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촉수가 있다. 이는 비정형의 형태로 존재한다. 오감으로만 압축할 수 없는 인간의 촉. 그 촉을 손끝으로, 활자로 표현해내는 문학인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목표로 할 신춘문예에서 2023년, 5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생 및 신입생 출신 작가가 세상에 자신의 촉을 드러냈다.
촉을 곤두세워 항시 개인과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발견해내는 사람들이 작가로서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선이다. 진실과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 예술가는 현실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 우리가 예술을 하는 것, 살아가는 것, 예술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저마다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들의 특별함을 하나로 정의하자면, 자신만의 진실을 문학으로써 정돈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춘문예의 신춘(新春)은 새로운 봄을 뜻한다. 이름처럼 새로운 연도의 첫 계절에 어울리는 새 시선들이 저마다의 작품들에 담겨 있다. 이 중 서울 소재 7개 신문사의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세계일보, 문화일보), 희곡 부문 전체 당선작 9개(동아일보, 서울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강원일보, 경상일보, 매일신문, 부산일보, 한국극작가협회)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의 수상작(동아일보 중편소설, 한국경제 장편소설)들의 경향성을 살펴보았다. 전반적인 감상은 ‘아, 음울하다!’. 상당수의 작품들은 돌이킬 수 없는 ‘삶의 무언가’를 감내하는 과정을 담았다. 예컨대 동아일보의 <녹>은 이주 여성의 현실과 유아 사망 사고를, 문화일보의 <낮에 접는 별>은 아버지가 한순간에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가 된 일을, 한국일보의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은 아들이 사망한 이후의 중년 부부 이야기를, 조선일보의 <쥐>는 해군 내에서 은폐된 죽음을 다루었다. 8편 가운데 무려 4편가량의 메인 플롯이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이 죽음을 마주하는 극중 인물들의 태도 역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모든 소설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명확한 해피엔딩이 없었다.
위 4편에서의 죽음은 모두 예고 없는 우발적 사고로 일어났다. 죽음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다. 인간과 죽음은 떨어질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의 ‘현실’이다. 허나 이 죽음에 대해 개인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각자의 ‘진실’이다. 각 소설에서 죽음이 기능하는 바와 상징하는 의미는 이런 ‘진실’의 측면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신춘문예 2관왕인 전지영 작가의 두 작품에서도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다른 양상을 갖는다.
“여기서는 말이야. 눈에 보이는 건 답이 아니야.”
전지영 작가는 예술사 무용원 예술경영과를 졸업했다. <쥐>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소설이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해군 관사 아파트 단지. 그 속에는 뒤틀린 서열이 존재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숨기는 사실도,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사람도, 아파트에 존재한다는 쥐도 실체를 결코 눈앞에 드러내지 않는다.
결국 드러난 진실은 은폐되었던 해군의 죽음이다. <쥐>에서의 죽음은 사회적 부조리, 계급 폭력의 실태를 드러낸다. 이 죽음은 발화되고 발견될 때 의미를 갖는다. 소설의 초반부터 암시되던 위계폭력이 죽음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인물들은 더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는 아슬아슬하게 억눌려 있던 금기에 대한 접근을 해제시킴으로써 억압된 삶을 해방시키는 의미도 갖는다.
“사람이 꼭 이유가 있어서 죽는 건 아니잖아.”
<쥐>의 죽음이 폭로됨으로써 의미를 갖는 반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 (이하 <난간>)의 죽음은 고이 파묻혀서 여운을 남긴다. 혜경과 윤석은 예순을 앞둔 부부다. 둘 사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다. 이는 둘째 아들이 못에 빠져 익사한 사건 때문이다.
부부는 차마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못한다. 가족관계는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간신히 유지된다. 인간과 인간의 교류라기보다 물리적으로 집을 나눠 써야만 하는 형식적 관계. 몇 살을 먹은들 아들의 죽음에 익숙해질까. 이들은 요령 없는 사람이라 요령 없는 삶을 산다. 소설에서는 치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혜경과 윤석이 함께한들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마주 앉아 졸아붙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는다.
<난간>의 결말은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있다. 죽음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그 삶이 별 볼 일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노은지 작가는 전문사 연극원 서사창작과 졸업생이다. 당선작들 중 가장 긴 분량의 작품인 만큼 전문이 따로 공개되지 않았으나 요약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현조의 남편은 결혼을 1주일 앞두고 사망한다. 현조는 카리브해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는 매번 남편의 죽음에 대해 다른 경위를 말하다 도훈이라는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행복한 날들을 지내던 도중 도훈은 고백한다. 현조 외의 다른 사람까지, 두 명을 동시에 사랑하노라고.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죽음과 방황이라는 소재는 앞서 소개한 당선작들과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 또한 현조는 홀로 떠나는 신혼여행을 통해 죽은 남편에 대한 새로운 애도 방식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찾은 새 사랑이 성공적이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처럼 당선작들은 죽음을 필연적으로 지나쳐야 하는 삶의 한 과정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머리를 제거할 수 없듯 한 번 겪은 죽음은 품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토록 현실적인 서사가 유달리 많은 이유로는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을 제외할 수 없을 것이다. 예고 없는 죽음은 질병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비대면의 시대가 열리고부터 이전까지의 삶들은 의미를 잃었다. 인간은 이전의 삶, 이전의 진실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와 회귀 본능이 강해졌다. 본디 인간은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할 때 환상을 찾는다. 허나 현실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재구축되는 사태를 지나오며 사람들은 잊고자 했던 현실을 더욱 또렷하게 보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전대미문의 사태는 우리에게 ‘과연 현실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대두시켰다. 이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레드볼>이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자가 진짜 세상이면 안 될 이유가 뭐야? 안 그래?”
김혜빈 작가는 영상원 영화과 예술사와 연극원 서사창작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레드볼>의 우영은 버추얼 휴먼인 ‘진이 Jin-E’를 만드는 애니메이터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모션을 위해 실제 배우 ‘수희’가 캐스팅된다.
키워드만 보면 앞선 작품들보다 환상적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본작은 ‘버추얼’ 보다는 ‘휴먼’ 에 집중한다. 가상현실 사회에서 진짜와 가짜는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으로 접근한다. 동굴 속에 갇힌 인간은 실제 물질이 아닌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진짜라고 착각한다.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이 바로 이데아다. 그렇다면 수희의 동작으로 만들어진 진이는 이데아일까, 아닐까? 어쩌면 두 존재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진이의 파일이 유출되고, 진이는 3D 애니메이션 포르노 사이트에서 배회한다.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대두되는 딥페이크나 리벤지 포르노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수희는 꿋꿋이 연기를 이어 나간다. 어쩌면 수희에게는 진짜와 가짜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 아닐까. 수희 그 자신이 진짜라면 그 자리는 다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므로.
‘진짜 나’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인간의 지대한 관심사다. 최근의 MBTI 열풍 역시 간편히 자신을 범주화하고 설명하며 특정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하지만 ‘나’는 끝없이 진동하는 존재다. 개인은 홀로 존재할 때, 타인들과 교류할 때, 시시각각 달라진다. 희곡 부문 당선작들은 이런 복잡다단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나 소설 부문 작품들의 대다수가 재현적이었던 것과 달리 희곡은 보다 표현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제 나의 임무는 이 문 바깥에 직접 부딪히는 겁니다.”
이민선 작가는 연극원 극작과 예술사 졸업생이다. <은수의 세상>은 은수가 자신의 집과 내면에 대해 설명하는 독백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다. 독자는 은수의 독백을 듣는 것만으로도 은수의 세상에 초대받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갇힌 세계에 사는 은수는 문을 열고자 한다. 허나 아주 작은 일로도 은수의 결심은 쉽사리 흔들린다. 그럼에도 은수는 결국 타인을 방 안으로 받아들이고, 방에서 나가 이사를 가기로 한다. 이때 은수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래도 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은 누구나 정착할 수 있는 현실을 꿈꾼다. 절대적인 낙원과 시들지 않는 목초지를. 그러나 우리는 유목민이다. 영원한 낙원은 존재하기 어려우며,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대도 언제든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은 떨칠 수 없다. 그러니 부유와 유랑을 즐기며 다음 집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마치 은수처럼.
“인생은 불확실성이라는 지반 위에 지어지는 건축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확신은 착각에 불과하죠.”
이경헌 작가는 2023학년도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입학이 예정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고등학교 숙직실에서 도박을 벌이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수학 선생은 포커를 인생에 비유한다.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계산을 통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카드 게임. 하지만 우연 앞에서 계산은 홀연히 무너져버리기 마련이다.
<래빗 헌팅>은 대사를 통한 분위기 조성이 실감 나는 작품이다. 포커 게임의 진행과 함께 수학과 미술의 탐색전이 동시에 이루어지며 이야기의 끝까지 멱살을 잡고 이끈다.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클라이맥스, 누가 이길까 예측할 수 없는 결말. 미술은 수학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포커 게임에 참여하고 현실과 게임이 교차되며 진실에 대한 접근을 비유적으로 표현해낸다.
이렇듯 당선작들은 대체적으로 현실적인 서사를 선보였고, 환상 문학의 비중이 거의 없었다. 뚜렷한 주제가 관찰되기보다는 부조리를 겪고 감내하는 현실적 ‘과정’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많이 관찰되기도 하였다. 소설은 이 현실을 보다 다큐멘터리적으로, 희곡은 비유와 표현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고된 상실의 언덕을 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성숙’ 이라는 키워드로 집약 가능하다. 작품들은 대부분 상실, 불안, 방황, 부유 등 불안정한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불안정 상태를 지나야만 사람은 성숙해질 수 있다.
이 성숙들에서는 쓴맛이 났다. ‘성숙’의 키워드를 한 꺼풀 벗겨내면, 수상작들에는 ‘풍화’의 정서가 있다. 쥐가 보이지 않아도, 난간에 비가 들이쳐도, 나 자신이 누군지 몰라도, 안전가옥이 없어도, 게임이 불확실해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인물들은 폭풍에 너덜너덜해져도 감내하고 결국 삶을 살아낸다. 그러므로 성숙은 아이러니다. 살아가려면 성숙해져야 하지만 성숙은 곧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니까.
루카치는 문학을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고 칭했으나 우리는 이 비유가 고루하고 낡았음을 안다. 그러니 나는 이 시대의 문학을 ‘성숙한 우리의 아이러니’라는 말로 불러볼까 한다. 내가 나의 일부를 깎아내고 다듬었을 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인물들은 자신이 깎여나가는 것에 분노하거나 저항하기보다는 이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삶을 택한다. 물론 삶의 고난을 특별히 병리적인 상태로 지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허나 대부분의 작품들이 ‘무엇을 어떻게 감내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왜 감내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었다.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어째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성숙이 행복과 만족을 보장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본다. 문학에 도망갈 구석도
조금 더 있으면 좋겠다고. 미성숙한 이들은 미성숙한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작은 쥐구멍 말이다. 미래로 뻗어나가는 촉에 그런 들판이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