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스토리에 클리셰가 있다면, 그것은 몇 번이고 인생을 바꾼 주인공이 결국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운명일 테다. 그리하여 시간여행자는 무수한 반복을 겪고도 동일한 대상과 사랑에 빠지거나, 더욱 급진적인 수사로 동일한 대상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몇 번이고 시간을 오가기까지 한다. <이터널 선샤인>과 <어바웃 타임>. 우리가 사랑한 이 스테디셀러에서 시간과 기억은 분리 불가능한 문제다. 첫 번째, 인간은 특정 시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억’이라는 기록으로 간직하는데, 그 사건이 자리한 시간이나 공간이 흐려질 때 기억은 유효성을 잃고 퇴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죠?”, “그게 언제더라?” 사건(대상)의 직접적인 상실도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죠?”
두 번째, 위 작품들에서 시간여행자는 곧 기억상실자가 되거나, 시간여행자가 제거한 타임라인으로 인해 그때는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기억상실자를 사랑하게 된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거꾸로 선 원뿔로 유비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거대한 잠재성의 시간을 그려 보자. ‘그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은 채 잠재성으로 빨려 들어간, 거대한 원뿔의 소용돌이에 갇힌 가엾은 연인을 다시 한번 되찾기 위한 근거는 ‘그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동어반복의 잠재성뿐이다. 정말이지 시간여행은 위험천만하다. 우리가 이토록 위험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불가해하고도 절대적인 물리 축, ‘시간’을 건드리는 이유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 잠재성, 변수로 가득 찬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음’에 경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는 세계 가운데 변하지 않는 인간을 향한 찬사이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랑받는 스토리의 원형이 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시간여행의 클리셰에 기꺼이 눈물을 흘린다. 몇 번이고 시간을 거슬러도, 다시금 사랑에 빠지는 기억상실자처럼.
2022년 상반기, 우리가 사랑한 영화
팬데믹과 언택트, 레거시 미디어와 뉴미디어, 극장과 OTT. 콘텐츠 환경이 전통과 전례 없는 변화로 각축하고 있는 한편 우리를 극장에 찾아가게 한 영화들이 있었다. 5월 개봉한 <범죄도시2>는 ‘마동석’이라는 장르의 직설적인 주먹으로 상반기 극장가 첫 천만영화를 열어젖혔다. 6월 개봉한 <탑건: 매버릭>의 흥행은 전 세계적인 축배였다. 1986년 개봉한 <탑건>으로부터 3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도착한 <탑건: 매버릭>은 본편의 주인공, 톰 크루즈(이하 ‘매버릭’)를 놀랍도록 섹시하게 방부시켜 다시금 공군기에 탑승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에게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의 성적을 가뿐히 돌파한 최상의 포트폴리오를 안겨 주었다. 파일럿의 사령관이 되어 테러리스트의 무기 발전소를 안전하게 파괴하라. 언뜻 단순한 미션으로 이루어진 듯한 <탑건: 매버릭>은 30년 전 <탑건>의 타임라인과 노스텔지어, 오마주를 오가며 풍부해진다.
<탑건>으로 돌아가서, 레이건 시절 8090 할리우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잃어버린 미국의 영혼을 스크린의 영웅으로 복구했다. 냉전기 소련 세력과의 교전에서 친구를 잃은 매버릭의 트라우마는 미국의 트라우마와 등가되고, 그가 상공을 날며 타국의 전투기를 격추시킬 때 들끓는 엔진이 잃어버린 심장을 대신한다. <탑건: 매버릭>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믿음을 다시 한번 재건한다. 반항적이던 천재는 스승이 되어야 하고, 영원히 늙지 않을 것만 같은 청년도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매버릭은 여전히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않아 밀회를 나누고 창문으로 몰래 탈출해야 할 만큼 섹슈얼한 남자지만 그가 모는 F-18의 미사일은 정확한 타겟에 안착하여 미국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매버릭은 최첨단 전투기의 최대 출력으로 짜여진 동선을 80년대 <탑건>의 전설적인 유산, 구 전투기 F-14를 타고 되돌아오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잔인하고도 감격스럽게 뒤섞이는 이 소용돌이 가운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 <탑건: 매버릭>이 선택한 길이었다.
같은 달 개봉한 <헤어질 결심>은 인간이 자신의 선을 넘고 무너지는 ‘붕괴’ 이후 관계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혹은 다른 인간을 즈려밟고서만 개인의 재건이 가능하다는 냉소, 부조리극, 최면의 세계로 관객을 데려간다. 6월 칸에서 도착한 <브로커>는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 속 어른들의 화해를 보여 주며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본질적이고도 안온한 세계로 회귀한다. <명량>에 이은 이순신 3부작 <한산: 용의 출현>은 방대한 바다를 진두지휘하는 화통함에서 물러나 가느다란 활시위를 놓지 않는 집중력을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며 그에 걸맞는 준수한 관객 수를 달성했다. 연이은 블록버스터 기대작 <외계+인 1부>는 중심축 없는 멀티 유니버스에서 갈팡질팡, <비상선언>은 뛰어난 CG와 4DX 모션 강도의 기술력과 신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흥행 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나 실로 아쉬운 결과였다.
2022년 상반기, 우리가 사랑한 드라마
올여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 신드롬’을 지나칠 수 없겠다.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우영우가 대형 로펌에 입사하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가운데, 각 에피소드는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판례들과 밀접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우영우가 변호를 맡으며 어려움을 겪는 과정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큰 줄기와 이어진다. 우영우가 맞닥뜨리는 판례는 타인의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여성, 우영우의 삶과 존재증명에 연루되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는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삶과도 연루된다. ‘우영우 신드롬’은 장애, 차별, 자기결정권, 제도를 둘러싼 사회참여적인 여러 담론을 촉발시켰다. 우리는 이러한 이슈 앞에 ‘봄날의 햇살’일 것인가 ‘권모술수’일 것인가. 잘 만들어진 스토리는 픽션과 현실 사이에서 대중에게 말을 걸고 변화를 만들어 나간다.
같은 일자에 방영되며 자연스레 경쟁 구도를 불러일으킨 tvN의 <우리들의 블루스>와 JTBC의 <나의 해방일지>는 각자의 울림이 있었다.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는 “언젠가부터 주인공 두 사람에게 집중된 이야기를 쓰는 게 재미가 없어졌다”는 인터뷰를 증명하듯 14명 주연의 옴니버스로 전 연령대의 인간 군상을 펼쳐 놓았다. 제주도의 차고 거친 바다를 배경으로 그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다. <나의 아저씨>, <또 오해영>의 극본을 쓴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는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정서적으로 소외된, 경기도 끝자락에 살며 매일매일 지겨운 지하철 출퇴근길에 갇힌 삼남매를 보여 준다. “지겹게 평범해. 누가 좀 구해 줬으면 좋겠다”는, 입 밖으로 꺼내기 낯부끄럽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되뇌어 보았을 문장으로 우리를 소구한다. 극중 염미정(김지원 역)의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추앙해요”로 화제가 되었듯 현실감을 비껴 나간 독특한 대사와 선문답, 철학적인 중얼거림으로 가득하다. “<나의 해방일지>의 특징 중 하나는 대사가 오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서로의 이야기를 쏟아 내기만 한다. 어쭙잖은 공감, 조언, 충고가 없다.” 1
이처럼 <나의 해방일지>의 미덕은 방향성을 잃은 청년들이 제 나름의 이정표를 찾아가도록 함부로 교훈하지 않는 미지근함에 있다. TV 채널의 시청률은 아쉬운 편이었지만 SNS와 바이럴, 커뮤니티를 압도한 올해의 키워드는 단언컨대 ‘추앙’이었다.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를 가진 위 드라마들을 엮을 수 있는 축은 이견 없이 특수함일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의 변호사, 지역색이 뚜렷한 제주도의 주민들, 서울의 삶에 쉽게 섞일 수 없는 촌스러운 삼남매. 이들의 삶은 우리의 삶과 교집합이 없을지언정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잘 만들어진 스토리와 세계의 힘이다. 그럼 이제 이토록 특수하고 특별한 스토리를 가능케 한, 훌륭한 동업자로서의 하드웨어를 살펴보자.
국내 콘텐츠 시장과 OTT의 각개전략
위 드라마들의 파급력에는 OTT 플랫폼과 콘텐츠 시장이라는 하드웨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오리지널 라인업을 출시하며 콘텐츠 시장에 출범한 KT 산하 ‘KT스튜디오 지니’의 작품이다. ENA라는 영세한 TV채널에 편성되었지만, KT 산하의 OTT 플랫폼 시즌(Seezn)과 넷플릭스(Netflix)에서 동시 방영되며 MZ세대 간 파급력을 높였다. KT는 나아가 ‘2022년 미디어 데이’에서 금년 9~10개의 작품을 방영 할 예정이고 50개가 넘는 드라마 제작사와 협업하고 있다는2 소식을 발표했다. 이러한 성장 가운데 올해 7월 KT의 시즌과 CJ ENM의 티빙(Tving)의 합병 소식이 들려오며, 각개전투 중인 국내 OTT 플랫폼 시장에 국내 최대 규모 공룡 플랫폼의 출범으로 달라질 시장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 IP는 OTT로 이용자를 유입시키는 최대 전략이 되었고, 그에 따라 오리지널 킬러 콘텐츠를 확보하는 경쟁으로 독창적인 K-콘텐츠들이 쏟아졌다. 독점 방영보다 독점 IP의 확보가 현재 K-콘텐츠 시장의 주된 키워드다. 스튜디오드래곤을 제작사로 보유중인 티빙은 CJ ENM 스튜디오스(STUDIOS)를 추가로 출범시켰고, 최근 인수 작업을 끝낸 미국 엔데버 콘텐트(Endeavor Content)와 함께 스튜디오 삼각편대를 구축하여 국내외 시장을 모두 겨냥하고 있다.3
레거시 미디어도 새로운 흐름에 편입하기 시작했다. 올해 SBS에서 방영한 <사내맞선>과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모두 카카오웹툰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IP 확장의 사례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웹툰·웹소설 시장도 변화를 겪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인수한 미국 웹툰 플랫폼 ‘타파스 미디어’와 영문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 미디어’의 합병 발표는 글로벌 IP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북미 시장에서 카카오엔터와 경쟁하는 네이버는 지난해 1월 세계 최대 규모 웹소설 플랫폼인 캐나다 왓패드를 인수하고, 왓패드 웹툰 스튜디오를 만들어 웹툰·웹소설 IP를 기반으로 100여 개의 드라마·영화를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네이버 웹툰 원작으로 두터운 팬덤을 자랑하며 IP 확장에 성공한 <유미의 세포들>과 같은 성과를 장기적으로 기대해 볼 만하다.
반면 정글 같은 시장에서 모든 항해가 순조로울 순 없듯 마니아층에 기반한 플랫폼을 지향해 온 왓챠(Watcha)는 매각설에 휩싸였다. “자체IP 확보가 어려운 대신 왓챠피디아를 통해 10년간 축적한 이용자의 평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국내·외의 저평가된 콘텐츠를 발빠르게 찾아 수급하는 전략”을 취해 온 왓챠는 오리지널 콘텐츠 <좋좋소>, <시맨틱 에러>로 반짝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OTT 공룡들의 싸움에 등 터지는 전망이 불가피해 보인다는 분석이다. 단,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한 왓챠피디아의 콘텐츠 추천 서비스의 뛰어난 포트폴리오와 함께 여러 기업들이 왓챠의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다양한 예측 가운데 인수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꼽히는 곳은 웨이브다. 웨이브는 지상파 방송사와 통신사인 SKT가 합작해 만든 OTT 서비스로 기존 월간활성이용자(MAU)수만 약 400만 명에 달하는 플랫폼이다. 그러나 올해 7월 티빙이 KT의 시즌과 합병하며 웨이브를 제치고 토종 OTT 중 1위로 올라선 탓에 이를 의식한 웨이브가 왓챠 인수를 통해 반전을 꾀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4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콘텐츠 시장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확장에 따라 영화, 드라마, 웹툰·웹소설까지, K-콘텐츠는 무궁무진한 스펙트럼을 보여 주고 있다. 콘텐츠는 시대와 매체의 변화에 따라 무수한 굴곡을 겪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잘 만들어진 스토리의 힘, 스토리의 원형이 되는 클리셰, 정글 같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토리텔러들의 각개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천만한 시간여행과 반복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우리 관객이 있기에 놀이터는 충분하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한다. 그 가운데 우리가 붙잡을, 우리를 붙들어 줄 화두가 필요하다. 평범한 일상을 규격하는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범위를 벗어난 어휘가 필요하다. 당신을 멈춰 서게 한 그 말은 ‘추앙’이거나 ‘붕괴’거나, ‘압도적 승리, 혹은 ‘봄날의 햇살’일 수도 있다. 한 편의 장면을 위해 창작자는 오늘도 위험천만한 시간여행을 떠나고, 우리의 인생작은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