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의 구더기까지 보여 주는 일”
글리터를 뿌리고, 속눈썹을 올리고, 분칠을 더한다. 무대에 오르는 드래그 퀸(Drag queen1)의 모습은 그토록 화려한데, 모어는 자신의 업을 “뼛속의 구더기까지 보여 주는 일”이라 말한다. 모어는 무대 위에서 코스튬을 벗고, 가발을 던지고, 몸을 뒤튼다. 모어는 20년간 “오늘도 수행하러 간다”는 겸허한 태도로 이태원의 드랙쇼 클럽 트랜스(Trans)에 출근한다. 메이크업과 조명 아래 피로는 감춰지고 쇼가 펼쳐진다. 다큐멘터리 <모어>는 아티스트, 트랜스젠더, 그리고 드랙퀸으로서 수십 개의 페르소나와 일상을 살아가는 모어의 여정을 담는다. 이것은 모어이며 모지민의 삶이다. 바로 이 사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에세이즘(Essayism)이 <모어>를 구축한다. 경쾌한 리듬과 편집의 오프닝 시퀀스가 펼쳐 보이는 <모어>는 패셔너블한 뮤지컬 필름 같다가, 춤추는 모어와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노래가 겹칠 땐 독특한 뮤직비디오 같고, 과거를 말하는 내레이션과 푸티지는 환상적인 실험극 같고, 마침내는 오랜 친구의 카메라 같다.
앞서 <모어>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영화라는 사실을 밝힌다. 모어의 언어로 구조화된 세계는 귀신, 욕창, 쥐구멍의 세계다. 치부를 달고 태어나 신이 아닌 귀신이 모어의 머리채를 잡고, 이태원의 쥐구멍 트랜스로 이끌고, 욕창 같은 삶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러나 드랙쇼는 모어에게 구원도 출구도 아닌 현실이다. 밤새 춤추고 가슴에 꽂히는 천 원짜리 팁은 푸념과 함께 지하철 노점상의 식자재와 교환된다. 자기 연민할 시간 없이 바쁘다. 생애 하이라이트 같은 기회, 뉴욕에서 열리는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 공연 <13 fruitcakes>2의 날짜가 다가온다. 클래식 무용을 전공한 아티스트의 몸은 유연하고 높은 하이힐에 단련된 발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다. 그 경이로운 몸짓에 압도되어 모어가 선보일 페르소나에 빠져드는 체험 또한 <모어>만의 특색이다.
“모두가 집을 떠나고서야 시작되는 이야기”
<모어>는 집을 떠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집’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이는 선택할 여지 없이 주어진 조건, 환경, 신체, 그에 따른 ‘갇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라남도 끄트머리 무안. 모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 100만원을 호가하는 무용복을 사 주며 전적으로 모어의 꿈을 지원해 준 부모님이지만 ‘네가 딸 노릇 한다’는 어감에서 읽히듯 이 지방의 규칙은 경직적이고 공고해 보인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성별에 불일치를 느꼈던 모어에게 학창 시절 어려움은 없었을까. 부모님과 옛 동창과 당사자의 증언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없었다 하고, 누군가는 약간이었다 하며, 누군가는 선명히 기억한다. 모어가 떠난 집, 고향, 기억과 트라우마에서 택하는 것은 다시금 몸짓이다. 군대에서의 폭력적인 대우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은 드레스와 군복을 나란히 입은 채 경례하는 퍼포먼스와 병치된다. 논두렁, 경운기 위, 장작이 타오르는 마당, 시골 풍경 한가운데서 모어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춤춘다. <모어>가 말과 언어를 미루고 몸짓과 표정을 택할 때, 관객은 공모자가 되어 맘껏 눈물 흘릴 수 있다. 아마 그 순간 우리가 말과 언어를 초월하는 사건을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반면 정확하고 직설적인 언어가 필요한 때도 있다. 예를 들면 20년을 함께한 연인 제냐에게 모어가 입이 닳도록 하는 잔소리, “커피는 하루 두 잔, 담배는 하루 한 갑!”처럼 말이다. 날렵하게 정제된 모어의 몸과 상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제냐의 몸은 불어났고 수염은 덥수룩해졌다. 그는 화학 박사 학위가 있지만 다른 일을 전전하고 있다. 지금은 ‘포켓몬 고’ 게임에 푹 빠진 그는 자신을 역겨운 사내라 자조하며, 모어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미스터리(정확히는 That’s a FXXXing Mystery!)라 말한다. 제냐의 1년 반짜리 구직 비자는 영원을 보장해 주지 못하지만 둘은 평생을 약속하고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난다. 불꽃놀이를 하며 ‘담다디’를 부르는 둘의 모습, 제냐가 모어의 고향에 함께 방문해 밥을 얻어먹고 “한국 사람 다 되었다”는 최고의 K-덕담을 듣는 모습은 <모어>를 행복한 영화로 만든다.
“뭐든 되었고 모두 될 수 있었다”
손에 꼽기 어렵게 경이로운 장면들 가운데 한 장면을 욕심내어 소개하고 싶다. 드디어 다가온 <13 fruitcakes>의 D-day. 영화는 모어가 ‘올랜도’ 역 중 흑조 발레리나로 변장하여 무대로 뛰어오르는 순간을, 대기실에서부터 이어지는 씬으로 담았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모어는 얼굴과 몸을 풀고 근육을 움직인다. 코스튬과 메이크업을 가다듬는다. 시행을 위한 몇 번의 점프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가볍다. 모어에게만 중력이 벗어난 듯이. 카메라의 은밀하고 비가시적인 앵글로, 일인칭으로 모어에 동화되는 몇몇 순간은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도약 직전의 순간은 고요하고 우리가 모두 얼어 버렸을 때 발레리나의 발만이 무대로 뛰어오를 정확한 타이밍을 알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섞여 든 스텝이 바닥을 박차고 솟아오른다. 곧바로 무대 앞으로 전환되는 카메라 뷰에서, 우리는 눈앞에 착지한 한 마리의 흑조를 본다. 하나의 롱테이크처럼 고안된 이 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냈는가. 영화란 아름다운 순간의 영원한 지속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이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가. 이 체험이 당신에게도 꼭 닿길 바란다.
<모어>는 모어의 삶에 얽힌 기억, 인연, 섬광을 목도한다. 여러 굴곡을 지나왔거나 혹은 빙빙 돌아왔지만, 모어가 있는 그곳이 어디든, 폐쇄적인 시골이든, 퀴어 퍼레이드 반대 세력이 고함치는 광화문이든,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한강이든 더 이상 두렵지 않아 보인다. 자, 집을 떠날 차례다. 영화의 엔딩에서 다시 돌아온 트랜스의 밤을 응시할 때 글리터와 분칠이 걷히고 뼈와 근육, 육체만이 생동한다. 박동을 올리고 피를 데워 뛰어오를 준비를 하자. 우리의 몸에 결정지어진 조건과 경계, 폭력적인 운명을 밤새 비웃어 주자. 우리는 밤새 유희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과정을 제 손으로 창조하는 드랙을 “신의 창조물”이라고 칭하는 건 한 무대에서 “인어도 됐다가, 흑조 발레리나도 되고, 자작나무가 되기도 하고, 퀴어한 예수도 되는3” 전지전능한 드랙퀸 모어만이 말할 수 있는 참으로 적절한 유비다. <모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어떤 정의를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 급진적이고 엉뚱한 상상을 해 볼 수도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 기반한 헤드윅의 <Origin of Love>가 노래하듯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로 완전했던 인간에게 번개를 내려쳐 평생 반쪽을 찾아 헤매게 만든 ‘분리’가 신의 형벌이라면, 성별 따위의 ‘경계’는 신의 실수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신의 세계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낭만과 상상력을 취해야 한다. 기꺼이, 그리고 마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