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곧잘 휘어진다. 곧장 앞으로 직진하는 듯 보이지만 빛의 경로는 작은 힘에도 쉽게 흔들리고 왜곡된다. 그러므로 차라리 빛은 곡선에 가깝다. 우리가 한 줄 빛이라면, 경로를 이탈하여 다시금 미세한 방향 조정이 필요한 상황을 언제든 대비해야만 한다. 필자는 지난 학기 예고 없이 경로를 벗어나 잠시 낯선 곳에 속하게 되었다. 경계를 오가며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시도하는 이들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우연히 부딪치며 목격했던 반짝임의 순간들을 소개한다.
매체와 미학을 논하다
상암에는 빛나는 거인(巨人)들이 있다.
디지털미디어시티(DMC) 곳곳에 자리한 웅장한 미디어 아트 작품들. 이들 중에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다. 두 사람이 땅속 깊이 몸을 숨기고 서로를 포옹한다. 두 사람은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쌍둥이 불꽃처럼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붙은 채로 살아간다. 누구보다 뜨겁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지만 이들은 결코 서로를 마주 볼 수 없다. 이 작품의 이름은 <그들 THEY>이다. 밤이 되면 ‘그들’은 빛을 발한다. 적외선 이미지처럼 붉고 파르게 번지는 빛의 형상은 이들도 온몸에 열이 나는 진짜 ‘사람’임을 말해 준다. 필자는 종종 정처 없이 수색역 근처를 배회하곤 하는데, 이제 이 작품을 마주하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지난 학기 이른바 ‘아티스트 스콜라’이자 <그들 THEY>의 작가인 이진준 교수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함께한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CT)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Q. 지난 학기 한예종과 카이스트의 교류수학을 통해 이진준 교수의 <디지털 시대의 미학>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외부학생이 수업에 들어와 당황하진 않았는지.
최영준 TA: 교류수학 제도를 통해 서울로 올라가는 경우는 종종 보았는데, 대전으로 내려오는 학생은 처음 봤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교통비 걱정이었다. 그다음 든 생각은 학생의 전공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문화기술대학원에도 정말 다양한 전공과 이력을 가진 학생들이 입학하나 한예종에서 오는 이 학생의 배경도 매우 새로울 것 같아 기대되었다. 보다 활발한 사유와 시선의 교환이 본 수업이 제공하고자 하는 가치 중 하나였는데, 매번 번뜩이는 발상으로 질문을 던져 주어 학기 초의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 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또한,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참석해 주어 감사했다. 다음 봄 학기에는 더 많은 한예종 학생이 이 수업을 들었으면 좋겠다.
Q. 수업시간에 주로 매체와 미학을 논하였다. 수업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
최영준 TA: 본 교과목은 미학의 역사와 전통적 개념을 배경으로 최근의 디지털 기술을 리뷰하며 매체미학과 예술, 디지털 기술을 아우르는 시각에서 현대 문화와 예술을 새롭게 이해해 보는 논의의 장을 제공한다. 모든 수업은 학생의 발표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자에 대한 발표를 시작으로 논의를 이어 가며 학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자 했다.
Q. 문화기술대학원(CT) 구성원들의 배경이 다양하다. CT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안치영: 문화기술대학원(Graduate School of Culture Technology)은 디지털 기술이 삶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과학기술, 인문학, 예술, 디자인 등 다양한 학문 분야들 간의 교류를 다루는 대학원이다.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융합이 중요해지는 만큼 CT를 미래 국가 기관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첨단과학 기술과 문화적 사고를 기반으로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을 접목한 새로운 융합형 글로벌 인재양성과 문화산업을 넘어 미래 창조사회에 필요한 원천기술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Q. 자신이 선택한 한 사람의 철학자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철학을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며 얻은 것이 있다면?
안치영: 마셜 매클루언의 철학을 한 학기 동안 배우면서 그가 주장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점을 염두에 두며 매체 철학에 대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이루어지는 활발한 토론을 통해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주장과 ‘뜨거운 미디어’, ‘차가운 미디어’, 지구촌 및 미디어의 역사 등을 공부하게 되면서 매클루언의 대중문화 이론 및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전자시대 또는 정보화시대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Q. 수업 중에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가장 인상 깊은 토론은 무엇이었나.
강동우: 미술관의 역할에 대한 토론 주제가 기억에 남는다. 담당했던 철학자가 주장한 내용이기도 했고, 예술 매체의 발전이나 철학의 발전이 어떤 식으로 해석이 될 수 있을지에 흥미가 있었다. 회화와 조각이 예술문화의 전부일 때 사진과 영화가 가져온 혼란은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미 사진과 영화는 우리의 삶이기에 ‘아 그땐 그랬나 보다’ 싶었다. 요즘은 많은 문화 기술들이 쏟아지며 그동안 생각했던 개념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관은 그 비유 중 하나였다. 미술관의 사례를 통해 기술과 문화의 변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지 각자의 생각으로 토론했는데, 정말 흥미로웠고 생각의 틀을 깨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계공간에서 공연하다
‘허수(虛數)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머문다.’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말이다. 수학에서 허수는 말 그대로 ‘가짜 수’이다. 실제로 수직선상에 존재하는 실수(實數)와 달리 허수는 가상의 수로서 경계공간에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허수아비의 위상도 허수와 비슷한 것 같다.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인 척 서서 들판의 좌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가상인간의 원조 격이라고 말해야 할까. 국내 최초의 메타버스 공연 <허수아비H>를 연출한 한예종 영상원 이승무 교수가 배우들의 아바타를 허수아비로 선택한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범상치 않은 메타버스 공연을 선보인 그의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지난 학기 필자가 대전으로 내려가 수업을 듣는 동안 석관동 캠퍼스에선 포항에서 올라온 손님들이 이승무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포항공대에서 온 공학도들, 그리고 이승무 교수를 비대면으로 만났다.
Q. 한예종과 포항공대의 교류수학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학기와 작년 가을학기, <산학협력프로젝트B>, <캡스톤디자인> 두 수업을 수강하였다. 수업에 대한 소개 부탁드린다.
이원준: 우연한 기회로 두 학기 교류수업을 모두 수강하게 되었다. 두 수업 모두 AT랩의 공연 <허수아비H>와 연관이 깊다. <허수아비H>는 VR기술을 활용한 국내 최초의 메타버스 공연이다. 아직은 기술적인 한계가 분명하지만, 예술가와 공학도가 서로 협업하여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교류수업은 대부분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으며, 한예종 영상원 학생과 포항공대 연구생들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공연의 예술적 완성도와 그것을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협업은 수업 이후에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Q. 두 수업 모두 AT랩의 최근 작품 <허수아비H>와 관련이 깊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디지로그’ 개념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무: 사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메타버스 작업의 본질은 아날로그의 아톰, 그리고 디지털의 비트의 만남이다. 기술과 예술처럼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을 합치려는 시도, 즉 벽을 허무는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공학도와 예술가는 서로 다른 물감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 작업할 때 종종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결국 서로의 비어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라 생각한다.
Q. 전예진, 이원준, 김병주 연구원은 같은 연구실에서 근무한다고 들었다. 김준우 연구원을 포함하여 각자 연구실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소개 부탁드린다.
전예진: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공지능의 ‘자연어 처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공연과 연관 지어 말하자면, 가상의 캐릭터가 공연 도중 하는 말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그녀>를 보았다면, 연구실의 지향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준우: 햅틱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관객들이 공연 중에 느끼는 감각과 관련된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관객이 허수아비의 손을 잡았을 때 따뜻한 온감이 느껴진다거나, 무언가를 집을 때 실제 진동과 무게감이 느껴지게 하는 것 등이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질감과 리듬감을 구현해 내는 것이 관건이다.
Q. 융합예술은 ‘경계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시선으로 바라본 융합예술과 기술의 시선으로 바라본 융합예술은 분명 다를 것 같다.
김병주: 우선 공학도가 바라보는 융합예술은 실용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술의 구현 가능성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예술 전공자들과 협업을 해 보니 작품이 전달하는 감동과 메시지 등 예술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여겨졌다. 첨언하자면 사실 공학예술이라는 분야가 특별히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
국경을 넘어서 예술하다
“6개원을 초월해야 한다.” 한예종은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무용원, 미술원, 전통예술원, 총 6개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쩌면 2007년 협동과정 추진부터 우리 학교의 예술 융합에 대한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당시 예술경영과 학과장 홍승찬 교수와 서사창작과 학과장 김경욱 교수는 협동과정에 대해 “기존의 6개원에서 전공마다 구별하여 집중적으로 받았던 특정한 교육이나 제한적인 장르를 벗어나 필요에 따라서는 우리 학교 6개원의 질 좋은 환경과 교육을 모두 접할 수 있도록 하여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1 학교 내부의 전공을 가로지르는 협동과정을 넘어, 앞서 살펴본 다양한 교류수학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현재는 AMA+ 장학 사업을 통해 각국의 예술 인재들이 한예종으로 향하고 있다. 이에 더해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해외 유수 대학과 교류하며 예종인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학기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다녀온 미술이론과 4학년 김보경 학생을 만났다.
Q. 지난 학기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de Dijon)을 다녀왔다. 특별히 프랑스라는 나라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보경: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틈틈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자연스레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18, 19세기 미술을 좋아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작품을 실견(實見)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디종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도시다. 프랑스 내에서 이동이 편하고, 다른 나라에 방문하기도 쉬울것 같아 선택했다.
Q. 사진, 퍼포먼스, 비디오, 미술사, 철학 수업 등 실기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수업을 수강하였다. 수업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김보경: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는 아트와 디자인과로 나뉜다. 나는 아트과(조형예술과) 수업을 주로 들었다. 우선 사진 수업은 카메라, 조명 등을 다루는 실기와 작가들을 소개하는 이론 수업으로 구성되었다. 퍼포먼스 수업의 경우 강당과 같은 곳에서 움직임을 통해 감각을 깨우는 활동을 하였는데, 학생 개개인의 생각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와 메시지를 자유롭게 표현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물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사조를 넘나들며 작품의 공통점을 찾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 미술사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Q. 본인 이외에 국경을 넘어온 다른 나라의 교환학생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김보경: 유럽권에서 온 교환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아시아, 남미 등 여러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구의 작품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언어 실력이 부족한 경우 그의 작업물을 통해 의도를 이해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 사진만으로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는 친구들을 보며 예술이야말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빛의 휘어짐에 관해 이야기하며 글을 열었다. 글을 마치며,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바다에 불시착한 주인공이 육지를 향해 힘겹게 한 발 한 발 걸어 나오는 장면. 이 장면은 바다 속의 미물에서 진화를 거듭해 걸어온 인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중력(gravity)은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현실의 힘이다. 중력은 지구를 일정한 속도로 자전하게 하며,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게 한다. 중력이 있기에 계절이 있고, 하루가 있으며, 일상이 있는 것이다. 사실 때때로 빛이 휘어지는 이유 역시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반복되던 일상에 작은 변화라도 찾아오면 지레 겁을 먹곤 한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잠시 경로를 이탈해도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가 정말 빛이라면, 언젠가 이리저리 서로에게
부딪쳐 별안간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