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UMN 2022

ARTISTS

이채원 박세림

묘한 제목이다.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문수진 감독의 예술사 졸업작품 <각질>에는 흔히 생각하듯 건조한 각질이 아닌 이상한 윤기가 흐르는 잠수복 형태의 각질이 등장한다. 영문 제목은 ‘페르소나(Persona)’. 올해 제75회 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받고,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로 불리는 제46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학생졸업작품 부문에서 한국 최초로 대상을 수상했다.

영상원 강의실 530호에서 문수진 감독을 만나 한 시간이 조금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죽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고민의 해답은 “나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으로서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각질>은 그가 내면의 밑바닥을 낱낱이 탐사했을 때 발견한 출구다.

6분 45초의 단편 애니메이션 <각질>을 만드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7년의 학교생활 중 휴학 기간도 3년이다. 짧은 기간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이 기간 동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기준 같은 것이 있나?
나를 잃으며 혼란을 느 꼈던 경험이 기준이 되어줬다.
휴학을 많이 하면서도 작업을 계속했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작업자가 되고 싶은지 많이 고민했다. 그 때 했던 고민이 각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창 각질을 기획하던 당시 나의 행동의 기준은 모두 외부에 있었다. 대중적인 작품이 나를 스타 작가로 만들어 줄 것이고 그게 결국은 계속 창작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대중이라는 것은 정어리 떼와 같아서 멀리서 보면 하나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각자의 생각과 취향, 판단 기준을 갖고 있는 개별 존재다. 거기서 엄청 혼란을 느꼈고 ‘아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 같다. 기준을 외부에 두는 것에 대한 불안정함에 대해 배웠다. 지금도 온전히 기준이 내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두려웠던 경험이 자꾸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오게 해준다.

<각질>도 ‘기준을 나의 내부에 둘 것이냐 외부에 둘 것이냐’의 문제를 다룬,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애니메이션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바라보던 거울 속 허상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이 생각지 못한 전개여서 계속 곱씹게 되었다.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인가?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막판에 숨을 못 쉬다가 얼굴을 찢었는데 안에 아무것도 없는 장면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기 안의 진짜 자신을 돌아봐야 될 상황인데도 주인공은 껍질을 놓지 못해 거기에 집착한다. 자기를 잃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그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자기 안의 주인을 자신이 만들어 낸 껍질, 이미지에 내준 것이다. 진짜 자신이 누군지 모르게 되고 자기가 만들어 낸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거울 속 세계는 주인공이 구상해 낸 공간이기도 하다.
그 거울 속은 내가 사는 현실과 똑같긴 하나 페르소나로 움직일 때의 세상이다. 숨은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하게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설명을 들으니 마지막 장면의 실마리가 조금 풀리는 듯하다. <각질>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만큼 작품에 담긴 생각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트워크에서 느껴지는 모순적인 힘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예를들어 ‘진짜 나’는 과감한 무채색 누드로 표현된 반면 나의 껍질이자 ‘각질’은 이름과 달리 생기 있게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준다.
생기 넘치고 발랄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행동을 하다 보니까 물론 어느 정도의 진심은 들어 있었겠지만 진짜로 내가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에 비해 과하게 오버할 때가 많았다. 그 감정의 격차가 굉장히 불안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것이 생기라면, 되게 생명력 없는 생기일 것이다.

<각질>이 순정만화체로 표현되었다는 설명이 많이 보여 파스텔 톤의 아련한 느낌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있다. 케이크, 아메리카노 같은 아주 일상적인 소품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늘함이 서려 있다.
<각질>은 파스텔 톤이 아니다. 색감을 다채롭게 쓰긴 했으나 명도나 채도 같은 건 좀 낮거나 탁한 쪽을 선택해서 썼다.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작품 전반에 다 끌고 가고 싶었다.
그 정서는 침체, 이질감, 불안 같은 것들이다. 특히 이질감은 <각질>의 키워드이다. 주인공이 인간 관계에서, 또는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장치, 소품들에서도 이질감이 들기를 바랐다. 일상적인 것일수록 더 이질감이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정서를 말이나 상황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있지만 색감, 소리, 투시, 화면 구성 같은 것을 통해서 녹여 내고 싶었다.

<각질>
<각질>
<각질> 포스터

색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엔딩 크레딧이 매우 짧아서 놀랐다. 항목도 감독, 채색, 어드바이저, 사운드 4개뿐이다. 어드바이저는 애니메이션과 교수님들이고, 채색 항목의 이름은 낯설다. 학교 동기인가?
그냥 필름 바이 문수진으로 할까, 아니면 뭐 스토리보드 문수진 비디오보드 문수진 액팅 문수진 이런 식으로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그건 너무 번잡스러워서 지금처럼 했다. 크레딧이 되게 초라해 보이긴 하더라. 채색에 나온 이름은 친오빠다. 도움이 필요해서 툴을 직접 가르쳤다. 그런데 비전공자라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서 결국은 직접 했다. 영화제들을
다니며 제일 부러웠던 것은 프로듀서와 감독 혹은 배우들이 같이 다닌다는 점이었다. 사실 함께해야 더 큰 작업, 더 다양한 가능성의 작업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상황적으로 〈각질〉 만들 때처럼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웬만하면 함께 작업하고 더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다.

어찌 보면 이번 작품 주제가 내면의 기준을 향하다 보니 독립적인 작업 방식이 더 적합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평소 작품의 아이디어는 주로 어떻게 얻는지 궁금하다. 책을 읽거나 일기 같은 것도 쓰는 편인지?
일기 많이 쓰고, 메모나 낙서 같은 것도 많이 한다. 말로 안되면 그리기도 하고. 혹은 ‘너무 재밌는 정서다’ 하는 생각이 들면 작업으로 가져와서 풀기도 한다. 이런 것이 다 나중에 창작으로 이어지게 되니까 정말 잘 들인 습관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각질>을 만들면서 힘들다 보니 살짝 그 취미가 끊겼었다. 요즘에는 다시 이어 가려는 중이다. 사람도 많이 만나려 하고, 책도 많이 읽으려 하고, 낙서도 생각 안 나도 하려고 하고. 학교 다닐 때 도서관을 되게 좋아했다. 재밌는 책도 많아서 맨날 가서 골라 읽고 그랬다. 소설 같은 몰입할 수 있는 책을 좋아한다.

학교 생활하면서 도서관 외에 또 좋았던 것이 있다면?
좋은 동기들이 있었다는 것. 1학년 때 생각해 보면 과실에 동기들과 모여 같이 작업하면서 무슨 고민이 있으면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서 같이 얘기하고 그랬다. 나와 성향이 비슷하거나 자신만의 작품을 하려고 했던 동기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작업물을 보여 주면서 발전해 갔던 기억이 난다. 애니메이션과 같은 경우 1년에 한 작품씩 만드는 커리큘럼이고 이것이 좋아 들어왔다. 학기 초가 되면 애니과 전체 학생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그러면 선생님, 친구들한테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수업 시간이 아닐 때도 같이 있으면 동기들에게 많이 물어봤다. “내 거 봐 줘” “어때?”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한 해 한 해 작업하던 그 시간들이 좋았다.

인스타그램에서 또 다른 작품의 제목인 듯한 <플라스틱 러브>라는 게시물을 봤다. 다음 작품으로 계획 중인가?
다음 다음 다음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첫 번째, 두 번째로 할 작업들은 스토리와 컨셉이 어느 정도 나와 있는데 <플라스틱 러브>는 둘의 진도에 비해서는 막연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세번째이다. 인스타그램에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스케치를 올리며 점점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중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렵다. 여기서의 그림체는 <각질>과는 다르게 좀 더 히스테릭한 명랑함이 있는 것 같다. 이것도 마냥 좋은 얘기는 아니다(웃음).

그 작품도 매우 기대가 된다. 사실 <각질>이 겉모습은 소규모 작업물인 것 같지만 안을 보면 만든 이의 포부가 큰 것이 느껴진다. 다음 작품에 임하는 포부가 있다면?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것 같다. 다만 만들 때 조금 솔직하게, 조금만 더 섬세하게 그 감정이나 주제를 바라보자, 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고 해도 사랑에도 수만 가지 모습이 있고, 그 모습 하나하나에도 감성이 있고, 포인트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모든 게 다 있다. 그것을 음미할 수 있어야 되고 내가 느끼는 이 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라든지, 객관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자세가 있다면 내가 재밌고 만족할 수 있는 작업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감히 추측해 본다. 섬세하고 솔직하게 임하고 싶다.

후배나 동료 창작자, 혹은 스스로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업은 계속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확률은 희박하고 배고프다. 게다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계속 의심하고 생각하느라 행동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들이 묵어 두려움으로 발효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 내가 무슨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거라는 생각에 갈팡질팡 탭댄스를 추던 중 ‘한번에 하나씩 단순하게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내가 한번의 노력으로 너무 많은것을 갖고 싶어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 깨닫게 되었다. 요즘에는 최대한 단순하고 솔직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무서운 것은 당연한 거니까. 불구덩이 속 외줄을 타면서 세상을 걸어가고 있는데 안 무서울 수가 없지 않나. 그래서 무서운 게 오히려 정상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레츠 고’ 하자고 말하고 싶다.

글 김주은 사진 김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