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정든 이들을 교정으로부터 떠나보내기에 아쉬웠는지 날씨마저 짓궂었다. 누군가는 학교에 남아 학업을 이어나가고, 누군가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직업적으로든 학업적으로든 말이다. 이때 종종 회자되었던 우리 학교의 농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 학교에는 이 농담을 공유하고 시시덕거리던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욱 많겠지만. 이것은, 나는 어떻게 들어왔지? 쟤는 어떻게 들어왔지? 졸업하고 뭐하지? 와 같은 마주하기에 싫지만 마주해야만 했고,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질문들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마지막 질문에 비하면 앞의 두 질문은 한 철에나 하고 지나가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늘 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의 연속이었던 나날들을 되돌아본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학과에 입학한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생각보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입학하기 전부터 내가 그려 놓은 탄탄대로의 미래 계획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더욱 다른 무언가를 갈망했고, 여기저기 다른 길을 넘보기 일쑤였다. 한참을 헤맸다고 믿어왔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는 것에 잠시나마 안도하려던 찰나, 졸업을 맞이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를 벗어나 내 존재를 스스로 증명해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내가 넘고 싶어 하는 울타리는 나를 허락해 주지 않았고, 여전히 지금도 나는 오매불망이다. 그래도 그 울타리만 넘으면 진정한 나의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과 함께 나는 싸우는 중이다. 그러던 와중 듣게 된 이민휘의 정규2집 《미래의 고향》은 나의 심리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앨범 커버를 보면 아이러니하다.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에 반항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신성한 곳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예수의 동상은 무너져가는 쓰레기 더미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다. 그리고 흔히 고향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옛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미래라는 닿을 수 없는 곳과 결합된 제목이 눈에 띈다. 나아가 제목과 커버 이미지는 연관 지어 상상하기에 어딘가 이질적이다. 팔 벌려 맞이하는 예수가 기다리는 곳은 환희의 공간이 아닌 어두컴컴한 곳이었나. 그리고 그곳이 고향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을 연관 지어 생각하려는 것 또한 하나의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은 이런 심오한 이질성들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연히 친구의 사진첩을 보고 마음에 들어 먼 훗날 앨범 커버로의 사용을 허락받은 것일 뿐1이라는 뮤지션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말이다. 어쩌면 의미 없이 떠도는 것에 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글은 이민휘의 《미래의 고향》을 여러 방면에서 심오하게 해석하는 것을 지양한다. 조금은 더 감상에 솔직해져 보고자 한다.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며.
곡은 전반적으로 우리를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곡 중간중간 존재감을 드러내는 플루트의 멜로디가, 오케스트레이션의 구성이 마치 옛것의 느낌을 그려내는 데 일조한다. 이는 마치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나의 상태를 노래의 멜로디가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앨범은 무언의 음악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첫 번째 트랙의 제목이 〈파란 꽃〉이다.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파랑새의 의미로 파란색이 주는 그 심상 혹은 의미를 짐작해 볼 뿐이다.미지의 미래에 대한 동경 혹은 희망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거닐다 두 번째 트랙, 〈정거장〉으로 향하게 된다. 작가는 사람들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처럼, 어딘가에 홀린 듯 “어딘가 당도할 것처럼” 매일 반복되는 기차에 오른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향하는 먼 곳은 미래인가, 과거인가. 내가 추억할 수 있는 곳으로 가며 〈귀향〉 누군가가 반겨 주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탓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개인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이 곡의 화자는 고향에 대한 알 수 없는 환상통을 앓게 된다. 그것을 마주하고는 〈거울 치료〉 결국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음을 〈무대륙〉 인정하게 된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것이 비로소 꽃이 되었다2고 했던가. 하지만 화자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포기하면서 이유도 모른 채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렇게 화자는 스쳐 간 수많은 사람에게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인지 이름 모를 그들을 ‘우리’라고 칭하면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화자 역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 이들을 품어주고자 한다.3
이렇듯 이 앨범은 정거장에서 시작해 다시 또 정거장을 지나는, 어쩌면 매일의 우리를 표현한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와도 같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요동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 그리고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낙원 같은 미래의 고향을 상정하며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를 상기시킨다. 이민휘는 스스로가 작업을 할 때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작업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앨범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갖는 듯한 느낌도, 공간감을 연상시키는 각각의 가사도 모두 이 때문에 가능했나 싶다.
1
문동명, “[인터뷰] 싱어송라이터/음악감독 이민휘”, 《씨네플레이》,
2024.01.31
2
김춘수의 시 〈꽃〉의 내용을 변형 인용.
3
해당 문단에 표기된 괄호는 리뷰에서 다루는 앨범의 트랙인 곡제목,
큰따옴표의 문장은 가사의 일부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뮤직비디오에서 고향이 너무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점이다. 몇 년 전에 이민휘가 아마도 미래의 발매될 예정인 해당 앨범을 상상하며 말했을 인터뷰가 떠오른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4고. 그렇다면 고향은 지리적 의미의 고향 그 이상의 것을 담을 수 있는 공감각적 추상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표상적인 의미 너머의 고향으로 해석될 때 비로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고향은 감상자에게 다채롭게, 또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음악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면 무엇 때문일까. 이민휘는 무키무키만만수의 만수와는 정반대 선상에서 동시대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날의 만수가 자유로운 영혼을 노래했다면, 오늘날의 민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를 비롯해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을 조금은 무거운 주제를 포용한다. 덕분에 고향의 의미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 비록 더 이상 지리적 개념에서 고향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칭할 수 있는 범위와 대상이 더욱 모호해졌지만, 오히려 그러므로 우리가 ‘고향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더욱이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이 노래의 출발점이었을까. 마치 이들 모두가 각기 다른 (미래의) 고향을 유영하지만 결국 추상적이며 현대적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였음을. 그렇기에 더욱이 이 앨범의 트랙들은 당신의/우리의 고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다가오는 듯하다.
그는 마지막 노래 〈미래의 고향〉에서 “오늘 부르는 노래는 내일 부를 노래”임을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이는 행위가 담보하는 위안과 연대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표현임을 스스로 밝히는데5, 그가 말하고자 했던 음악적 연대란 무엇이었을까. 내일 부를 노래 또한 결국 오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은 지금의 노래에 충실하자는 것 아닐까. 그렇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루하루를 오롯이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각박한 세상을 항해하는 방법은 오로지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다만 미래에 와서 고향을 찾을 때, 최소한의 좌표를 남겨놓아 보자. 그렇게 나만의 지도는 한 두 지형씩 완성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서투를지라도.
무키무키만만수 시절 이민휘의 노래 〈무키무키만만수〉의 한 소절을 인용하며 오늘날의 일기를 매듭지어보고자 한다.
이제는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지경에 왔네 우린 잘할 거야 괜찮을 거야 가늘고 길게 갈 거야
4
이이재, “뮤지션 이민휘, 〈빌린 입〉은 닫힌 입을 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INDIEPOST》, 2017.02.02
5
이재훈, “이민휘, 느슨한 음악적 연대의 ‘우아한 場’... ‘미래의
고향’”, 《뉴시스》, 2023.12.15
글 김민정
드넓은 예술계에서 어떻게 내 한몫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예술이 왜 좋은지 좀 더 태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