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2024 SPRING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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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리가 기원하는 이 예외적인 지점들을
〈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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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네 달간 폴란드에 머물렀다. 바르샤바와 크라쿠프를 오가며 여러 편의 연극을 보았다. 외국어 대사를 해독할 길이 없어 이미지들 사이에서 평화로운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영어 자막을 제공하는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난처한 표정으로 서먹한 언어를 더듬더듬 읽어나가다 이내 진이 빠져버렸다. 극장 꼭대기 얇은 스크린에 영사되는 자막을 읽다 보면 배우들의 움직임을 놓치기 일쑤였고 무대를 활보하는 낯선 몸들을 한참 바라보노라면 조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몸을 볼 것인가 말을 볼 것인가 시시각각 선택해야만 했다.

무대가 전환되며 스크린이 가려지거나 오퍼레이팅 실수로 자막이 멈출 때면 나 혼자 다른 곳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이 인식의 순간은 실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의 소외감. 500석의 극장에서 무대가 아닌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다음 자막을 기다리는 관객은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연극이 직조하는 허구의 세계로부터 포물선을 그리며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로 되돌려졌다. 공연이 다음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정지의 구간에 홀로 정체되었다.

외국인 관객이 극장에서 겪는 고충은 우리가 언어를 낯설게 느낄 때 맞닥뜨리는 괴리감의 한 양식을 드러낸다. 베케트의 독자로서 말하자면 모든 언어는 언어로부터의 괴리이며 언어가 정지되고 지연되는 구간에서 문은 열린다. 그것은 존재를 탐색하는 코기토의 문이며 진리를 향한 문이다. 베케트의 극장에 들어선 이상,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기란 불가능하다. 말의 정지 속에서 무수한 문이 열리는 황폐한 극장. 이곳에 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놓자.

앙상한 나무 뒤편으로 언덕이 펼쳐져 있다. 천장을 향해 둥글게 굽어 올라가는 붉은 땅. 바닥은 벽이 되고 벽은 언덕이 된다. 발밑에 펼쳐진 황량한 광야는 누군가가 도래할 구릉이자 해와 달이 떠오르는 머나먼 지평선이다. 단출한 무대는 관객들의 원근 감각을 교란하며 연극의 시간관과 공명한다. 앞선 것과 뒤선 것, 벌어진 일과 벌어질 일, 어제와 오늘, 새벽과 황혼을 구분할 수 없는 이 세계는 ‘아직’의 세계, 기다림의 시공간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있다. 에스트라공을 연기하는 신구와 블라디미르를 연기하는 박근형이다. 한 사람은 시인이고 다른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한 사람은 자살하려 하고 다른 사람은 자살을 방해한다. 한 사람은 고도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비관하고 다른 사람은 애처로우리만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살을 방해하는 자가 있어 자살을 시도하는 자가 있듯 두 사람은 긴장 속에서 서로의 존립을 지탱한다. 이들은 블라디미르의 말처럼 “인류 전체”1다. 바디우가 베케트의 연극 작업을 두고 “늙고, 단조롭고, 거의 서로를 증오한다 할지라도 커플이 보여주는 무제한의 가능성들에 대한 제시, 이원성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결과들에 대한 언어적 포착”2이라고 말했듯 〈고도를 기다리며〉3는 인류의 기본 단위로 ‘둘’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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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번역, 민음사(2003),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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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서용순, 임수현 번역, 민음사(2018),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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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작, 오증자 번역, 오경택 연출, 2024.2.23.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 관람

우리는 인류의 자리에 놓인 두 몸을 본다. 본디 몸이란 취약하며 부조리한 것이다. 수치화하거나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굶주림이나 병, 쾌락이나 고통처럼 결핍과 초과를 통해서만 인식되는 의미 작용의 구멍이다. 고통은 몸으로부터 발생한다. 예수가 몸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온 까닭은 고통받는 자로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도에게는 몸이 없다. 몸을 갖지 않으려는 신의 주춤거림. 고도는 지킬 수 없는 약속에 다름 아니다. 고고가 자신을 예수와 늘 견주어 왔다고 말하듯 고고와 디디는 고도의 완강한 부재 앞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몸으로서 분절 없이 반복되는 고행을 통해 스스로 메시아 되기를 수행한다.

신구와 박근형, 그리고 박정자의 몸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건강하고 유능한 ‘표준적인 몸’과 거리가 멀다. 그들의 몸은 배우로서 뿜어내는 정력적인 에너지와 노인으로서 겪는 신체적 피로 사이의 긴장 상태에 놓인다. 관객은 경외의 마음으로 대배우들의 무대를 지켜본다. 바지가 벗겨진 채 무대 위에 어수룩하게 서 있는 신구의 옆모습과 자신들이 이곳에 있음을 고도에게 그저 전해만 달라 간청하는 박근형의 측은한 고갯짓을, 장황한 독백을 늘어놓은 뒤 숨을 전부 빼내며 바닥에 들러붙듯 쓰러지는 박정자의 몸을 본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예비하는 늙은 몸. 쇠잔하고 악착같은 베케트의 말이 발화되기 위해 고안된 장소이자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하는 역량의 조건이다.

배우들은 연극의 부조리한 세계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전략을 짜지 않는다. 말하자면 연기의 단위 사이사이를 개연적으로 설계한다거나, 의도나 해석을 동원하여 의미의 공백을 메운 뒤 그 위에 부조리적인 느낌을 덧칠하는 식의 작업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연극과 현실을 매개한다. 여러 시간이 중첩된 그들의 몸이 이미 부조리의 원형이며 몸의 범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 삶으로 연기하니까.” 삶으로 연기한다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배우들의 삶이 대중매체를 통해 가시화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 신구와 박근형, 그리고 박정자의 몸은 정말로 몸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드러내는가? 노장이라 칭해지는 그들은 부유하고 유명하며 권위 있는 전문가로서 오히려 몸의 완성이라는 환상을 재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공연에서 감동이라는 것은 배우의 권위가 늙음의 다양한 측면을 봉합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공연은 출연진의 연기 경력이 도합 228년임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홍보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연장자일수록 훌륭한 능력을 갖춘다는 가부장적 믿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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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을 리뷰하기 위해서는 연극이 내어놓는 가치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제작 측면의 수월함과 야망을 차치하고, 지금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로 결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전 희곡을 원작에 충실히 재현하는 작업은 동시대 예술 및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나.

이 공연의 기획 의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훌륭한 배우들이 기념비적인 희곡을 연기하고 이를 통해 관객들이 각자의 고도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 예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체계를 재규정하며 생산된다. 이러한 재개념화의 운동을 작품의 자의식이라 한다면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자의식이 없다. 나는 영예로운 무대와 기립박수 치는 객석 사이에서 사유의 절벽을 본다. 그 틈은 자본으로 메워져 있다. 문제는 이 연극이 연극에 대해 사유하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연극의 대표 자리에 놓인다는 데 있다. 나의 관심사는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정통 연극’ 열풍이 드러내는 틈, 문화 예술 자장과 대중들의 예술 수용 경험 전반에 부재하거나 희박한 동시대 연극의 자리를 성찰하는 것이며 연기 예술의 급진적 가능성을 규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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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예술은 이데올로기를 가지는가? 작품이나 텍스트의 맥락과 별개로 연기 예술만의 이데올로기와 미학을 논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언어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는 통념 때문이다. 배우 김신록은 이에 반대하며 연기를 비평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바 있다.4

실로 연기에 대해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연출가가 배우에게 “보라색으로 연기해”라고 지시하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듯 연기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감정, 흉내, 매력, 끼의 영역으로 이야기된다. 인물에 대단히 몰입하여 연기한다는 식의 찬사는 연기의 영역을 픽션적 내러티브를 가진 작품에서의 인물 수행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이야기 속 배역을 해석하여 표현하는 것만이 연기 예술의 영역은 아니다. 매체와 작품에 따라 요청되는 연기가 다르겠으나 연극을 쓰고 만드는 나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배우는 작품이 구현되는 형식을 찾을 뿐 아니라 연기 자체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몸을 통하여 관객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연기 예술은 연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희곡, 연출, 기획과 별개로 급진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까? 통상적으로 연기에 있어 자의식이 있다는 말은 혹평이었다. 이 말은 배우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되며, 연기하는 배우 자신을 포함하여 작품 외부에 대한 인식을 소거해야 한다는 연기 예술의 오래된 규범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연기 예술을 언어가 없는 곳으로 상정함으로써 체제를 사유하지 않는 무책임이 허용되는, 권력과 결탁하는 장소로 탈바꿈시킬 위험이 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선택과 집중’을 문화예술 정책의 기조로 삼는다. “성공한 1편이 실패한 9편을 먹여 살린다.”5, “문화·예술도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좁은 문을 만들어 철저히 선별해야 한다.”6며 규모와 파급력을 척도로 예술을 서열화한다. 문화예술을 자유경쟁으로 내몰아 자본과 권력에 복무시키겠다는 기획이다. 그 결과 문체부 문화예술 분야 예산은 2023년 대비 436억 원 감소했으며7 이에 따라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은 예년 대비 740억 원에서 609억 원으로 삭감되었다.8 예술지원제도의 축소와 지각변동을 살펴보면 현 정부의 목표는 해외에 내놓을 법한 파급력 있는 예술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평, 연구, 실험과 같은 분야는 손쉽게 누락된다. 예술을 생산하되 재규정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예술은 자율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권력과 자본에 의해 유통되고 만다.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재의 문화예술 정책의 지형도 속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야말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성공한 1편’,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우수 창작물’이 아닌가. 자의식 없는 열연이 한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므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질문한다. 예술 창작의 환경이 망가진 오늘날 예술의 급진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연극이 현 정권의 순풍 속에서 대중들에게 동시대 연극의 대표로 경험된다면, 이 ‘대표’의 자리를 가능케 하는 예술 간의 서열을 어떻게 부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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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의 이러한 작업으로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의 “[리뷰] 배우 김신록의, 누군가 할 때까지 일단 나라도 한다! 연기비평”, 웹진 《연극 in》의 ‘배우가 만난 배우’, 단행본 『배우와 배우가』 (안온북스, 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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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1편이 실패한 9편 먹여살려...문화예술 지원 선택과 집중할 것[파워인터뷰]”, 최현미, 《문화일보》, 202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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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예술을 정치 도구 삼는건 공산국가나 하는일...새 틀 짤것””,김윤덕, 《조선일보》, 2023.8.28.
7
「2024년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의 시각과 전망」, 권용민, 웹진 《에이스퀘어》 vol.8
8
“대폭 삭감된 문화예술진흥기금 예산, 문화예술 생태계 망치는 윤석열정권의 문화예술정책”, 심지후, 《사회주의자》, 20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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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나치를 피해 은거하며 쓴 여러 작품 중 하나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은둔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그가 죽기 전까지 희곡을 발표하고 직접 연출하며 연극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낯설게 느껴진다. ‘말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그것이 아무리 무언극이라 하더라도) 연극만큼 큰 장해물은 없기 때문이다. 베케트는 언어와 글쓰기를 집요하게 탐구하면서도 몸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다. 자신의 글쓰기를 문자의 권위 바깥에 놓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의미의 공백인 몸으로부터 진리의 자리를 찾으려 했을 수도 있다. 베케트가 두 명의 인물을 통해 ‘하나’의 폐쇄성을 벗어나 다수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내듯 그의 무대 위 몸들 또한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린 장소로 존재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여기저기 꽁꽁 묶여있을지라도 말이다.

나 역시 닫힌 방과 열린 극장 사이, 말과 몸의 사이를 서성이며 이 둘을 구분하지도,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속하지도 못하는 즐거운 떠돌이로서 베케트에 대한 바디우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예술의 임무는, 모든 진리가 기원하는 이 예외적인 지점들을, 우리의 인내가 재구성해 낸 조직물 안에 간직하고 붙들어, 별처럼 빛나는 것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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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각주의 책, 153p.

글 김연재
극작가. 희곡에서의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하며 문자, 말, 몸의 사이를 탐구한다. 인류세 이후의 연극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매립지〉,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