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만드는 과정은 긴 여행과도 같다. 준비 기간이 기간이니만큼 타지에서 생활하는 ‘한 달 살이’ 와도 비슷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프로덕션에 참여하면 짧아도 두 달 이상 참여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세상에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 참여하는 기간 동안 개인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기보다 연극의 일부로서 연극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존재가 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는 매년 쟁쟁한 공연들이 만들어진다. 모든 공연은 한 학기 전에 미리 신청서를 받으며, 심사를 통과해야만 극장에 올라갈 수 있다. 심사를 통과한 공연들은 1년에 2회,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 열리는 ‘연극원 통합 오디션’에서 배우를 공개 모집한다. 4년간 연극원에서 갈고닦은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연극원의 공연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교수진이나 외부 기성 연출가들을 초대하여 만드는 ‘연극원 레퍼토리 공연’ 과 연출과 졸업 작품인 ‘연극원 스튜디오 공연’ 이다. 레퍼토리는 학기당 2개 작품이 만들어진다. 스튜디오의 경우 매년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학생 수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8개에서 15개 이상의 공연이 이루어진다. 즉 연극원에서는 대략적으로 매 주마다 새로운 공연이 상연되는 것이다. 모든 레퍼토리 공연은 오디션에 참가하며, 스튜디오 공연의 경우 선택적으로 참여한다. 이번 2023년 1학기에는 두 개의 레퍼토리 공연과 네 개의 스튜디오 공연이 통합 오디션을 열었다.
오디션은 연극원 지하 1층 실험무대에서 이루어졌다. 가변형의 객석을 접어 숨기고 연출자들이 앉을 책상을 두자 무대는 순식간에 오디션장으로 바뀌었다. 매주 공연이 열리는 곳인 만큼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새로운 대면의 공간이다. 오디션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어 한 시간에 7명의 배우들이 참가한다. 한 사람에게 배정된 시간은 10분 남짓. 배우들이 자신을 뽐내기에도, 연출가가 배우들을 알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 양측은 그야말로 촉을 세운 채 서로를 느껴야 한다.
연출가가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찾는다면 배우는 연출 소개서와 작품 계획서를 읽고 자신이 항해할 작품을 탐색하여 선택 지원한다. 오디션 지원은 강제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결이 맞는 공연이 없다면 굳이 지원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이는 연출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출가는 운명의 프로덕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숨죽인 준비를 거듭한 끝에 오디션을 연다. 그러니 연극원 오디션은 일을 함께할 동료라기보다 여행을 같이 꾸릴 동행자를 찾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짧은 시간 동안 동행자를 찾을 수 있을까? 레퍼토리 공연 <별무리>의 류주연 연출가에게 물어보았다. 류주연 연출가는 극단 백수광부의 창단 멤버에서부터 연극을 시작하여 현재는 극단 산수유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오디션을 통해 배우의 작품 분석력과 표현력을 보고자 했다고 답했다. <별무리> 오디션은 두 개의 지정 대사를 사전에 제시하고 배우들이 이를 각자 해석하여 연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흥미롭게도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저마다 달랐다. 동일한 상황, 동일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인물은 절박한가 하면 어떤 인물은 쾌활했다. 특히 <별무리>는 두 남녀가 평행우주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멀티버스’ 희곡이다. 류주연 연출가는 본디 2인극인 이 희곡을 8인극으로 각색하여 저마다 다른 모습의 롤랜드와 마리안을 연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대본과 캐릭터에 대한 자신만의 분석력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류주연 연출가는 즉석에서 새로운 디렉션을 주기도 했다.
“지금 롤랜드는 프러포즈를 하고 있죠. 프러포즈를 얼마나 준비했을까요? 1주일? 만약 6개월을 준비한 프러포즈라면 캐릭터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배우가 준비해 온 ‘롤랜드’ 를 감상한 뒤 그와 대비되는 방향의 해석도 제시하는 것. 1주일만에 준비한 프러포즈는 부족하고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6개월을 준비했다면? 캐릭터에게 더 많은 여유와 지금까지 쌓아 온 과거들 등의 새로운 맥락이 생긴다. 류주연 연출가는 이러한 오디션 과정을 통해 연출의 디렉션을 이해하고, 자신의 몸으로 실현하는 이해력과 순발력을 관찰하였다. 이 오디션만으로도 롤랜드와 마리안의 50가지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최종 선발된 8인의 배우들은 각자의 롤랜드와 마리안을 연기하며 다중 우주를 만들어나가는 행성이 된다.
이렇게 정석적인 연기를 보는 오디션이 있는가 하면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오디션도 있다. 레퍼토리 <혁명의 춤> 오디션이 그러했다. <혁명의 춤>은 1976년 뉴욕에서 초연된 실험극이며, 연극원 초대원장인 김우옥 연출가가 연출한다. <혁명의 춤>은 정해진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혁명과 관련된 여덟 개의 장면만이 존재하며, 공연에서는 그 장면들의 구성과 구조를 해체하여 보여준다. 김우옥 연출가는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연출가의 디렉션을 따르는 배우가 아니라 인물 구현과 상황 구축 등에서 배우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1인 창조자주의’ 를 지향한다. 따라서 오디션에도 지정 대사가 없다. 그래서 오디션 공고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오디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다. 이 작품에는 “그들 꺼야,”, “기다려!”같은 짧은 대사만 있다, 그것도 몇 개 되지 않는다. 오디션은 연기력을 보기 보다는 성실함을 갖추었는가, 연극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의지와 끈기를 갖추었는가,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신체를 갖추었는가 등을 확인하는 절차이다.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비연기전공생에게도 문을 열어 놓겠다. <혁명의 춤> 오디션 공고 중 발췌
기본적으로 연극원 통합 오디션은 예술사, 전문사 연기과 재학생들에게 열려 있지만 <혁명의 춤>의 경우 연출가의 판단으로 인해 전공 구분 없이 참여가 가능했다. 실제 오디션 역시 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움직임을, 누군가는 달리기를, 누군가는 면접을. 김우옥 연출가는 이를 보고 자신의 솔직한 감상과 질문들을 던졌다. 전문사 연기과 정화진 배우는 면접을 통해 이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는 연출가가 현장에서 참여자들을 보고 감각한 부분들을 질문해서 흥미로웠다는 소감을 전했다. 오디션에서 시원한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귀한 기회였다고. 정화진 배우는 누군가가 자신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연기하고 말하는 것은 항상 무섭다고 밝혔다. 여러 번 반복하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쉬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오디션은 즐거웠다고 한다. 평가를 받는다기보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전문사 스튜디오 <반려의 역사>는 오디션 모집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놓을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이라는 문구를 기재해두었다.
비즈니스적인 연극에서 탈피하여, 프로덕션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극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문구이다. 전문사 연출과에 재학중인 강보름 연출가는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이런 오디션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반려의 역사> 오디션은 딱딱한 면접보다는 부드러운 티타임에 가까웠다. <반려의 역사>는 연출가를 비롯한 퍼포머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의 몸을 매개로 관객들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며 진행되는 공연으로 상호작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강보름 연출가는 ‘반려’, ‘신체적/정신적 손상’과 ‘나이듦’에 대해 관객과 함께 고민해보는 시공간을 만들어보는 것이 공연의 목표라고 밝혔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혹은 반려하면서 몸이 다쳤던 순간, 마음이 다쳤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이것은 어떤 감각으로 내 몸에 남아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부단히 상처받기를 택하고 부딪혀온 사람들의 작고 사소하지만 조금은 위대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반려의 역사> 소개글 중 발췌
오디션은 이 주제를 보고 떠오른 자신의 이야기나 움직임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전문사 아동청소년극전공 김서희 배우는 이 공고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아동청소년극전공의 경우 연기과와 달리 스튜디오 참여가 졸업 필수 요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려의 역사>가 다루고 있는 고민들이 자신의 평소 고민들과 비슷하여 기꺼이 이 여행에 참여키로 한 것이다.
김서희 배우는 ‘노란 문’을 소재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노란 문은 연극원 강의실의 문을 뜻한다. 동경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문턱을 넘은 사람만 들어설 수 있는 것. 김서희 배우는 실제로 입학 전에 이 노란 문의 사진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만들어두었다. 그러나 막상 노란 문에 들어오고 나니 고민이 많아졌다. 문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 너머에는 더 많은 세상과 더 험난한 산들이 즐비했다.
김서희 배우는 예술사 시절 예술경영과에 재학했다. 이때 고된 경험들을 겪으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노란 문에 들어오고 나서도 여전히 노란 문밖의 세상은 존재하니까. 두 개를 양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이며, 삶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탱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은 배우의 손에 들린 노란 끈을 통해 스토리텔링 움직임으로 표현되었다. 단 5분, 처음 보는 낯선 이의 짧은 동작이었지만 그 5분을 통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의 김서희 배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응축된 나날들이 담겨 있었다. 그 외에도 신체 움직임을 준비한 참가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연출자와 대화하는 참가자 등 여타 오디션과 달리 ‘사람과 사람의 만남’ 에 가까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때로는 내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더 솔직한 말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반려의 역사> 오디션은 그런 신비함이 발현되는 현장이었다.
연극은 하나의 결과물을 무대 위에 발현시켜야 하는 공동 작업이다. 하지만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이행하는 분업과는 거리가 멀다. 연극은 과업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다듬어 바깥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므로. 이러한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서브 텍스트(subtext)이다. 서브 텍스트란 대사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맥락을 뜻한다. 감정, 상태, 발화자의 의도를 읽어내면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다. 오디션은 바로 이런 각자의 서브 텍스트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읽어낸 저마다의 감각이 합쳐지면 비로소 항해 준비는 완성된다.
그러니 ‘배우를 모집합니다’ 라는 오디션 공고의 서브 텍스트는 이렇게 읽힐 수 있다. ‘함께 항해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참고 문헌
<별무리>, <혁명의 춤>, <반려의 역사> 오디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