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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촉의 시대에 무한의 촉으로

촉(燭)은 빛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1촉은 양초 하나가 빛을 내는 정도의 밝기인 것이다. 오래전 처음으로 5촉짜리 등불을 밝히던 사람들은 양초 다섯 자루의 밝기에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현대인들은 30촉짜리, 50촉짜리 전구를 쓴다. 밤이면 방마다 환하게 불을 밝힌다. 버튼 하나로 순식간에 어둠을 불러들였다 추방한다. 손쉽게 빛과 어둠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밝은 전구로 집안을 밝혀도 내 마음의 불 하나 켜지 못할 때가 있다.

인간은 언제 글을 쓰는가. 마음의 불을 1촉도 켜지 못할 때 인간은 펜을 들고 날카로운 촉으로 어둠 속을 밝혀 보려 애쓰는 것이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손과 발과 눈과 귀를 움직여 겨우 더듬어 나아가는 자가 글 쓰는 자다. 글쓰기는 자신과 타인에게 보내는 생존 신호이자 생활반응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집안에서만 지낼 때가 많았다. 2년 동안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수업도, 회의도, 친구들과의 술자리마저도 화면을 통해 이루어졌다. 함께이지만 혼자이고 혼자지만 함께라는 기분이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엔 일상이 되어 익숙해졌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내내 어딘가 비어있는 기분이었다.

비대면의 기간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혼자일 때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리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불안의 징후를 나누었다. 전염병, 기후 위기, 녹아가는 빙하와 꺼지지 않는 산불, 전쟁과 인종 차별, 소외된 모든 이들과 동물들의 죽음 등의 문제가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재에 국한된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래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팬데믹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일론 머스크가 우리를 화성에 데려다 줄 것으로 기대했다. 나를 미래로 데려다 줄 이들이 과학자들인 줄 알았다. 이제는 미래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여전히 쓰레기산이 높이 쌓여가고 무고한 이들이 죽어갈 것이며 인간은 여전히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한계와 질병과 기후 위기 앞에 놓여있을 것이다. 미래가 우리들의 꿈처럼 아름다울 리 없다.

인간은 언제 글을 쓰는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나는 촉을 든 자들이 우리 교실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인간은 펜을 들고 고군분투한다. 펜을 들고 미래와 투쟁한다. 병이 전염될까봐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을 만나서 전염되어야만 가능한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쁨과 슬픔이, 분노와 위로가, 우울과 절망이 그리고 희망과 용기가 전염된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혹은 죽은 이후에도. 일기장과 책장을 넘어 한 사람의 가슴에서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오늘 우리가 나눈 생각과 말과 글은 이미 미래에 가 있다.

인간은 언제 글을 쓰는가.

0촉의 시대를 통과하며 읽고 쓰는 자가 밝힐 빛의 세기와 온도를 나는 믿게 되었다. 김수영 시인처럼 나도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나의 촉은 자라서
어떤 숲이 될까?

어느 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 자그마한 티끌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날아와 흙과 만났다. 시간이 지나고 햇볕을 쬐고 비바람을 맞는 여러 과정을 통해 티끌은 흙에 덮이고, 흙을 비집고 ‘촉’이 솟아 나온다. ‘촉’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각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와 뾰족한 것을 나타내는 화살촉, 만년필의 촉 등을 연상하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촉’은 처음 돋아나는 어린잎이나 줄기를 의미하는 ‘싹’을 말하기도 한다. 오늘 이 글에서는 경남지역의 사투리인 ‘촉(싹)’의 의미로 풀어내 보려 한다. 나의 ‘촉’은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13년 대한민국 대학 국악제에서 제주 방언을 가사로 사용한 ‘비바리’라는 곡으로 입상을 하면서 처음 틔우게 되었다. 그때부터 <다올소리>라는 팀을 통해 각 지역의 민요들을 소재로 재해석하는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이후로 이러한 활동은 각 지역의 무속음악으로까지 이어져서 현재 <음악제작소WeMu>라는 팀 활동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이렇게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연은 늘 그래왔듯이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본인의 자리에서 차곡차곡 자양분을 쌓으며 자라는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우리의 작고 소중한 ‘촉’들이 땅속에 있을 때에는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스스로는 모른다. 조급해하지 않고 계속해서 햇볕을 쬐고 비와 바람을 맞으며 많은 경험들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다 보면 때가 되어 어느 순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다. ‘아! 나는 이런 꽃이었구나! 아! 나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이렇게 각자의 ‘촉’을 잘 키워내어 열매를 맺는 과정들을 통해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이 살아 숨 쉬는 나만의 숲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윌리엄 재스퍼슨은 ‘숲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에서 숲이 되기까지 거쳐 가는 세 가지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로는 ‘개척자 단계’이다. 나무가 처음으로 자라는 단계를 말한다. 그다음은 영양분이 많아지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다른 나무들이 자라는 단계인 ‘중간단계’이다. 마지막은 ‘극상 단계’라고 하는 숲이 안정되는 단계이다. 이 과정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과정처럼 먼 훗날 나의 숲이 만들어지는 것을 상상하며 지금도 ‘촉’들을 키워나가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 자그마한 티끌이 바람에 실려 날아온다. 시간이 지나고 이 티끌은 여러 과정을 통해 땅을 비집고 솟아 나와 ‘촉’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박주화의 ‘촉’은 곁에서 함께해주는 이들과 관심 분야, 그리고 혼자만의 고군분투하는 시간들을 통해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란 것들이 모여 숲이 될 것이며, 인고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 낸 이 숲은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나’라는 ‘촉’에서 시작되어 숲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여러분들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틔우게 될 ‘촉’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한 대학 시절을 보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촉’들이 만들어갈 모두의 숲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억지로 애쓰지 않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본인에게로 흘러 들어온 이야기들을 예술을 통해 곱게 정돈하여 여러분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최기쁨입니다. 이야기들을 정돈하는 데에는 안무와 무용, 시와 에세이, 가사와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매개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술가임과 동시에 본인은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 및 다양한 희귀난치성 질환들과 정신 장애들을 이겨내고 있는 장애인이자 환자입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병, CRPS 진단 이후 지팡이를 짚기 이전에 비해 무용수로서의 움직임은 한없이 한정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주저하거나 멈추지 않고, 이를 계기 삼아 현재의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을 리서치하고, 이외에도 다양한 예술 분야들을 통해 이야기들을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 본인은 삶과 예술 간의 경계를 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인을 가시화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본인은 예술 및 작업을 함에 있어 ‘억지로 애를 쓰는 행위’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애를 쓰는 행위’란, 예를 들어 본다면 지팡이를 짚어야 보행이 가능한 본인이, 이를 부정하고 지팡이를 짚지 않은 모습만을 보이려 억지로 애를 쓰는 행위 등을 뜻합니다.) ‘억지로 애를 쓰는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본인은 보이지 않는 길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 길이 보이는 순간, 그 순간이 언제인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인을 믿고 곧바로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촉’이 오지 않는 순간, ‘촉’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해 고뇌하고 어떻게든 ‘촉’을 발견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촉’이 오는 순간, 그 순간에 본인에게로 흘러온 ‘촉’을 놓치지 않고 모두 담아내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을 지향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나 원하는 순간마다 길이 보이고 ‘촉’이 온다면 좋겠습니다만 매번 본인이 원하는 순간에 길이 보이고 ‘촉’이 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압니다. 때문에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주저 없이 그 길을 나아가며 찾아온 ‘촉’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 언제나 준비를 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소요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본인의 옆자리의 작은 의자를 내어줄 수 있도록 의자를 마련해두고, 언제든 앉을 수 있도록 그 작은 의자를 비워두려고 한다는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때론 너무 깊은 고통으로 인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술을 통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표현하며, 공감하며 공감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단어들이 당신에게 흘러 들어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