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2022

VIEW

오용석,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17
캔버스에 유채, 65.1cm × 45.5cm, 2021 ©봄화랑

‘사랑은’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어 보자. ‘사랑은 용기이다’, ‘사랑은 어렵다’, ‘사랑은 둥글다’ 등 우리는 여러 가지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중 사랑을 정의해 내는,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랑을 알고 싶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확언할 수 없다면,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의 외곽선을 따라 그려 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사랑의 표면만이라도 흐리게, 흐리게 확인해 보는 일. 오용석 작가의 전시 《사랑의 형상》 (봄화랑, 2021.12.23.~2022.02.13.)은 그렇게 사랑의 여러 외곽선을 그러모으고 있다. 그리고 전시를 보는 우리는 그 외곽선의 내부를 개개인이 가진 사랑의 기억으로 채워 낸다.

사랑이 간결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전시 서문에서 명시하듯 사랑의 경계에서는 ‘다단한 간섭’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개인이었던 이들이 우리가 됨으로써 파생되는 여러 충돌은 균일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외곽선을 만든다. 힘 있게 뻗어 나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기쁨에 반짝거리고 튀어 오르다가도 슬픔에 한없이 요동친다.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사랑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감들은 흘러내리거나 흩뿌려져 있고, 여러 색깔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독립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기보단 서로 간섭하고 있다.

분명히 다르게 표현된 10개의 사랑의 형상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강렬하다는 것이다. 주황과 파랑의 색채들은 대비를 이루고, 표현과 기법 또한 잔잔하고 여리기보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시 서문에서는 이를 ‘폭발적인 광휘’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광휘로 말미암아 집중하고 있는 요소는 사랑의 찬란함인 듯하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한때는 ‘광휘’에 가까울 정도로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빛은 사그라들 테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더불어 찬란한 순간만이 사랑에서 가장 제일의 순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광휘의 순간은 찰나에 가깝기에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전시는 사랑의 찬란한 그 한순간을 포착해내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용석,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21
캔버스에 유채, 65.1cm × 45.5cm, 2021 ©봄화랑
오용석,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26
캔버스에 유채, 65.1cm × 45.5cm, 2021 ©봄화랑
오용석,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24
캔버스에 유채, 65.1cm × 45.5cm, 2021 ©봄화랑

이러한 사랑의 형상을 표현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내 작업은 표현의 불가능성 혹은 어려움을 인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서사시이다.”1 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본 글에서는 이 전시가 수행해 낸 그 ‘어떤 것’에 집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가 사랑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 낸 그 ‘어떤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이라는 단어에는 특유의 무게감이 있다. 희망은 절망 끝에 선 이를 살리게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희망이 꺾였을 때 절벽 끝에 서게 한 그 절망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밴드 잔나비의 앨범 <전설> 속 수록곡 ‘조이풀 조이풀’에는 ‘나의 기도 / 내일도 아무렇지 않게 떠오를 / 희망 / 비웃을 힘을 주소서’라는 가사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그만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사랑에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희망을 단순히 미래의 어떤 상태가 아닌 지금, 현재에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동사로서 바라본다면? 나는 희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하기’라고. 희망은 한 챕터가 닫히고 다음 챕터가 열릴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다음 챕터가 열리기 직전, 한 챕터와 다음 챕터 그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때는 뒤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희망을 바라본다면, 희망은 더 이상 우리 손을 떠나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무언가가 아닌, 우리가 손에 쥐고 앞으로 뛸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문보영 시인은 그녀의 산문집 『일기시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를 너무 많이 사랑했던 것에 대한 치유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2 사랑에서 희망은 뒤가 아니라 앞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앞’이란 개념 역시 ‘뒤’라는 개념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 우리는 이 전시에서 오용석 작가가 그려 낸 사랑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일을 통해 사랑의 뒤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지난 사랑들을 뒤돌아보며, 작가가 그려낸 외곽선의 안쪽 부분을 채워 낸다. 그리고 충분히 뒤돌아본 후, 우리는 전시장을 나가며 다음 챕터를 준비하거나 혹은 이미 열려 있는 챕터를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우리는 희망을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은 희망을 말할 땐 그 앞에 ‘감히’라는 부사를 붙여 말하게 된다. 동력이니 어쩌니 했지만, 솔직히 나는 희망이 좀 두렵기 때문이다. 희망이 파생하는 끝없는 낙관과 동시에 생겨나는 불안이 무섭다. 하지만 그 두려움까지도 품어 내는 용기. 그것까지가 진정한 희망-하기인 것이라 믿으며 나는 계속 사랑을 할 것이다. 사랑을 하고 싶다. 아니, 계속 사랑을 한다.

글 오지은
1 전시서문
2 문보영, 『일기시대』, 민음사, 2021, 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