야기나 사회에서 범주화해놓은 정상 가족의 범위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이상하게 가족 이야기를 많이 쓰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제가 가족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저도 모르게 많이 쓰고 있더라고요. 제가 특히 한국 사회 안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형태에 회의라고 해야 할까, 갑갑함 같은 것을 많이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가족의 형태를 생각하고 상상해서 소설에 담고 싶어요.
글을 쓸 때 제목은 어떻게 정하시나요?
제목을 정하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제목은 소설의 핵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쓰기 전에 가제라도 정해두고,쓰는중에혹은쓰고난후에더나은것이떠오르면 바꾸기도 해요. 참고로 『눈 속의 겨울』 중에 세 편은 노래 제목에서 가져왔고요(「눈 속의 겨울」(스왈로우), 「골든 슬럼버」(비틀즈), 「방공호」(9와숫자들)). 제목에는 저작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 음악들이 제게 건네준 이미지를 소설에 활용했어요.
곧 『이상한 계절』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박정은 작가님과 협업한 소설×그림 프로젝트인데요. 박정은 작가님은 저의 첫 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 책 표지를 그려주기도 한 분이에요. 일본 여행에서 3일 동안 같은 숙소에 묵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10년 넘게 우정이 이어지고 있어요.
어느 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명은 글을 쓰고, 또 한명은 그림을 그리는데 이걸로 재미있는 걸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가 짧은 소설을 쓰면 박정은 작가님이 그걸 읽고 그림을 그려요. 그건 소설 내용에 관한 일러스트가 아니라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고요. 그런 작업을 2020년 한 해 동안 브런치에서 연재했습니다. 단행본으로 엮는 과정에서 추가된 원고가 있는데, 추가된 원고는 앞서 말한 방법을 바꿔서 진행했어요. 박정은 작가님이 그림을 그리면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제가 소설을 쓰는 방식으로요. 현재 원고는 넘긴 상태이고 출간 일정이 확실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올해 안에는 나올 예정이에요.
요즘 젊은 작가 중에는 자신만의 플랫폼을 구축하려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상한 계절』을 브런치에서 연재한 이유가 있나요?
저도 독자와 만나는 방법을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특히 과거에 청탁도 없고, 투고도 하지 않던 기간에는 제가 소설에 좀 더 자신이 있었다면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방식을 더 모색해 보았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때만 해도 청탁을 통해 지면을 얻지 못하면 독자들과 만날 기회가 없다고 여겼으니까요. 제가 편집 디자인 일도 하고 있으니까 책을 내가 직접 만들면 어떨까? 상상도 많이 해 보았고요. 하지만 저처럼 게으르고 용기 없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더라고요. 요즘은 많은 작가들이 메일링이나 브런치, 블로그 등의 창구를 고민하고 모색해 나가고 있는것같아요.새로운 방식의 접점이 앞으로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고요. 제가 박정은 작가와 협업한 『이상한 계절』 프로젝트를 브런치에서 연재하기로 한 이유는 그 플랫폼이 글과 그림을 함께 담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혹시 소설 이외의 다른 예술 장르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원래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은 체력이 없어서 그런지 영화 한 편 보기가 어렵더라고요. 낮에 작업하다 보니, 밤에 영화를 볼 때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쓰는 중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기는 한데, 집중해서 글을 쓸 때는 고요함이 필요해요. 그래서 카페 같은 곳에서는 글을 못 써요.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다시 소설을 쓰게 만드는 힘을 얻기도 한다는 수상소감이 기억납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그런 힘을 준 책이 있다면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좋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요. 최근에 읽은 건 아니지만 제가 꾸준히, 직접적으로 힘을 얻는 책을 소개할게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인데요. 소설을 쓰기 전이나 소설을 쓰는 틈틈이 경건하게 한 편씩 읽곤 해요. 내가 쓰고 있는 게 부끄러워지는 부작용이 있기도 하지만 읽다 보면 나도 이렇게 품위 있고, 깊고, 아름답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거든요. 좋은 글은 쓰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으신지요?
기준은 없어요. 그때그때 호기심이 생겨 읽을 때도 있고, 추천을 받아서 읽을 때도 있고, 전혀 알지 못했던 작가의 글을 읽을 때 발견하게 되는 기쁨도 있어서 책은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오프라인 서점에 자주 갔었는데 코로나가 시작된 후로는 주로 온라인으로 책을 구매해요. 분야와 관계없이 새로운 책들을 구경하고 장바구니에 넣어두는 것이 취미예요. 충동적으로 구매하고요.
작가님이 꾸준히 소설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요즘 마감을 끝내면 보상으로 치밥을 먹고 있어요. 치밥도 기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쓰는 중에 겪게 되는 몰입의 즐거움과 간간이 도착하는 희열 때문이에요. 다른 일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거든요. 쓰기 싫어서 책상에 머리를 찧는 시간이 더 많지만 한 자라도 쓰기 시작하면 마법처럼 계속하게 돼요. 신비로운 경험이고,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으신지, 작가님께서 쓰시는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 닿기를 바라는지 듣고 싶습니다.
‘쉽게 읽히지만 쉽게 휘발되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게 제 바람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쓰기 위해 저도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고, 독자에게도 그렇게 가 닿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