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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경수

나를 움직인 질문들
김설진

올 초 유튜브에 공개된 엠넷 8부작 춤 다큐멘터리 <BORN TO 춤>의 첫 번째 에피소드 주인공은 김설진이다. 2014년 여름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9’에서 우승 상금 1억 원을 거머쥐기까지 보여준 모습이 대중에게 각인되고 9년이 흐르는 동안 더 다양한 무대가 그를 찾아왔다. 영화, 연극, OTT 드라마에 연기자로 등장해 경력을 쌓으면서도 안무가로서의 작업을 계속해왔다. 지난 3월 2일부터 4일까지 공연된 국립무용단 레퍼토리 <더 룸>은 그가 안무·연출을 맡은 최근작이다.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마주 보며 ‘일복이 많으시네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일복이라기보다는 인복이 많은 것 같아요.”

3월 13일 오후 2시 45분 김설진의 성내동 작업실 주소를 찾았을 때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건물 주위를 돌다 가운데 어린 왕자의 보아뱀 그림이 붙은 문 앞에 멈칫했다. 위에 그가 속한 창작집단 ‘무버(MOVER)’의 로고가 보였다. 선뜻 손잡이를 돌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보통의 문보다 길쭉하고 어깨가 부딪히는 상상이 들 정도로 너비가 좁은 검은색 문이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벽을 짚는데 검은 바탕에 그라피티 같은 그림이 가득했다. 지하 2층쯤 되어 보이는 계단 끝에서 하얀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사방으로 트인, 천장이 높은 공간을 보자 방금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느낌 때문인지 실제보다 훨씬 커 보였다. 춤 연습을 마친 동료들이 나갈 채비를 하며 그와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 틈을 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맨발로 대리석을 밟는 것처럼 한기가 끼쳤다. 이 냉골에서 춤을 추다니?

모두 나가고 촬영팀이 포즈를 부탁하자 천장에 고리처럼 달린 보라색 천을 그네처럼 잡고 부드럽게 올라탄다. 어느새 양손을 놓았는가 싶더니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셔터를 다 누를 때까지 기다린다. 몸을 풀 때 하는 동작 중 하나다. 연습실 4면 중 2면이 전면 거울인데 한쪽에 검은 블라인드 세 개가 내려와 있다. 거울을 왜가렸냐고물으니“제모습을보는게썩기분 좋지는 않던데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직접 벽을 부수어 만든 연습실

“여기는 원래 미싱 공장이었어요. 정신 건강이 안 좋을 때 한 보름 정도 혼자 벽을 부수고 직접 만든 공간이라 자세히 보면 되게 이상해요. 계단에 설치되어 있던 레일도 철거할 때 벽이 다 부서져서 시멘트도 발라보고 하얗게 칠해도 봤는데, 도무지 깨끗한 느낌이 안 들어서 아주머니한테 낙서 좀 해도 되냐고 물었죠. 계단 들어올 때 막 낙서가 되어 있는 게 그래서예요. 메인 입구는 따로 있는데 사람들이 다 저기로 다니는 걸 더 좋아하더라고요.”

내 몸은 어떻게느낄까

<BORN TO 춤>에는 그가 생활비를 벌려고 공사장에서 일했던 에피소드가 나온다. 왜 무용수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일을 했을까. “성향 차이인 것 같아요. 제가 손열음 씨랑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피아노를 옮길 일이 있었는데 막 직접 들려고 하더라고요. 피아니스트는 외과 의사가 수술할 때처럼 양손을 들고 다닐 줄 알았는데 아니네? 어느 날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왔길래 물어보니까 호박 썰다가 다쳤대요. ‘금방 나을 거예요.’하는데 저랑 성향이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해도 되는 일, 안 되는 일을 딱히 구분하지 않아도 동물적 감각이 그를 이끌어준다. 싫어하는 일을 하면 몸부터 반응하기 때문이다. 현기증은 기본이고 공황장애가 오는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기도 한다. “근데 좋아하는 일이면 며칠 밤을 새워도 피곤한 줄 모르겠어요. 극장 안에서도 그렇고, 연습실 안에서도 그렇고, 작업하는 동안은 시간이 약간 다르게 흘러요. 우리끼리 약속한 게 시간 개념인 거지 개인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은 좀 다른 느낌이에요.”

국립무용단 <더 룸(The Room)> ©국립극장

5년 만에 돌아온 국립무용단 레퍼토리 <더 룸>

<더 룸>(2018 초연, 2023 재연)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사는 8명의 인물이 단 한 개의 방을 공유하는 이야기이다. 올해 현장 공연을 놓쳤기 때문에 인터뷰를 마친 후 국립무용단에 2018년, 2023년 공연 영상을 요청했다. 무대에 올라간 공연을 2D 노트북 화면으로 축소시켜 보는 것은 그림자로 대상을 짐작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르지만 거의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무대의 아우라를 쉽게 걷어낼 수 있다는 점. 윤성철이 발가락만으로 양말을 벗으려 애쓸 때, 김은영이 구석구석을 청소기로 빨아들일 때, 김현숙이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을 때, 황용천의 전동 드라이버가 나사를 조일 때, 김미애가 환영처럼 거울에 나타나고 문지애가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을 때, 무작정 몰입하기보다 ‘이것은 춤보다 연극의 몸짓에 가까운걸?’하며 거리를 두고 감상할 수 있다. 반면 평범하고 하찮게 취급받던 몸짓으로 춤을 만들어 보이겠노라는 연출가의 확신은 더 강하게 다가온다.
처음 2018년 버전의 <더 룸>을 감상했을 때 즈비그 리브친스키의 루프 애니메이션 <탱고>(1981)를 떠올렸다. <탱고>에서 특정 행동 패턴만을 반복하게끔 설정된 인물들은 각자의 동선과 충돌하지 않고 방이 가득 찰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움직이는 것과 달리 <더 룸> 속 인물들은 간혹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간헐적인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다 같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상자에 공이 튀듯 예측이 어려운 몸짓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선이 겹칠 것 같다가도 비껴가는 순간에 느껴지는 긴장감이 묘미다.

화면으로 보기에도 올해는 5년 전에 비해 유머의 요소가 강해졌다. 공중 베드신처럼 느껴지는 박소영과 최호종의 부드러운 춤사위가 곧 최호종의 상상으로 판명되었을 때 마침 방문을 연 윤성철이 자녀의 자위행위를 목격한 아버지처럼 서류 가방을 털썩 떨어뜨리자 객석 곳곳에서 숨죽인 푸핫 소리가 새어 나온다. 김은영이 막춤을 추며 등장할 때는 이곳저곳에서 대놓고 웃음보가 터진다. 사실은 춤을 잘 추는데 괜히 막춤인 척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형화된 춤 선과 정형화된 막춤 선까지도 제거한 진짜 막춤인 것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더 룸>에서 춤은 연기와 한 몸이다.
벨기에 피핑 톰 무용단에 입단하고 1년 후 올린 공연 <반덴브란덴가 32번지>(2009)도 그랬다. 일상에서 겪은 소소한 순간을 무대 위에서 살려내는 데는 춤도 춤이지만 연기도 한몫했다. “반덴브란덴가 32번지는 제가 살던 곳 이름이에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집 앞 골목이었어요. 보통 때라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그날은 엄청 많이 내리는 거예요. 급하게 스포츠용품점에 들어가서 가장 싼 우산을 골랐어요. 3유로를 내고 밖에서 탁 펼쳤는데 그대로 확 뒤집어지더라고요. 사람들도 막 웃고 저도 당황해서 황급히 우산을 접는데 ‘이거 내일 연습 때 아이디어로 갖고 가야겠다’하는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아이디어의 압박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 순간에도 아이디어 생각으로 이어진 것일까. “압박은 아니었어요. 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들마저 ‘무대에서 하면 재밌겠다’로 바뀌어버린 거죠. 단원들이 보고 재밌겠다고 해줘서 우산을 활용한 다른 장면들도 만들었죠.” 채택된 아이디어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채택된 게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버려진 아이디어는 그의 한 100배쯤 돼요. 정말 거짓말 안 하고 100배 정도의 아이디어는 다 서랍 속에 있어요.”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피핑 톰 시절 관절을 바깥으로 격하게 꺾는 연습 영상을 본 것이 기억났다. 채택 여부에 일희일비했다면 그만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없었을 거였다.

<반덴브란덴가 32번지> ©피핑 톰 무용단

어떤 사람이랑 일하면 좋을까

2014년 ‘댄싱9’에 나올 때도 우승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가족이 그리워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곳에서 어떻게 기반을 마련할지도 생각해야 했다. “한국에 와서 춤추는 사람들과 최대한 교류를 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방송을 한 거죠. 거기 잘하는 사람들이 다 모이니까 배울 게 생기는 거잖아요. 떨어지더라도 거기서 커뮤니티가 생길 것이고 그 사람들과 계속 교류를 하면 다음 단계가 있을 것이고요. 그래서 ‘방송 끝나고 어떤 사람이랑 일하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속으로 혼자만의 오디션을 치렀죠.” 그때 본 김기수, 서일영이 김설진의 마음속 오디션을 통과했고, 예종에서 만난 선배 김봉수까지 합쳐 김설진을 예술감독으로 한 크리에이터그룹 무버(MOVER)가 탄생했다. 주축 멤버는 4인이지만 프로젝트마다 오디션을 통해 새 멤버를 구하기도 한다. 작년 가을과 겨울에는 5명의 새로운 멤버를 포함한 공연 <MERRY GO ROUND>가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올해 초 전석 매진으로 북미 초연을 했다. 비보잉만으로 1시간을 구성하는 흔치 않은 무대다. 거문고의 빠른 비트에 대사보다 강렬한 헤드스핀과 윈드밀이 가세하니 객석에서 쉴새 없이 환성이 나온다.
사람을 뽑을 때 먼저 “내가 같이하고 싶은 사람인가”를 본다. 이보다 더 복잡한 기준이 있을까. “춤 실력도 있어야 되고 인성도 돼야 하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죠. 아무리 잘해도 성격이 못 어울리면 안 되고, 또 성격만 좋다고 해서 세상에 성격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돈을 지불할 수는 없잖아요. 근데 지금 무버 멤버들도 각자 성향이 완전 달라요. 저는 계획 없이 이렇게 저렇게 막 해보는 스타일이고 기수는 말 한마디 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플랜을 세워놓고 얘기를 해야 되는 스타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영이, 그리고 하나에 굉장히 집착하는 봉수가 있고요.” 겉으로 보이는 잘 웃고 유한 모습과 달리 내면에 굉장히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사람을 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게 없다면 거짓말이고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아요. 그냥 만들려고 만든 게 아니라 이미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려서 거기에 차지 않으면 일단 안 들어오게 되는 느낌이죠. 우리 안에서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라고 얘기할 때가 있어요. ‘진짜 재밌어 이게?’”

저 사람을 가르친 사람은 누굴까

2003년 서울예술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故) 김기인 교수가 한예종 진학을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어느 날 과제로 <시점>(2002)이라는 공연을 보러 갔다가 무대 위 무용수에게 빠져들었다. ‘저 사람을 가르친 사람이 누굴까?’ 한번 호기심이 돌자 그가 있는 학교에서 배우고 싶어졌다. 무용원 창작과에 입학해 그때의 무용수 이주희를 가르친 안성수 교수를 만났다. 그는 ‘팬심’이라고 표현했지만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할 때 가장 큰 원동력이다. “학교 밖에 있을 때는 몰랐던 괜찮은 선배들이 있었어요. 1학년 때 ‘4학년에 누가 잘한다’, 또 ‘졸업한 선배 중에 누가 잘한다’하는 소리를 들으면 도서관에 가서 그 사람 관련 자료들을 다 찾아봐요. 보면서 ‘아,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구나’하는 거죠. 학교에서는 돈을 벌고 나온 느낌이에요. 장학금도 받았고, 졸업 작품 지원도 받았고, 대학원 수업도 다 청강했고, 도서관에서 음악 CD랑 책도 엄청 복사해오고. 학교 도서관에 어마어마한 재료들이 있거든요.”

학교에서 기억에 남은 순간 중에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민준호 연출과의 만남이 있다. 커피를 마시려고 자판기 앞에 서 있는데 같은 수업을 듣던 민준호가 다가오더니 계속 커피를 뽑으며 말을 걸더라는 것이다.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재미있게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 그 이야기가 <거울공주 평강이야기>(2004)라는 성공적인 데뷔작이 되어있었죠.” 그때의 인연을 이어 민준호 연출작 <뜨거운 여름>(2019)에서 첫 연극 출연을 했다. 작년 초부터 올해 초까지는 <그때도 오늘>(2022)의 주연 중 하나로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 “원래 <뜨거운 여름> 때 저한테 안무를 맡기려고 연습실에 찾아왔어요. 제가 ‘역할을 하나 주면 안무를 하겠다’고 했죠. 거기 다행히 춤추는 역할이 하나 있었고요. 처음에는 제가 호기심으로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건 아닌지 형이 고민을 좀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진지하게 이야기했죠.” 지난해 연극원 ‘극단 돌곶이’가 7년 만에 선보인 신작 <사랑의 형태>에 연출과 안무로 다시 만나기도 했다. “형이랑 할 때는 연출과 안무의 경계가 따로 없어요. 그래서 더 재밌게 노는 느낌이에요.”

<Return> ©MOVER

나는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고 자신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을 느낀 적은 없는지 궁금했다. 역시 바로 반문이 돌아온다. “영향받아서 내가 사라진다고요? 나라는 게 진짜 누군지 정말로 물어본적있나요?저도한참나는누구인지 고민했는데 저는 그거 같아요. 교집합이 저예요. 저를 스쳐간 모든 사람의 교집합이 저를 구성하고 있고, 제 자신이라는 것은 결국 껍데기밖에 없어요. 몸도 어제까지 살아온 영향으로 오늘의 몸이 생긴 거잖아요. ‘저것 때문에 내가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안 해본것같아요.애초에 까만색인데 다른 색깔좀 입힌다고 그게 또 까만색이 안되지가 않더라고요.

영상 엄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