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2023 SPRING45

모두 다 예쁜 말들 1

언니. 쟤 마녀예요.

현수가 말했다. 정원은 쿠키를 먹으려다 말고 노트북 마이크가 여전히 음소거 상태인지 확인했다.

뭐라고?
쟤 마녀라고요.
누구.

현수의 손가락이 승완 쪽을 가리켰다. 정원은 혹시라도 카메라에 현수의 손가락이 나오지는 않는지 다시 확인했다. 정원이 고개를 모니터 쪽으로 처박고 있는 사이 쿠키 부스러기가 키보드 위로 풀풀 날렸다. 정원은 손등으로 키보드를 몇 번 쓸다 말았다. 이제껏 얼마나 다양한 부스러기들이 이 틈새로 들어갔을지 생각해보면 하등 의미 없는 일이라서.

연출부 회의는 두 시간 전부터 줌 라이브로 이어지는 중이었다. 인원은 조촐했다. 연출 김성진, 조연출 한정원, 연출부 윤승완. 온라인 미팅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많았다. 이를테면 지금. 정원은 회의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현수와 엽기떡볶이를 먹고 지금은 스모어 쿠키에다 루이보스 티까지 한 잔 하고 있었다. 나 하루 종일 굶었어. 집도 개판이야. 그런 그럴싸한 핑계만 있으면 아무도 카메라 밖의 풍경을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정원이 현수와 함께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비유법이야?
아뇨 진짜.
아하.

반응이 뭐 그래요. 현수가 키득키득 웃었다. 마이크가 음소거 되어있으니 확인하라는 알림창이 떴다. 승완이 마녀라. 정원은 최대한 회의에 집중하는 척 하려고 애썼다. 성진은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로케이션 때문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토로하고 있었다. 어쩌라고 누가 산부인과 배경으로 시나리오 쓰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 말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조연출씩이나 돼서 연출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정원은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마이크를 켜고 근처 산부인과를 몇 군데 더 돌아보겠다고 말했다.

돌아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그치.
이제는 확정이 나야 된다고.
그러니까.

정원과 성진이 딱히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승완이 마이크를 켰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

저희 삼촌이 산부인과 하시는데요.
응?

내내 죽상이던 성진의 얼굴이 잠깐 피었다가 다시 굳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정원은 성진과 승완의 눈치를 동시에 살폈다. 현수는 그런 정원을 우습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원은 재빨리 성진에게 개인 카톡을 보냈다.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승완이가 기꺼이 삼촌 병원을 소개시켜 주겠냐 힘든 거 아는데 정신 차려. 노트북 화면 속 성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정원의 카톡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제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요.

아무리 그래도 승완은 너무 솔직했다. 성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결국 현수가 못 참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는데 정원은 음소거를 하는 것도 까먹었다.

너 누구랑 같이 있어?

성진이 물었다. 현수가 카메라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 현수 안녕. 성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정원은 이마에 손을 짚은 채로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댔다. 이제 며칠은 더 성진에게 들들 볶일 것이다. 회의할 때 집중을 안 했다느니 프리만 한 달짼데 아직 로케도 없다고 여기저기 소문낼 일 있냐느니. 현수가 그럴 애는 아니다, 고 말해봐야 소용도 없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성진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정원도 딱히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여기로 다섯 번째 산부인과. 정원은 어제 밤에 승완으로부터 유선 상으로 영화 촬영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산부인과 리스트를 받았다.

성북구만 30군데 전화 돌렸어요.

승완은 피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삼촌이 하신다는 그 병원은? 물어보고 싶었으나 열심히 참았다. 분명 승완이 그랬다. 곤란해질까 봐. 그건 정원도 동의하는 바였다. 촬영이 끝난 후 엉망이 된 로케이션은 스탭들이 열심히 치운다고 치워도 전 같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장비를 옮기다가 벗겨진 벽지라든가 바닥, 깨진 형광등, 각종 마스킹 테이프가 붙었다가 떨어진 자국. 정원은 승완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면서도 이렇게 끝도 없이 산부인과를 돌아야 하는 처지가 괴롭기도 했다.

승완아.
네. 고생했다.
아니에요.

승완은 필요한 말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 가장 필요한 인재. 정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산부인과 문 앞에 섰다. 산부인과는 5층 건물의 2층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누르세요. 자동문 버튼에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정원은 아무래도 누르고 싶지 않았다. 누가누가 더 아쉬운 표정으로 아쉬운 소리를 잘 하나. 섭외란 그런 것이다. 그게 삼촌이 하는 병원이라도 쉽지는 않겠지.

초진이세요?
아뇨. 저 어제 학생 영화 촬영으로 전화 드렸는데요.
아아. 잠시만요. 원장님이 지금 진료 중이셔서.

간호사는 진료가 언제 끝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정원은 알아서 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현수가 같이 가준다고 했을 때 그러자고 할 걸 그랬나. 아니지. 그럼 두 사람이 지루한 거니까 두 배로 지루한 거지.

근데. 승완이가 마녀라는 건 무슨 말이야.

정원은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던 현수에게 그렇게 물었다.

말 그대로 마녀라는 말인데요.
말이야 방구야.
방구라니요.

현수가 깔깔 웃었다. 그만 웃어 너야말로 깔깔마녀다. 정원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왔다.

그러니까 승완이 마녀란 말이지. 정원은 산부인과 대기석에 앉아 승완에 대해서 생각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약간은 통통한 체격, 개털처럼 푸석푸석한 탈색모. 마녀도 탈색을 하나? 그건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 산부인과가 중요했다. 성진의 영화 촬영까지는 이제 한 달 정도가 남았다. 얼른 로케이션 확정이 나야 일정도 짜고 콘티도 짜고 테스트 촬영도 하고 리허설도 하고. 아무튼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승완이 마녀인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쯤 되면 그냥 아무 병원이나 섭외해서 자궁 모형이나 그림을 좀 사서 붙이는 게 어떨까.

너 그것도 살 거야? 굴욕 의자? 그럴 수 있어?
없지.
근데 왜 그런 소릴 하냐고.
미안하다.

승완이 뽑아온 산부인과 리스트를 각 10군데씩, 제작부와 연출부가 힘을 합쳐 열심히 돌았으나 최종적으로 섭외에 응한 곳은 없었다. 아직. 성진은 아직 없는 것이지 앞으로도 없을 건 아니라는 점을 매번 강조했다. 정원은 그 사이 사과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연출의 일이란 모름지기 연출의 정신건강을 돌보는 동시에 연출에게 볶이는 스탭들의 마음 살피기. 정원도 이제 졸업반이다. 한두 번 해보는 일도 아니다. 이쯤 되니 사과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냐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정원아.
응. 너 보니까 좋다. 요즘 계속 배우들만 만났더니 얼굴 근육이 굳는 것 같애.
연기가 거지같니?
그냥 사람 만나는 게 거지같지.

오랜만에 대면 회의였다. 정원도 성진도, 승완도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승완의 수업이 끝나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정원과 성진은 먼저 학교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난 사람이 아닌가?
개소리야.
승완이는 마녀래.
아. 그렇다더라.

뭐야. 정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원 빼고는 모두가 승완이 마녀인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성진은 초콜릿 라떼를 두 잔째 들이키는 중이었다. 너 그러다 당뇨 걸린다. 정원은 성진이 들은 채도 안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얘기했다. 성진은 그저 허허 웃었다. 정원이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줄줄 흘러내릴 즈음이 되어서야 승완이 카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성진은 잘 훈련된 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에 섰다.

뭐 먹을래?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그래.

캐스팅은 대부분 확정이 난 상태였고 주연 하나만 두 명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성진은 어딘가 비슷하고 또 어딘가 다른 두 배우를 두고 감상인지 평가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이미지는 이쪽이 나은데 연기가 이쪽이 좀 더 좋았어. 영화는 이미지야. 그건 그런데 이쪽이 나쁜 것도 아니니까. 하긴. 회의는 온라인으로 하던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양새로 흘러갔다. 조금 지겹다, 고 정원이 생각할 즈음 승완이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응. 너는?
삼촌한테 전화 한 번 해볼게요.

아. 그래. 성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은 테이블 밑으로 성진이 제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걸 느꼈다. 드디어. 소매가 당겨진 텐션은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기대감과 불안감. 왜 둘은 떨어질 수 없을까. 정원은 그저 성진의 손을 같이 붙들어주었다. 말고는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승완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창문 밖으로 승완의 뒷모습과 그 위로 폴폴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보였다. 성진은 미동도 없이 승완의 뒷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다 창문도 뚫을 수 있겠다. 정원은 오래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아니고 단역이었는데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꾸준히 파인애플을 노려보더니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결국 파인애플이 폭발했다. 그 사이 승완이 고개를 돌렸다. 담배를 쥔 손이 애매하게 오케이 사인을 만든 것 같기도 했다.

된대요.
된대?
네.
야. 고맙다. 너 케이크도 먹을래?

성진은 승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정원에게 제 카드를 쥐어주었다. 정원은 카운터 앞에 서서 어떤 케이크를 시켜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뭐 그냥 무난하게 초코. 두 조각까지 필요하진 않겠지. 정원은 케이크 한 조각에 포크만 총 세 개를 받았다. 어차피 이 케이크는 먹는 것보단 감사의 의미니까 양은 별반 문제가 안 될 것이다.

근데 병원이 어디라고?
여수요.
너 여수 사람이야?
서울 사람이요.
아.
좀 멀죠.
케이크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좀이 아니라 많이 멀지.

성진이 중얼거렸다. 정원은 며칠 전의 현수처럼 깔깔 웃음을 터뜨릴 뻔 했으나 겨우 참았다.



게장이 맛있네.
네.
많이 먹어라.
네.

정원은 어제 잠깐 성진의 자취방에 갔다. 성진은 승완이가 차비 자기 돈으로 낸다더라고, 대신 맛있는 거 먹여라, 하고 정원에게 제 카드를 맡겼다.

게장 먹어야겠네.
정원의 말에 성진은 잠깐 뜸을 들였다.
거기 산부인과 좋으면 게장 먹어.
안 좋으면?
뭐 아무거나 먹어.

승완이 소개한 산부인과는 근사했다. 외관이 번쩍번쩍 근사한 건 아니고, 성진의 영화와 아주 잘 어울려서 근사했다. 그냥 딱 동네 병원 느낌이었음 좋겠어. 성진의 바람은 그 정도였는데 그거야 동네마다 천차만별 아니겠느냐고, 토를 달 수도 있겠지만 느낌이란 말 그대로 그냥 느낌이었다. 사실이 아니라.

정원은 산부인과 건물 1층의 약국에서 박카스를 한 박스 샀다. 저희 삼촌 박카스 드시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승완이 그렇게 얘기했지만 정원은 이것이 마음, 이라고 대꾸했다. 마음이요? 승완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승완의 삼촌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박카스를 받아들었다. 성진은 정원이 찍어 보낸 산부인과 내부 사진을 보자마자 게장 드쇼, 하고 답장을 보냈다. 승완은 여수에서 제일 맛있다는 게장집으로 정원을 데려갔다. 추천인은 승완이 아니라 승완의 삼촌이었다.

나 여수 처음 와 봐.

정원이 말했다. 승완은 제 밥공기에 게살을 짜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장범준 노래 나오고 다들 한번쯤은 와 봤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 노래는 좋아해.
그렇구나.

게장을 먹는 동안에도 성진에게서 끊임없이 카톡이 오고 있었다. 정원은 게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성진이 쏟아내는 이후 스케줄에 대해 같이 논의했다. 나는 다음 주에 촬감이랑 같이 가야겠다. 그래. 리허설은 다 서울에서 하고. 그럼 내가 세미나실 잡아 놓을게 배우님들이랑 스케줄 맞춰서. 오키 고마워. 승완은 정원이 핸드폰만 쥐고 있는 모양을 잠깐 쳐다보다가 게딱지에 비빈 밥을 정원 앞에 내밀었다.

언니.
어 승완아. 편하게 먹어.
저는 편한데요. 먹으면서 해요.

게장은 양념과 간장을 가릴 것 없이 맛있었다. 정원은 승완의 몫까지 총 2인분 7만 원을 성진의 카드로 결제했다. 뒤풀이는 여기서 하면 안 되겠다. 정원이 중얼거렸다. 승완은 이미 가게 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정원은 문득 승완과 제가 여수에서 같이 게장을 먹었다는 사실이 우스워졌다. 하긴 이건 여행이 아니라 로케이션 헌팅이니까. 성진이 게장 가격을 보고 까무러치지만 않으면 됐다.

다시 여수엑스포역까지 가는 길에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정원은 승완에게, 삼촌께는 꼭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하고 얘기했다. 승완은 네, 하고 말았다. 참 대답이 짧다. 그래서 좋다. 정원이 혼자 생각하는 동안 버스가 왔다. 자리는 널널했다. 승완이 먼저 버스 뒷바퀴 쪽 2인석 창가에 앉았다. 정원은 당연히 그 옆에 앉았다. 도로 포장이 많이 벗겨졌는지 버스가 자주 덜컹거렸다.

언니.
응.
근데 그 노랜 왜 좋아해요?

승완이 물었다. 창문에 기댄 승완의 머리통이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통통 튀었다.

무슨 노래?
여수 밤바다.
넌 싫어해?
아뇨. 사랑 노래 좋아해요.
그래. 나도 그게 사랑 노래라서 좋아해.

야 근데 좀 아프지 않니. 정원은 승완의 어깨 뒤로 팔을 뻗어서 승완의 머리통과 버스 창문 사이로 물티슈 한 봉지를 끼웠다. 오늘 아침에 현수가 가방에 넣어준 20매짜리 휴대용 물티슈였다. 챙기면 다 쓸 데가 생겨요. 현수는 동네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나눠주는 것들 중에 물티슈가 제일 실용적이라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니는 그런 노래 안 좋아할 것 같았어요.
그런 노래가 어떤 노랜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흐흐. 승완이 웃었다. 정원은 승완이 그렇게 맹하니 웃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잠시 멍했다. 하기사. 승완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쓸 데가 있더라. 진짜.

정원은 여수에서 돌아와 하루는 기절하듯 잤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현수가 비비큐 치킨을 시켜 먹고 있었다. 현수가 정원의 집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 정원은 비비큐 치킨만 먹었다. 죄다 현수가 시킨 거였다. 황금올리브가 후라이드의 근본이거든요. 현수는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했다.

물티슈 썼어요?
응. 승완이 줬어.
아 승완이.

현수가 킬킬 웃었다. 승완이 진짜 웃겨요. 정원은 현수의 말을, 언제나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잠자코 치킨을 먹었다. 후라이드의 근본이라. 아무렴 맛만 있으면 된 거 아닌지. 근본까지 따질 일인가 치킨에.

한번은 승완이네 집에서 잤어요. 근데 창문 앞에 촛대랑 마법진 같은 게 있는 거야. 이게 뭐냐. 그랬더니 자기가 마녀래요. 너 그럼 마법도 써? 물약도 만들어? 그랬더니 그런 건 함부로 못 한대요.

정원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뼈와 껍질을 입 안에서 발라내기 위해 애썼다. 그냥 먹어도 죽진 않을 텐데 왜 이러고 있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서는 그냥 삼켰다. 여전히 맛은 좋았다.

무슨 마녀가 그래.
언니가 생각하는 마녀는 어떤데요.
그건 나도 모르지.

현수는 정원이 말하지 않아도 때때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워놓거나 다 떨어진 생필품 따위를 보충했다. 이를테면 설거지용 세제, 바디 워시, 키친타올, 화장지, 샴푸, 머리끈. 수건이 다 제각각이라며 새 수건을 한 박스 사온 날도 있었다. 호텔에나 들어갈 것 같은 40수의 도톰한 것으로. 수건이 물만 잘 닦이면 됐지 깔맞춤까지 필요할 일인가. 그래도 정원은 그것이 현수의 마음이겠거니 했다. 오늘의 치킨도 그렇다.

현수야.
네.
맛있게 먹어.

정원은 진심으로 현수가 제 집에서 편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혼자 살아 좋은 점이 있다면 현수처럼 갈 곳 없는 후배를 언제든 재워줄 수 있다는 점. 승완도 그런 마음으로 현수를 재워 줬을까. 하긴 뭐 현수는 별 일이 있든 없든 남의 집에서 잘 자니까.

제가 산 건데 무슨.
하여간 꼭 그렇게 말을 얹어.
그게 저니까.
하긴.


정원은 태어나 두 번째로 여수에 왔다. 이번엔 모든 스탭들과 함께. 역시 여행이 목적은 아니었고 타이트하게 짜둔 촬영 스케줄로 며칠 내내 바빴다. 당연히 그동안 게장은 한 번도 안 먹었다. 아니 못 먹었다. 성진은 대충 세어도 열다섯이 넘는 스탭부터 배우까지 전부 게장을 사줄 만큼 형편이 넉넉한 연출은 아니었다. 내가 넉넉하면 영화를 했겠냐? 성진은 자주 그렇게 물었다. 정원은 그게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항상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언니.

정원의 오른쪽에 누워있던 승완이 속삭였다. 스탭들은 민박인지 펜션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숙소에서 사흘 밤을 같이 보냈다. 애매한 크기의 부엌 겸 거실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방 두 개가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잠은 대충 성별만 나눠서 잤다.

왜.
오늘 보름달 떠요.
그게 왜.
달빛 받으면서 목욕하면 마음이 정화가 되거든요.

승완이 손가락을 뻗어서 정원 왼쪽에 누워있는 성진을 가리켰다. 정원은 성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뭐야.
목욕하자.
목욕?
너 오늘 배우한테 욕 뒤지게 얻어먹었잖아.
아 그 얘기 하지 마.

조심히 따라오세요. 승완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도, 성진도 승완을 따라 일어섰다. 아무렇게나 뒤엉켜 자는 스탭들을 피해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꽤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해냈다.

참 나. 여수까지 와서 밤바다가 아니라 밤목욕이야.
성진이 툴툴거렸다. 승완은 그러거나 말거나 미리 알아봤다는 찜질방을 향해서 잘만 걷고 있었다.

밤바다 많은데 여기. 밤바다포차 밤바다김밥 밤바다카페 밤바다노래방.
우리 가는 데도 설마 밤바다찜질방이냐.
아뇨. 보석사우나요.

듣긴 다 듣는구나. 성진이 중얼거렸다. 정원은 그래도 승완이 아니었음 우리가 언제 여수까지 와서 목욕을 하겠느냐고 대꾸했다.

목욕을 해야 되니?
정화가 된다잖아.
다음엔 언니 집도 정화해드릴게요.
그런 게 돼?
네.
좋네. 그럼 우리 집도 해주라.
좋아요.

승완이 반짝거리는 초록색 간판 앞에서 멈춰섰다. 보석사우나. 보석이 에메랄든가. 정원은 성진이 내뱉는 농담은 무시한 채로 카운터에서 세 명 치 찜질방 비를 계산했다. 찜질방은 밖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넓었다. 무엇보다 온탕을 둘러 있는 통창 너머로 중정이 보이는 게 좋았다. 중정에 심긴 나무는 가느다란 대나무였다. 정원과 성진, 승완은 나란히 온탕에 들어가 앉았다. 새벽의 찜질방에는 잠을 자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목욕을 하는 사람은 적었다.

저 나무 진짜일까.
성진이 물었다.
글쎄.
정원이 대답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명상하세요.

승완이 덧붙였다. 셋은 승완의 말대로, 통창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이따금씩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이런 게 마녀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 안 잤네.

집이 깨끗했다. 정원은 현수가 깰까 봐 조심조심 현관문을 열었는데 예상과는 다른 풍경에 조금 놀랐다. 정원이 촬영으로 집을 비운 사이 현수는 남자친구와 화해했다. 정원은 마지막 촬영 날 점심을 먹다가 현수에게 카톡을 받았다. 언니 저 드디어 가요. 드디어. 정원은 그 단어가 어색했다. 정원은 현수가 나가기를 기다린 적 없다. 그래도 축하한다고 답장은 했다. 이게 축하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평생 알 수 없겠지만 그거야말로 현수의 마음일 것이다.

언니 오면 보고 나가려고 기다렸어요.
현수가 흐흐 웃었다. 정원은 신발을 벗으면서 다시 한 번 집안을 훑었다. 현수가 처음 눌러앉던 날에 들고 온 가방은 빵빵해진 채로 책상 옆에 기대어져 있었다.
오늘은 늦었는데. 내일 가지.
좋아요.
떡볶이 먹을래?
좋죠.

현수가 핸드폰을 들었다. 정원은 이번만큼은 현수가 계산하게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현수의 마음이 있다면 정원의 마음도 있는 것이다. 정원은 현수의 핸드폰을 빼앗아 식탁 위에 엎어두었다. 왜요. 오늘은 내가 살게. 왜요. 작별 인사다.

시시하네.
현수가 중얼거렸다.
시시하긴 뭐가 시시해.
작별 인사로 떡볶이는 좀 시시하죠.
그럼 뭐가 안 시시한데.

현수는 대답 대신 유튜브로 음악을 틀었다. 쳇 베이커의 사랑노래 플레이 리스트. 정원은 음악이 너무 잔잔하고 또 보드라워서 놀랐다.

이런 걸 듣네.
이런 거요?
사랑 노래.
좋잖아요.
좋긴 하지.

야 근데 쳇 베이커처럼 살려고 그러면 안 된다 아무리 우리가 예대생이라지만. 정원이 덧붙인 말에 현수가 깔깔 웃었다.

언니 저는 시시한 게 좋아요.
좋다고.
네.

플레이 리스트의 음악이 두 곡 쯤 남았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정원이 떡볶이를 들고 들어오는 동안 현수가 식탁 위에다 수저와 앞접시를 각각 세팅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쿠키나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시킬 수는 없겠구나. 몹시 평소와 같으면서도 또 몹시 평소와 다른 날. 정원은 언제 또 엽기떡볶이를 가장 매운 단계로 먹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정원의 주변에 현수만큼 매운 걸 잘 먹는 사람은 없었다. 성진과 먹는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양보해서 2단계를 먹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정원이 그동안 현수를 제 집에서 재워준 것은 현수가 매운 걸 잘 먹기 때문만은 아니다.

야 현수야.
네 언니.
그래도 맞고 다니지는 마라.

현수는 내일 아침 정원의 집을 떠난다. 늘 그래왔듯 정원은 학교에 가는 날마다 현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연기과 애들은 딱히 수업이 없는 날에도 연습실에 들어앉아 있는 게 일상이니까. 그런 평범한 것이 좋다, 고 정원은 생각했다.

알겠어요.
진짜 그러지 말라구.
진짜 알겠어요.

거대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떡볶이는 여전히 뜨겁고 매웠다. 정원과 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먹었다.



성진이 밥을 샀다. 학교 근처에서 제일 비싸다고 소문난 파스타집이었다. 승완은 오늘도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오느라 10분 정도 늦었다. 성진은 촬영을 다 끝내고도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였다. 교수님이 가편집이라도 들고 오래서 어제 밤 샜잖아. 정원은 성진의 하소연을 듣느라 파스타가 나오기도 전에 피클을 한 접시 다 비웠다. 좋은 게 많으니까 싫은 것도 많은 거지. 정원은 말로만 죽겠다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이를테면 열심히 사느라 죽을 지경인 사람들. 정원은 성진이 손도 안 댄 식전 빵을 가져다가 대신 먹었다.

너라도 잘 먹으니 좋다.
좋냐.
어.

파스타가 한두 접시 나오는 사이 승완이 도착했다. 승완은 명란 엔쵸비 파스타를 먹겠다고 미리 카톡으로 얘기해뒀다. 여수 사람이라 그런가 해산물을 좋아하나봐. 성진이 그렇게 중얼거리기에 정원은 서울 사람이랬잖아, 하고 정정해주었다. 나야말로 부산 사람이다. 정원의 말에는 성진이 화들짝 놀랐다. 너 부산 사람이야? 어. 근데 사투리 안 쓰네. 다섯 살 때 서울로 이사 왔어. 뭐야 그럼 서울 사람이지. 그사이 승완은 콜라를 시켜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성진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콜라를 세 잔 시켰다. 난 콜라 안 좋아하는데. 정원은 그렇게 얘기하려다 말았다. 성진이 사준 콜라. 말하자면 기분이다.

언니.
응?
언니도 내년에 제 영화 꼭 도와주셔야 돼요.

승완도 내년이면 처음으로 단편영화를 찍을 것이다. 정원은 승완이 찍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마녀가 나오려나.

막상 졸업하면 잠수 타는 선배들 많다던데.
그건 맞지.
성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난 안 그럴게.

정원은 이만큼 확실한 대답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난 그런 시시한 인간들과는 다르다. 성진은 그런 말도 덧붙였다. 그런 시시한 인간들이 누구길래. 정원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잊었다. 파스타가 맛있어서. 정원이 시킨 시금치 아라비아따는 메뉴판에 맵기를 표시하는 불 모양 스티커가 세 개나 붙어있었다.

맛있다 파스타.
그럼. 맛있는 거 사줘야지 고생했는데.

성진은 시켜놓은 바질 크림 뇨끼를 한 입도 안 먹고 두더니 편집자를 만나야 한다며 훌쩍 가버렸다. 정원과 승완은 함께 여수도 다녀왔고 게장도 먹었으며 사흘 밤을 곁에 누워 자다가 목욕탕에 가서 명상까지 했다. 비싼 파스타집에 둘만 남아 밥을 먹는 게 그리 유별날 일도 아니다. 정원은 승완의 콜라 잔에 제 콜라까지 마저 부어주었다.

승완아.
네.
보름달이 또 언제 뜨지?
다음 주 화요일이요. 목욕하시게요?
응.
좋죠 목욕.
그렇더라.

정원과 승완은 성진이 남기고 간 바질 크림 뇨끼까지 모두 나눠 먹었다. 승완이 마지막 남은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정원은 욕실 창문을 반쯤 열었다. 달은 방충망과 방범창을 두 개나 사이에 두고 떠있었다. 저게 보름달이 맞나.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아마도 저것이 보름달일 것이다. 승완의 말이 맞다면. 그리고 그 말이 맞겠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 온도는 적당히 뜨거웠다. 아무렴 욕조가 없더라도 달빛을 받으면서 씻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정화. 정원은 그 단어를 오래 곱씹으면서 샤워를 했다. 현수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사둔 바디 워시에서는 따뜻하고 무거운 냄새가 났다.

난 이런 냄새 맡으면 더워.
머스크 향이요?
그래 머스크 향.
그냥 지금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겨울에도 더워.
아하.

그날 현수는 정원이 느끼는 더위를 알 것 같다고 했다. 알 것 같다. 그리고 정원은 지금 이 시간이, 아무튼 정화가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뜨뜻미지근하게. 저 달은 진짜 보름달이고 이 샤워는 진짜 정화.

대부분의 시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집에는 이제 정원 혼자 남아있다. 욕실 안에는 쳇 베이커의 사랑노래 플레이리스트가 천천히 흐른다. 정원은 그대로 눈을 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시하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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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맥카시의 동명 소설에서 빌려온 제목으로, 본 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함.

추천사

우리가 이야기에 기대하는 것은 많은 경우 ‘탈출’이다. 이 지루하고 의미 없고 졸렬한 허접쓰레기 같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 일상의 궤도를 ‘파열’ 시키거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궤도를 ‘이탈’시켜 색다른 흥분과 감각을 맛보게 해주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에 의미심장한 무엇인가를 덧칠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러한 이탈, 파열, 사건, 탈출의 종합선물세트는 그러나 우리가 살아낸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순간들을 너무 간단히 얕잡아보고 내팽개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일상 안에 이미 잠복해서 우글거리고 있는 여리고 희미한 힘들까지도 함부로 치워버리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그 안으로 충분히 뛰어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도대체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내팽개칠 수 있는 거기에다 타인의 삶을 모욕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찾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탈출하는 이야기를 찾는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정치인들의 슬로건, 지적 담론의 유행 그리고 물론 소설도 그런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최예솔의 「모두 다 예쁜 말들」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소설이 시시한 것이리라. 그러나 시시한 일상을 충전하고 있는, 각자의 사정과 저마다의 마음과 그것들의 미세한 편차와 어긋남과 얼크러짐 등이 무심한 듯 애틋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들려주는 일상적인 것들은 더 이상 시시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서로에게서 읽어낸 것과 함부로 읽어내지 않기로 한 것 등을 따라 읽다보면, 이 네 사람이 저마다 매순간 온 마음으로 그 자신으로 살아가며 각자의 문제를 안고서 주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얽혀들어 간다는 소박한 진실이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시시한 것이 결코 시시하지 않도록 해주는 최예솔의 내러티브가, 탈출하는 이야기가 판을 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각별히 귀하다. 권희철(문학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서사창작전공 교수)

‘K-Arts Work’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매거진 <K-Arts> 창간 11주년을 맞아 본교 재학·졸업생을 대상으로 자유로운 작품 원고를 공모하고, 심사를 통해 선정된 작품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45호(2023년 봄호)부터 신설된 코너입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작품 투고가 매거진의 지면을 빛내 줄 것이라 기대하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