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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든 되어왔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제19회 방송영상과 졸업상영회
<챕터>

2023년 2월 제19회 방송영상과 졸업상영회 ‘챕터’가 열렸다. 이번 졸업상영회에서는 감독이 제작한 6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상영된 다큐멘터리를 각 감독들의 한마디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춘자 can be anyone” 이 문장은 〈퀸의 뜨개질〉에 등장하는 노래 ‘춘자’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 위에 직접 만든 드랙 복장을 한 한나가 춤을 추는 이미지가 겹친다. 올해 상영회는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이를 기반으로 행동하며 서로와 연대하는 작품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한편 한 존재를 기억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물음을 던지는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개인, 사회, 국가적 사안을 쫓으며 기록을 잇고 모아 소리 낼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로 스며든다. 이들은 각자의 허들을 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되어왔고, 다가오는 미래에 맞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려 한다. 앞으로 펼쳐낼 챕터를 기대한다.






<낯선 것들을 만나는 당신에게>
이지윤 / 다큐멘터리 / 10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브리지 워터 주립 수용소. 이곳은 〈티티컷 풍자극〉을 촬영한 장소이다. 프레데릭 와이즈먼. 그는 법학 교수이자 변호사로서 활동했던 배경을 가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낯선 것들을 만나는 당신에게〉는 그가 1960년대 중반부터 왜 다이렉트 시네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는지 그 변곡점을 연구한 과정의 일부이며, 그의 작품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 영상이다. 프레데릭 와이즈먼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이름으로 호명하듯이 이지윤 연구자는 그에게 ‘당신(You)’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나와 ‘그것들’일 때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너’로 호명했을 때에만 마주 볼 수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지윤 연구자의 한마디 “저의 영상 작품과 그것의 기반이 되는 논문 〈낯선 것들을 만나는 다큐멘터리 :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티티컷 풍자극 다시보기〉를 통해 와이즈먼의 다이렉트 시네마가 어떤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 마음을 들어주실래요?>
CAO THI HUONG(흐엉) / 다큐멘터리 / 25분

흐엉은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수학하러 온 학생이다. 어느 날 월남전을 취재했던 종군사진기자를 만난다. 베트남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던 중 미국군에 파병된 한국 군인이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흐엉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던 퐁니 퐁넛 마을에 찾아간다. 죽은 사람들의 출생 연도가 적힌 묘석 앞에서 흐엉은 눈물을 참을 수 없다. 학살 생존자는 그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많은 베트남 젊은이가 한국을 사랑해서 역사를 잊기로 선택했다”는 말을 듣게 된 흐엉은 이 영상으로써 모두에게 대답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이자 목소리로 귓가에 울리는 이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내 마음을 들어주실래요?”에서 ‘내 마음’은 영상 속 흐엉의 것이 되었다가 월남전 생존자의 것이 되기도 하며,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희생자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마음을 들을 수밖에 없으며 들어야만 한다.

CAO THI HUONG(흐엉) 감독의 한마디 “한국과 베트남이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동반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양국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픈 과거에는 인정하고 직면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봐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과거를 잊지 마세요!”

<크리스마스 선물>
권지현 / 다큐멘터리 / 35분

존재를 기억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현은 카메라를 들고 수현은 붓을 든다.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자매는 할머니가 살아있던 과거의 시간부터 할머니가 죽은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기록한다. 수현은 할머니를 그리고 수놓으며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기도 하고, 지현은 그런 수현에게 할머니의 영상과 사진을 건넨다. 밝은 한 낮, 천 위에 수놓아진 할머니는 빨랫줄에 걸려 바람에 나부낀다. 이후 열린 자매의 전시장에서는 영상 작품 속에서 할머니가 등장한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이 “보고 있으면 그리운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라는 감상을 남긴다. 이 문장처럼 〈크리스마스 선물〉은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과 그의 부재를 각자의 마음속에서 떠올리고 흩뜨리며 인사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권지현 감독의 한마디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잊지 못할 존재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모든 이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퀸의 뜨개질>
조한나 / 다큐멘터리 / 35분

“춘자 can be anyone”. ‘춘자’라는 곡 속에 있는 이 가사는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춘자는 어떤 사람이든지 될 수 있다니 우리는 살며시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기도 한다. 사실 춘자는 한나의 할머니이다. 그는 10살이 된 한나에게 신부수업으로 뜨개질을 가르친 인물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한나는 눈매를 어떻게 하면 남자답게 그릴지 고민한다. 〈퀸의 뜨개질〉에서 뜨개질은 모순적인 행위다. 한나에게는 신부수업이자, 하고 있으면 여성스럽다는 말을 듣는 이 행위를 통해 한나는 남성의 수염과 성기를 만들어 입는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만다라를 뜨개질하며 이야기하는데, 한나의 성장기는 2000년부터 기록한 비디오 테이프의 형태였다가 뜨개질로 만든 인형이 벌이는 인형극으로 대변된다. 그 안에는 여성에게 부여되는 외모적 편견으로 인한 상처와 동성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경험이 담겨있다. 만다라가 완성된 뒤 할머니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가 재생된다. 그리고 할머니와 한나가 외모와 성격, 재주마저 닮았다는 어머니의 음성이 겹친다. 춘자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존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갓 씻고 나온 아기 한나와 씻고 있는 성인 한나가 연달아 등장한다. 성인이 된 한나는 팔로 자기 가슴을 가렸다가 내리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어쩌면 맨몸으로 뛰어다니는 아기처럼 어떤 성별로도 구분되지 않은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여전히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한나는 노래한다. “춘자 can be anyone”

조한나 감독의 한마디 “<퀸의 뜨개질>을 통해 많은 관객분들이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것에서 해방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홈그라운드>
권아람 / 다큐멘터리 / 78분

막이 오른다. 거울 속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머리를 빗고 안경을 고르는 그를 따라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이름도 알 수 없으며 나이와 성별도 가늠하기 어렵다. 뒤이어 나오는 20여 년 전 비디오에서 앳된 그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윤김명우이며 명우 형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당시 막 레스보스의 지배인이 되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레스보스. 최초의 여성 동성애자라고 알려진 사포의 고향이자 한국 최초 레즈비언 바. 오늘날 명우는 여전히 레스보스에 있고 이곳에는 그의 생활과 삶의 부침, 그리고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동시에 이곳으로 여전히 사람들이 찾아온다. 레스보스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1970년대에는 샤넬 다방이 있었고, 2000년대 퀴어 청소년들은 신촌공원에서 모였으며 1990년대에는 레스보스에서 서로를 알아갔다. 〈홈그라운드〉는 이 장소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연대기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시간이 재연과 인터뷰이의 회상, 명우의 시선으로 다시 쓰인다. 이 연대기는 ‘한 인물’로 시작해 ‘그 시절의 레즈비언들’을 상기하고 레즈비언들의 ‘장소’를 호명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든 끝없이 존재할 서로의 미래를 그린다.

<My first funeral>
이은혜 / 다큐멘터리 / 38분

밝은 낮에 열리는, 열린 관이 놓인, 붉은 장미와 하얀 백합으로 장식된 장례식장. 은혜의 첫 번째 장례식은 한국 사회에서 으레 받아들여지는 가부장적 장례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나타난 조문객들이 관에 누운 은혜를 향해 ‘잘 살아보자’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는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관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은혜의 모습으로 이 한 편의 기록이 끝을 맺는다. 관 속에서 머리를 치켜들듯 그의 죽음은 주체적이다. 영상 속 은혜이자 현실의 이은혜 감독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부정하는 가족에서 벗어나 자기 가족을 직접 찾아 나선다. 나아가 친구이자 여성이며 레즈비언인 주변인들을 연결하고자 한다. 〈My first funeral〉은 장례식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남성중심적인 풍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직접 그 대안을 만들어 보인다. 우리가 자기 죽음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게 할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이은혜 감독의 한마디 “이 영화는 물로 시작해 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물 흐르듯 자유로운 삶을 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