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극장의 열기는 대단했다. 세로로 넓게 펼쳐진 무대는 시간의 플랫폼을 누비는 기차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님 손에 떠밀려 승차하던 유년 시절, 새로운 첫걸음에 두근거리며 발을 내딛던 대학 시절, 그리고 방에 갇혀 한 사람의 아내로서 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결혼 생활까지. 이야기는 실비아 플라스의 짧은 인생 30년을 다루고 있지만 그 함의는 30년을 뛰어넘어 현대의 관객에게까지 스며든다.
인생을 기차로 표현하는 비유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는 이를 ‘왕복 열차도 없고, 목적지도 모르는 여행’으로 구체화하며 인생의 일방성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실제의 기차와 달리 인생의 기차는 이미 출발한 뒤엔 멈출 수 없다. 도중에 기차에서 내리는 방법은 단 하나.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들의 눈을 피해 비상정차 줄을 당기는 것. 실비아 플라스에게는 자살 시도가 바로 그런 비상정차였다.
실비아 플라스는 영국의 시인으로 8살 때 첫 시를 발표했으며, 스물에 이미 400편 이상의 시를 썼다. 그런데 실비아의 죽음은 그의 시만큼이나, 어쩌면 시보다 더 유명하다. 그가 살면서 총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자살 시도는 8살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실비아의 시는 상당수가 죽음과 아버지에 대한 비가(悲歌)였기에 호불호가 극명했다. 아름답지 못한 시, 정신 나간 계집애, 미성숙한 여류 시인. 이것이 실비아를 바라보던 당대의 시선이다. 이는 실비아로 하여금 21살에 다시 한번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지만 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이 실비아를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당시 여성은 아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 한 명의 개인이 될 수 없었다. 테드 휴즈가 ‘천재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오롯이 창작에 집중할 때 실비아는 육아와 가사를 전담해야 했다. ‘아이를 키우다 짬이 나면 시를 써 봐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심지어 테드 휴즈는 두 아이가 있는 상황에 외도까지 저지른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던 실비아는 결국 1963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는다. 아이들에게 가스가 샐까 봐 테이프를 꼼꼼히 붙여 둔 채였다.
뮤지컬은 이러한 실비아의 삶을 따라가며 한 여성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쯤 되면 한 가지 걱정이 생길 수 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필연적으로 폭력적이고, 견디기 힘든 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허나 이는 기우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가 갖는 가장 큰 가치는 본작이 ‘불행 포르노’가 되지 않고자 섬세히 다듬어진 흔적과 고민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뮤지컬은 결코 비극 속에 침잠하거나 폭력적으로 불행을 전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 살아갈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곧 삶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는 유일한 존재다. 뿐만 아니라 그 유한성을 통해 새로움을 찾아내며, 한계를 가능성으로 승화시킨다. 만일 삶에 끝이 없다면 그것은 정처 없는 영원한 여행이므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허나 인간에게는 수명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 제한을 통해 비로소 남은 생은 가치를 가지며, 한정적 삶의 밀도가 높아진다. 즉,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면서 유한성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기억과 상상을 용접한다.1 이 기억과 상상은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재귀적이다. 기억과 상상, 다시 말해 인간만이 가지는 창의력은, 죽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을 빛내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실비아 플라스 시의 원동력이 발생한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크게 위안이 된다. 그 덕분에 수많은 지겨운 밤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격언은 분명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는 실비아의 삶에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와도 직결된다. 우선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실비아는 삶과 죽음의 모순에 직면했다. 기실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어 가는 것과도 같다. 살기 위해 행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짐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이다. 그리하여 실비아에게 아버지는 그리움과 원망의 대상이자 결핍의 원천으로, 벗어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 실비아는 이 결핍을 남편 테드 휴즈로 채우고자 했고, 실제로 남편과 아버지를 동일시했다. 그런 남편의 외도는 실비아에게 있어 아버지의 죽음과도 같은 수준의 충격과 트라우마를 낳는다. 이렇듯 실비아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아버지의 죽음이, 남편의 배신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실비아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가지를 시도한다. 하나는 폭발적인 감정을 눌러 담아 시를 쓰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자살 시도를 하는 것. 역설적으로 실비아는 죽음에 가까워짐으로써 삶을 인식하고자 했다. 이는 실비아의 마지막 자살 시도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집주인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는 쪽지를 남겼으며, 가사 도우미가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추어 가스 오븐을 켰다. 두 번의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쳤듯 이번에도 그러리라 예상한 것이다. 뮤지컬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실비아는 결코 영원한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삶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여유, 비상정차가 필요했을 뿐.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살은 여러 ‘한계 상황’(Grenzsituation) 가운데 어떤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으로서 가장 빼어난 가능성일 수도 있다. 그가 단지 하나의 생물체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생물체가 아니라면 역시 자신의 생명을끊을수없을것이다.2 즉자살은인간이거스를수없는 죽음의 거대한 힘 앞에서, 삶과 죽음의 권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실존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실비아에게 자살 시도는 시를 쓰는 행위와도 같았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나아가 삶의 모순과 부조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행위. 허나 이 불꽃 같은 저항은 결국 실비아의 생을 끝장냈다. 이 결말은 진정 실비아가 원했던 것일까? 뮤지컬은 이러한 발상에서부터 실비아의 결말을 바꾸고자 하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하되 실비아의 삶과 고통, 숱한 자살 시도를 무시하거나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향하는 방향을 시사한다. 나아가 그 고통이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지도 고민하도록 만든다.
만일 테드 휴즈와의 결혼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면? 만일 실비아가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던 날, 실비아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상태를 묻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를 잡아 줄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 젊은 시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뮤지컬은 가상의 인물 ‘빅토리아’를 등장시킨다. 빅토리아는 실비아에게 이런 노래를 부른다.
‘우린 모두 술 탄 물을 마신 거야. 술 마시면 술 취하지 어쩌겠어.’ 사회는 여성에게 ‘술 탄 물’을 주고, 세상은 우리를 ‘취하게’ 하여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압박은 여성의 이성과 판단력을 흐린다. 꿈보다는 내조를, 시보다는 육아를 택하라고. 이 독 묻은 유리잔은 너무도 거대해서 개인이 거절하기 힘들다. 실비아의 사망 이후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를 가두던 유리종은 여전히 유효하다. 뮤지컬 속 실비아는 유리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뿐이라고 말하며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그러나 빅토리아가 그것을 만류하며 말한다. 살아가라고. 살아서 글을 쓰라고. 지금 빅토리아가 실비아를 살리듯 실비아의 글이 다른 소녀들을 살릴 것이니 결코 쓸모없지 않다고 말이다. 이러한 연대는 살아갈 힘이 된다.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며, 이는 술에서 깨어날 각성제다. 유리종을 함께 부수기 위한 동료의 존재는 술 몇 모금보다 위대한 것이다. 비록 현실의 실비아 플라스가 죽었다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도, 우리는 그 의미를 재고할 수 있다.
인생의 표면은 늘 거칠다. 때로는 불쾌할 정도로. <실비아, 살다>를 보던 도중 이지러지는 조명으로 인해 하드렌즈가 눈 옆으로 돌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 일이 있었다. 렌즈를 찾느라 손댄 눈의 표면은 물컹거리고 습했다. 늘 달고 다니던 눈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낯설었다. 우리가 늘 버티는 삶의 맨얼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토록 뭉근하고 질척할 것이다.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는 눈을 부릅뜨고 그 지난한 생을 버티고자 했던 시인이다. 비록 그의 눈은 감겼지만 그의 글은 남아 현대의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제공해 준다.
때로는 삶의 기차를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자. 인생에는 비상정차가 필요한 법이니. 하지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내 손을 잡아 줄 이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실비아, 살다>는 그런 동승객이 되어 줄 공연이다. 관객들은 뮤지컬로 재구성된 실비아의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실비아의 삶을, 나아가 스스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삶은 비록 바스러지더라도 눈부시게 반짝인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 삶의 조각은 끝끝내 유리종을 깨부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