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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고 무너뜨리는
드라마 <더 글로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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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더 글로리 1>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복수에 관한 가장 유명한 구절은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일 것이다. 당한 만큼‘만’ 복수하라는 의미에 가까운 이 구절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이렇게 반복된다. “사람이 만약 그의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글쎄? 그건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복수 플롯은 많은 이야기들이 취하는 전략 중 하나다. 소포클레스 비극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복수를 지켜봤다. 이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여 드라마 <더 글로리> 또한 이러한 복수극의 구조를 취한다. ‘피해자는 폭력을 당하고, 이를 고발하지만 해결되지 않는다. 무력감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다. 이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복수를 계획하며, 이를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한다.’ 분노는 인물의 동기를 선명하게 해준다. 분노에서 기인한 복수는 그 자체로 사건이 된다. 피해자가 받은 피해가 클수록 상대를 무너뜨려야 할 당위성이 커지며,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인물에게 공감하여 복수가 성공하기를, 가해자가 몰락하기를 바라고 응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더 글로리>의 첫 에피소드는 동은이 정신적, 육체적, 성적으로 위협 받는 모습을 전달하는데 상당수의 시간을 쓴다. 연출된 것이 분명한 자극적인 장면은 꾸며낸 것만이 아니라 실제 사건(2006년 청주의 한 중학교에서 일어난 학교 폭력 사건)에 기인했으며, 지금도 어디선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를 무참하게 만든다. 살이 타는 소리, 울부짖는 비명으로 가득한 장면들. 폭력적인 순간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상처의 고통을 마비시켜 보려고 내의만 입은 채로 차가운 눈 위에 피부를 비비는 동은과 그런 동은을 훑는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이 이미지의 스펙터클로 전달될 때 자극적인 장면은 시청자의 삶을 뒤흔들고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후에 이어질 또 다른 스펙터클에 대한 조바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지만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더욱 빠르게 분노하고 해소하기를 반복하는 분위기에 적응해야 할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찜찜함 없이 가해자들이 고통을 돌려받기를 기다리고, 그들이 저지른 만큼이 아니라 저지른 것의 배로 고통스러워지기를 바라게 하기 위해 가해자들은 복합적인 인물보다는 천박하고 절대적인 악인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는 가해자를 미화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피해자에게도 원인이 있다는 식의 말을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며, 실제 요즘 우리가 목격하는 가해의 양상이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해자 연진은 동은을 괴롭히는 이유를 간단하게 다섯 글자로 요약한다. “사회적 약자.” 이 말은 폭력 또한 계급의 문제이며, 폭력은 약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폭력을 고발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의 자리에, 가해자는 계속 가해자의 자리에.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폭력의 방식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며 점점 더 교묘해진다. 가해자 무리 내에서도 폭력을 주도하거나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박연진, 전재준, 이사라는 부(富)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계 삼아 폭력을 외주화한다. 이들은 부를 통해 경찰, 학교 등 공공의 영역을 사병처럼 부린다. 자본과 유착된 종교는 죄를 저지른 신자에게 면죄부를 판다. 이들의 부와 권력에 기생하는 최혜정, 손명오는 부끄러움 없이 폭력에 가담한다. 이렇게 학교 폭력이 단순히 학생들끼리의 다툼이 아니라 부와 권력에 관한 일이 될 때, 개인 간의 파괴적 복수를 막기 위해 만든 사회적 안전장치가 무력화될 때, 개인 간의 폭력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게 된다.
어린 동은은 가장 안전해야 할 집도 학교도 잃고, 건축가라는 꿈마저 접는다. 몸과 마음의 상처는 깊게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마저 어려운 상황에서 동은은 살아내기 위해 새로운 꿈을 찾는다. 학교로 되돌아가는 것. “순간이나마 니가 나를 두려워할 수 있는” 연진의 딸 예솔이가 있는 교실로, 교사와 학부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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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공개된 파트 1의 이야기는 이렇게 복수 플롯의 클리셰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아직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은 상태라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까지 공개된 것만으로도 <더 글로리>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넷플릭스를 해지하려던 이용자들을 잡아 두는데 성공했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데다가 로맨스 장르에 흥미가 없어 김은숙 작가에 대해 잘 몰랐던 나도 파트 2가 공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복수의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그 안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대사들과 매력적인 모티프들, 이 드라마를 통해 이전에 맡았던 역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열연은 이 드라마의 매력이다.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오랜 시간 꾹꾹 눌러 참고 마침내 서늘해진 동은의 얼굴과 새카만 눈동자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던 연진의 얼굴, 그리고 각각의 편에 선 피해자 연대(가정폭력을 당한 현남과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아버지를 잃은 여정)와 가해자 집단을 번갈아 보며 나는 우리가 보게 될 얼굴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복수극의 끝에서 보고자 하는 얼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큰 골자에서 <더 글로리>는 복수 플롯의 구조를 벗어나지 않지만 그 구조 안에서 몇 가지 독특한 점이 발견된다. 동은이 복수를 준비하며 벼리는 도구가 펜과 바둑이라는 점이 그렇다. 동은은 펜을 들고 연진에게 수없이 편지를 쓴다. 시종일관 담담한 목소리로. 오랜 시간 준비해온 복수를, 복수에 임하는 마음과 과정을 잊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서.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멈출 수가 없다”는 대사처럼 성을 빼고 부르는 이름, “연진아”는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편지의 문장들은 연진에게 가닿지 않는다. 학부모와 교사로 만난 교실에서 연진은 여전히 빈정대며 자신이 가진 부로 동은을 찍어 누르려 할 뿐인데, 동은은 이 편지를 나중엔 결국 보내게 될까. 편지는 정확히 연진에게 도착할까.
동은 말고도 계속해서 편지를 쓰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강영천이다. 동은의 조력자인 여정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 강영천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받는다. 선처를 호소하며 사과하는 것 같지만 실상 집요하게 살인의 순간을 묘사한 편지를.
작중에서 ‘지옥’ 혹은 지옥과 관련된 단어들(“‘추락’할 너를 위해, ‘타락’할 나를 위해”)이 여러 번 발화되는데, (“종교가 없으면 좋은 점이 뭔지 알아? 갈 곳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야. 지옥.”) 동은은 자신의 복수가 성공하더라도 그 끝이 영광이나 구원이 아닐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복수자인 동시에, 그렇기에 오히려 투 스텝으로 춤을 추듯 지옥으로 다가가려는 복수자이다. 가해자에게 편지를 쓰는 동은이나 가해자에게 편지를 받는 여정(“그래서 아드님, 지옥 갔어요?”)이나 해소될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지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면 춤을 추는 게 낫지 않겠는가. 동은의 가장 큰 조력자인 현남(가정폭력에서 딸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동은의 복수에 가담하고 남편의 죽음을 공모한다)이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며 은연중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에 반론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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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말고도 동은이 든 또 다른 무기는 바둑이다. “집이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 싸움.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하는” 손의 대화. 연진의 남편인 도영에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배운 바둑이지만 동은은 바둑에 매력을 느낀다. 집을 짓는 이가 되고 싶었으나 학교 폭력으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기 때문일까. 자신이 준비한 복수의 형태(사실상 절대적 최선의 수는 존재하지 않는, 고도의 정신적 인내력과 판단력을 필요로 하는)와 비슷해서일까. 혹은 바둑의 세계에서는 상대적 약자를 위협하기보다 먼저 수를 둘 수 있도록 배려하기 때문일까. 바둑을 통해 여정이라는 조력자를 얻고, 가해자의 남편에 접근하면서 동은은 앞으로 흘러갈 이야기에서 어떤 수를 둘까.

파트 2 공개를 앞두고 작가는 마라 맛, 사이다 등을 예고했다. 마라탕도 마라샹궈도 그리고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도 즐기지 않는 터라 그 단어에 약간 주춤하게 되지만, 이런 맛들이 잘못된 것인지 이런 맛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사회가 문제인지 생각하다 보면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그런 맛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중독되어 찾게 되는 것처럼. 파트 2가 공개되면 연거푸 [다음 화 보기]를 누르게 될 것이다. 무한 경쟁의 능력주의 사회, 물질 만능주의, 부를 선망하는 풍조 속에서 갈 곳 잃은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일말의 죄책감 없이 타인을 해하는 자들이 ‘그래도 아무 일 없고’ 당한 사람들이 부당함에서 벗어나려 애써도 ‘아무 일 없는’ 사회와는 다른 결말을 기대하면서. 얼얼하거나 톡 쏘는 맛으로 얹힌 게 즉각적으로 해소되기를 바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복수극에서 더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리하여 보게 될 것은 그늘 한 점 없이 웃는 동은의 얼굴이 아니라 괴로움과 공포로 일그러진, 추락한 연진의 얼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