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지난 호에서 한예종 30년 역사를 함께 만들어 온 교직원 네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호 취재를 하며 내가 너무 즐거워했던 탓이었을까. 이번 호는 역대 총장님들을 만나 뵙고 오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三十 而立. 논어에서 공자 이르되, 서른은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 했다. 공교롭고 민망하게도 나는 서른에 새로운 전공을 선택해다시학교로돌아왔고,이전과다른궤도위에삶을 올려 두었다. 아주 빛나지는 않아도 새로운 삶의 방식이 썩 마음에 들어서, 30년이란 시간을 돌아보는 매거진 기획 연속성을 완성하고 싶어서 덜컥 취재를 맡았다. 가깝게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총장으로 계셨던 분부터 멀게는 나라는 존재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존재조차 모를 시절에 총장으로 계셨던 분까지. 차근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영광의 시간이자 성찰의 시간, 김봉렬 전 총장님
“지난 학기부터 수업을 다시 시작했어요. 내가 좋은 내용을 잘 가르치는 교육자라고 생각했는데, 8년 만에 들여다보니 한 20년 전 생각을 그대로 학생들한테 가르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총장을 지낸 8년간 연구자로서, 교수로서의 태도를 다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수업이 많지는 않은데 수업 준비하기가 힘들어요.” 2013년부터 작년 8월까지 총장직에 있었던 김봉렬 교수님을 만났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냐는 질문에 그는 퇴임 3일 후부터 제주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총장 기간에 있었던 일을 거의 다 잊어버린 것 같다며 웃었다. 요즘은 일주일 내내 건축과 수업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고.
“사실 초창기에는 학교가 성과를 내야 하므로 높이 경쟁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높이 뛰기는 결국 우승자가 한 명이거든요. 다 같이 높이 뛰기는 어려운 거고. 깊이는 그렇지 않아요. 각자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게 예술 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서 이제 높이보다는 깊이, 자기의 예술 세계를 구축 할 수 있게 해주는 학교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의 구멍만 파면 그게 옳은지 아닌지 알수없어요.넓이를 알고 자기 위치를 알고 가야 할 방향을 알아야 해요. 개교 30주년인데 여전히 6개원 체제잖아요. 좋게 보면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 볼 수 있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새로운 방향에 대한 추구가 모자랐다고 볼 수 있거든요.” ‘중창(重創)’, ‘더 깊게, 더 넓게’, ‘미래의 고전을 창조하는 K-Arts’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그간 비약적 발전을 해 온 학교의 업적과 성과를 토대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덧붙여 쌓아온 그는 예술교육에 깊이와 넓이를 강조했다. 공통교과 과정부가 예술교양학부로 확대된 것, 세종과 통영에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캠퍼스를 개원한 것도 그가 내세운 슬로건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총장의 역할이라는 게 크게 보면 두 가지일 거예요. 원대한 비전을 세우고 구성원을 설득해 이끄는 것과 교육, 창작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행정가 역할이죠. 우리가 갖지 못한 것, 가장 열악한 것이 공간 부족에서 오는 문제들이었어요. 8년 임기 내내 통합 캠퍼스를 새로 만드는 데에 큰 의미를 두고 퇴임 직전까지 노력했어요.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공감대는 좀 이뤄지지 않았나 싶어요. 늘 이렇게 과거를 되돌아보면 잘한 일보다는 좀 아쉬운 일이 훨씬 더 기억에 많이 남아요.” 새벽 6시 반에 출발해 기획재정부 과장 출근 전부터 가서 기다리는 ‘허를 찌르는 정성’으로 문화관광부 청사였던 건물을 확보해 대학로 캠퍼스를 개관하는 등 캠퍼스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끝내 매듭짓지 못한 통합캠퍼스 문제가 여전히 그의 어깨를 누르는 듯 보였다. 제주에서 매일 오름을 오르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임기 시절을 잊었다고 했지만 그가 한예종 총장으로 보낸 8년이란 시간은 쉬이 잊힐리 없다. “영광이기도 하고 헌신이기도 했어요. 얽매이기 싫고 자유롭게 연구 활동을 하고 싶어서 교수직을 선택한 건데 26년 한예종 생활 동안 주요 본부 보직만 14년을 했어요. 교학처장 4년, 기획처장 2년, 총장 8년. 역대 총장님 세 분을 모셔 왔으니 총장직의 고뇌와 고통을 잘 알죠. 사실은 피하고 싶은 길이었어요.” 한예종 총장으로 지낸 기간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었다.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는 대답과 함께 그는 봉사와 헌신의 차이를 설명했다. 둘의 차이는 자발성에 있단다. 그가 연구자로서 굉장히 소중했을 8년을 희생하며 쌓아 올린 한예종이 어느덧 30주년을 맞았다. “30년이 지나면 역사가 돼요. 이제 학교가 역사의 단계로 들어선 거예요. 영광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성찰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객관적으로 학교의 설립 목표를 따져 보고,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역사적 평가를 할 시간이 왔어요. 꼼꼼하게 과거를 들여다보고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목표를 찾아낼 때가 온 거죠.”
한예종 제2기를 열며, 박종원 전 총장님
“기능과 기교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호흡해야 예술가들의 성장 속도와 그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요.” 2009년부터 4년간 이어진 총장 임기 이후 교단으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폭넓은 성찰이 담긴 시선을 강조하는 영화과 박종원 교수님을 만났다. 학생들의 촬영 현장에 자주 나가 격려해 준다는 소문을 언급하자 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학생이지만 현장에서는 감독이니 감독이 불편하지 않도록 가급적 지켜보기만 하다가 학생 저마다 칭찬할 부분을 찾아내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고. 의례적 수사가 아닌 적확한 칭찬을 듣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2012년 10월, 아시아 예술대학 간 교류 협력 기구가 전무하던 때에 아시아예술교육기관연맹(ALIA)을 창설한 그는 임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해외 예술 교류 봉사단 이야기를 꺼냈다. “예술가의 목표는 자기만족에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술가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예술을 통해 사람의 향기,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외교부와 MOU를 맺어 예술 교류 봉사단 활동을 추진했고 학생들이 그룹을 짜서 방학 때마다 몇 팀씩 해외에 나가 예술 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봉사하러 간 학생들이 각자 삶의 방향과 가치를 많이 깨닫고 왔다고 앞다투어 말하는 겁니다.” 국가 지원을 받는 국립대학으로써 수행해야 할 역할을 고민하던 그는 사회적 약자 특별전형 제도를 만들었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와 해당 단체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던 날, 고마워하면서도 ‘왜 이제야...’ 하는 눈빛을 아직 잊을 수 없단다.
임기 중 개교 20주년 행사를 치르며 “한예종은 이미 성과로는 정점을 찍었다.”고 말했던 그는 앞으로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취한 부분도 있고 또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30년이면 서른 살이죠. 사람이 서른이면 성인이 된 지도 10년이 되었고, 자기가 가야 할 방향도 섰을 거고 성취가 무엇인지도 아는 그런 때일 겁니다. 사람보다 학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축적되어 있을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는 여태 쌓아 온 것도 잘 유지를 해야 하지만 다시 개교한다는 느낌으로, 한예종 제2기가 본격적으로 열려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라서 변화에 예민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익숙해지고 편해지면 생각이 작아지거나 닫히곤 하죠.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것도 없는 고인물은 곤란합니다. 모든것을 점검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30년이길 바랍니다.”
총장임기 이후 다시 영화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며 준비중인 영화가 어떤 이야기인지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에게, 혹시 영화감독 커리어에 공백이 생긴 총장 임기를 후회한 적은 없는지 물었다.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총장을 했던 4년은 내가 걸어온 길 중에 굉장히 중요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해온 장르 외 타 예술에 대한 이해가 더 날카롭고 선명해진 계기였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시간은 사실 손실이 좀 있지만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총장을 하면서 제가깨닫고느낀것이제삶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그 시절 만난 사람들, 어떤 사실을 확인 한 것에 대한기쁨은이루 말할수없는기쁨입니다.시간이 흘러 학교를 떠났을때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박종원이란 존재가 생각나고, 더 소망한다면 ‘그때 좋았었다.’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다시 새겨 보는 본래의 철학, 이건용 전 총장님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졌던 다음 날, 2002년 3월부터 2006년 3월까지 4대 총장을 지낸 이건용 전 총장님을 만났다. “아직도 작곡을 합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근황을묻자나온첫문장이마음을울렸다.올해연말에 예정된 경기 시나위 오케스트라 연주회 예술감독을 맡아 얼마 전 가장 중요한 곡인 ‘묵(黙)’ 작곡을 마쳤단다. <반향>이라는 연주회 제목 탓에 지금껏 해 오던 작곡 방식을 많이 반성했다고. “저는 모더니스트예요. 모더니즘 교육을 받았고 또 그 가치대로 살아 왔는데 그 가치가 요즘 많이도전 받잖아요. 그 가치에 의해 쓰던 작곡 방식이 과연 앞으로도 계속 내가 해 나갈 방식이냐 하는 반성을 해 봤어요. 포스트 모던한 작품까지는 가지 않았는데 근대적인 정신의 작품을 자꾸 두드려 보는 작품이 어떨까 하는 것이 요즘 제 화두입니다.”
인터뷰 할 때면 짓궂은 습관처럼 사전에 보낸 질문지 외에 다른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한예종 설립 당시 고 이강숙 전 총장님이 대체 뭐라고 하셨기에 무모한 도전에 함께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얄궂은 기습 질문에 그가 기억을 되짚으며 찬찬히말했다.“제 마음을 가장 움직였던 것은 그 당시에 왜 이 학교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 철학이었어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학교를 만들어 보자는 거예요. 원래 예술학교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생각해 보고 새로 만들어 보자는 상당히 반성적인 철학을 가지고 시작을 했죠. 그간 다른 학교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것을 여기서 해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왔어요.” 그러면 그때 품은 희망과 지금의 한예종은 얼마나 닮아 있을까. “그때는 ‘한예종’이라는 이름을 제가 싫어했어요. 이제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교는 동서와 고금을 망라하고 있어요. 고금동서의 예술을 하나에 담고 있는 학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전 세계에 통용될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학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국방대학원, 국가정보원 등 여러 정부 부처와 관계 기관들이 들어서 있던 석관동에 한예종 캠퍼스를 기공하던 날, 그날의 날씨 같은 사소한 것들은 잊었어도 아주 기뻤던 감정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고. “하드웨어가 없으면 소프트웨어를 갖다 붙일 데가 없어요. 매우 어려웠는데 당시 여러 직원분이 많은 아이디어를 내 주셔서 아슬아슬하게 기공식을 할 수 있었어요. 제일 기뻤던 순간이었습니다.” 학교 공간과 더불어 또 다른 하드웨어인 법 제정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학교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면 교육법과 대등한 독자적인 체제가 필요해요. 교양 학점을 줄이고 실기 과목을 늘린다고 실기 위주 학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실기가 어떻게 교양과 관련이 없습니까? 잘하는 친구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통해서 그걸 배워요. 연극도 마찬가지예요. 시대의 핵심이 그 안에 있으니까요. 그런 친구가 어디 가서 학위를 인정받지 못해 교육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면 그건 국가적인 손실이죠. 지금이야 오해가 많이 풀렸으리라 생각하지만 순수한 교육적 관점을 떠나 사회·정치적 관계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만 앞서 나가려는 게 아니라 더불어 같이 가려고 하는 것이란 인식을 서로 가져야지요.” 시종일관 소년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여유가 묻어나는 차분한 답변을 하던 그가 설치법 이야기에 살짝 언성을 높였다. 그때의 설움과 답답함이 전해졌다.
“퇴임할 때쯤 무사함의 가치라는 걸 생각하게 됐어요.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다는 무사안일주의 같은 게 아니고요, 공동체가 큰 문제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무사함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총장으로 있던 4년간 아주 무사한 건 아니었지만 회복할 수 없는 흔들림이 발생하진 않았거든요. 조용한 발전 이런 말을 쓰면 적합할까요? 공동체가 조용히 성장할 만큼 잠재력을 발휘해 나가는 것, 그걸 무사히 해낼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총장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익숙한 연구실, 익숙한 책 틈에서 그는 그간 보류했던 자신의 정체성이 서서히 회복되는 기분을 느꼈단다. “이강숙 초대 총장님이 즐겨 하던 이야기인데요, 동물들은 새끼를 낳으면 핥아 준대요. 핥아 준 새끼는 살아나고, 하다 말면 죽는다는 거예요. 내 존재를, 잠재된 생존 능력을 발휘하도록 감각을 깨운 거죠. 교육이 바로 그런 거예요. 본능적인 사랑이랄까.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낡아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어휘가 모자라요.” 무사히 인터뷰를 끝마칠 무렵 교육자이자 선배 예술가로서 한예종의 다음을 만들어 갈 학생들에게 해주고싶은이야기가있는지물었다.그의답은마음을 움직이는 묵직한 한마디였다. “믿는다.”
인터뷰를 정리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느 인형극을 보러 갔다. 배우이자 페펏티어가 관객에게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를 더해 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어느 어린이 관객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사랑이오!” 30년. 시간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흐르지만 학교라는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많은 이의 빛나는 마음이 필요하다. 졸업 이후에야 내가 잠시 스쳐 간 학교를 일평생 일궈 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그 마음을 어림짐작해 본다. 사랑일까. 이 마음을 글로 적기에는 이건용 전 총장님 말씀대로 어휘가 모자라다. 더 많은 사람의 마음과 시간이 쌓여 더 단단하고 찬란할 한예종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