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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소정

현재의 당김음을 만들다
전소정

낮은 조도의 전시장 안, 철제 파이프 속에 자리한 영상과 조각들이 관객을 반긴다.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직조된 이미지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절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는 낯선 감각을 느끼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3》의 후보로 선정된 미술원 조형예술과 교수인 전소정 작가를 만났다. 그에게 이 전시는 자신이 만들어 온 10년간의 궤적을 살펴보는 유의미한 자리다.

《올해의 작가상》은 2012년 시작된 이래 “전도유망한 주요 중견작가들의 전시와 수상, 지속적인 후원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가능성과 비전을 제시해”1 온 수상 제도입니다. 지난 2022년 10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번 기회가 작업의 소재, 주제, 형식 면에서 어떤 변화의 계기가 되었는지, 작업 외 부분에서는 작가님의 향후 활동 방향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올해의 작가상》의 달라진 점 중, 저에게 가장 큰 변화로 다가온 것은 전시 방식입니다. 신작과 구작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주목할 만한데, 신작만을 전시하는 경우에는 작품의 실험성보다는 스펙터클에 중점을 두는 전시가 되기 쉽죠. 그러나 신작과 구작이 함께 전시될 때는 작가의 작품 세계의 궤적을 함께 되짚어보는 기획의 측면이 들어가기 때문에 전시가 더욱 밀도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거의 10년 동안 제작한 작품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는데요, 이 경험이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제 작업을 연구하는 연구자나 관객들에게 중요한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광인들의 배〉, 2016,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2분 50초.

작가님께서는 동시대의 속도감에 관심을 가져오셨는데요, 특히 그 가운데서 누락되거나 배제된 인물들의 목소리, 풍경, 시간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광인들의 배〉(2016)에서 광인, 도주자, 방랑자, 약자의 모습을 조망하며 일부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작가님께서 “근대적 인간이 과연 우리가 도착해야 할 최종 도착점인지 질문”2 했다면 작가님께서 그리는 이상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광인들의 배〉는 여러 이유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이동했던 인물들을 소환합니다. 그러면서 일종의 제도나 규범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내는 사람들의 실천에 주목하고 있지요. 더 나아가서는 비자발적인 이동으로부터 정신적 망명의 상태에 이르는 이동까지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매우 많은 예술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광인들의 배』라는 동명의 소설을 쓴 우루과이 출신의 망명자이자 소설가인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Cristina Peri Rossi)가 “Artist born to be exile” 즉, 예술가는 본래 망명자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는 예술가들이 기존의 질서나 제도를 깨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는 존재들로서, 일종의 절망과 탄생의 과정을 거듭한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측면에서 예술에 대한 은유로도 이 작업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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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3》 리플렛,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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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3》 리플렛, 국립현대미술관

작가님께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희미해진 촉각, 청각, 후각과 같은 감각을 〈Interval. Recess. Pause〉(2017)에서 대안적인 소통과 이해의 매개체로 사용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본 작품에서 보이는 클로즈업되고 크롭된, 노이즈에 뒤덮인 이미지의 집합이 일련의 조직체와 같다고도 느껴졌는데요, 이러한 표현 방식이 촉각, 청각, 후각적 감각을 상기시키는 것, 나아가 감각(혹은 이미지의 비선형적 연결)이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기억과 맞닿아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Interval. Recess. Pause〉, 2017,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3분 47초.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시각적인 감각 이 외의 후각, 촉각, 청각 등의 감각이 비가시화된 영역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하거나 들리게 하고 나아가서 만질 수 있게 하는 가능성에 대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Interval. Recess. Pause〉는 비가시적인 감각들로 남아 있는 유년기의 기억을 주로 다루고 있어요. 이는 한국계 입양인들이 공유해 준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요, 그들이 들려준 기억은 흥미롭게도 시각이 아닌 맛이나 소리 또는 촉각적인 감각에 기반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 작업은 그들의 진술에 대한 저의 이미지적 대응 혹은 경로 찾기 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인 기억에 대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서로 다른 배치를 통해서 누락된 개인사를 다시 쓰는 방법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절망하고 탄생하라 Despair to be Reborn〉(2020)에서 서울, 파리, 도쿄를 오가며 기록한 이미지들과 TV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차용한 클립들을 비선형적으로 오버랩하여 시공간의 만남의 가능성과 간극에 주목”3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나아가 ‘현재성’ 혹은 ‘현재’의 보편적 정의를 질문하는 시도로도 보입니다. 이러한 비선형적인 시간성과 속도감에 대한 고찰을 작업의 구조로 불러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저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듯이 방대한 읽기와 보기, 그리고 이동을 했어요. 사실 현재라는 개념이 견고해 보이지만, 발을 딛고 선 이 곳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과거의 레이어를 읽고, 미래라는 충동이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봐요. 그 사이 진동으로서 현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가령 이 작품에서 등장한 체펠린 호는 1930년대 유럽에서 아시아를 횡단한 최초의 비행선인데요, 이를 통해 이동과 횡단, 그리고 도시 간의 연결 안에서 현재의 시간을 다시 보고자 했어요. 그래서 제게는 시간과 공간의 축을 이동하는 경험을 통해 현재로부터의 낙차 안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것이 공백일 수도 있고, 제가 다시 써 내려가야 하는 시간이나 역사일 수도 있을 거예요.

〈절망하고 탄생하라〉, 2020, 단채널 비디오, HD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4분 45초.

그리고 이 작업은 「AUMAGASINDE NOUBEAUTES」라는 제목의 1930년대에 쓰인 이상의 시 주변을 맴돌지요. 이 시에서는 서울에 세워진 프랑스식 백화점을 본뜬 일본식 백화점이 등장해요.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 있었고 서울에는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있었어요. 저는 이 시에서 그 시점을 바라보는 시인의 날카로운 지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하나의 프리즘 삼아 도쿄와 서울과 파리의 횡단 가운데, 100년의 시차 안에서 오늘날 서울의 속도감을 다시 보고자 했던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는 작동하는 스위치를 켜는 일일 수도 있고, 생각의 방향성이 전환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보는 사람이 자기만의 버전을 만들 수 있는 작업 같이, 굉장히 많은 읽기가 일어나는 상황을 떠올리는데 이상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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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상점》, 아뜰리에 에르메스

〈Syncope〉(2023)는 보다 소리와 속도의 감각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드러나는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이 가운데 “덜컹거리는 기차 진동음, 모국어 바깥에서 쓰인 여행하는 말들, 기보를 넘는 악기의 파열음. 이 작업은 각자 다른 이유로 이동하는 사람들, 국경을 물리적으로 가로지르는 열차, 그 주위를 진동시키는 소리의 진동과 음악, 데이터와 기억”4이 교차합니다. 이 교차점에서 느끼신 것들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Syncope〉를 구상할 때 떠올렸던 것이 기차였어요. 19세기에 아시아와 유럽을 횡단하면서 당시에 꿈꿨던 근대적인, 혹은 합리적인 세계는 기차의 속도로 대변되죠. 실제로 열차는 국가의 건설과 식민지 개척에 활용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기차의 변속이나 탈선에 가능성이 있지 않은 지 의미심장하게 상상하곤 했어요. 기차의 멈춤과 지연 가운데 누락된 이야기들을 불러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Syncope〉, 2023, 단채널 4K 비디오,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9분 30초.

동시에 아시아에 대해 떠올렸어요. 서구로부터 호명된 허구적이거나 환상으로서의 아시아가 아니라 가소성을 가진 방법으로서의 아시아가 가능하지 않을까 의문을 가졌던 것 같아요. 연장선상에서 인간이나 동물, 기계와 유기체, 남성이나 여성과 같이 이분법적인 이항 대립을 넘어서 유목적인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을 떠올려 본 것이죠. 이동하는 식물이자 변신과 변형을 거듭하는 신체에 관한 생각도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데, 작업을 하며 그들과의 연대를 상상하게 되었지요.

이 작업은 오랜 동료인 두 여성 연주자와 함께했어요. 그들은 삶 가운데 이주를 마주한 이들이기도 해요. 첫 번째 이주가 그들에게 원치 않게 주어졌다면 두번째 이주는 소리를 따라 이동하면서 자발적인 것이 되지요. 이들과 함께 음악을 만드는 여정이 작업의 주된 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소리에 집중하고 있어요. 가야금의 농현(弄絃)과 가믈란5 소리가 영상의 곳곳에서 무언가를 예견하는 징후처럼, 혹은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하죠. 악보가 합리적인 세계라고 한다면 농현은 이에 기재되지 않고 벗어나 어떤 틈에 있는 소리인 셈이죠. 가믈란은 잊혔던 순간을 환기하는 음색을 지니고 있어요. 경력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합주에 참여할 수 있지요. 기존의 음을 잘라내고 다시 이어 붙여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샘플링의 개념도 있고요. 이것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해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개념을 비디오를 조직하는 방식에도 적용해 보고자 했어요.

작가님께서는 〈Syncope〉(2023)를 제작하며 “지역적, 기술적 다양성을 인지하는 사유와 차이를 누락시키지 않는 역사 쓰기, 기존 분류나 제도적 모델에 들어맞지 않는 실재 혹은 상상의 주체성을 위한 플랫폼”6 등을 상상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Syncope〉를 제작하면서 여성의 디아스포라가 기입되는 방식, 아시아라는 시공간에 대한 상상, 로컬리티 또는 자본에 의한 세계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여성 문학가들의 예술적인 실천을 참조했지요. 예를 들면 김혜순 시인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며 비가시적인 사이 존재들에 집중하죠. 김초엽 작가와 같은 SF소설에 등장하는 기계 신체를 보면 변신과 변형을 거듭하는 미래적인 신체나 끊임없이 이동하는 식물이 떠오르기도 해요. 시인이자 고고학자였던 허수경 시인이 시간과 자연을 감지하고 다루어내는 태도나 방식을 참고하기도 했죠. 그래서 상상의 주체성을 위한 플랫폼이란 근대적인 시간과 진보 서사가 갖는 단순화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여러 물질과 다양한 생명체들의 얽힘과 배치로 파악해 보는 지대죠. 이를테면 진보의 리듬이나 시간의 통일성에서 벗어나 다운율의 배치를 영상이라는 무중력 공간 안에서 만들어내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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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3》 작품 소개글,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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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믈란(Gamelan)은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현악기, 타악기, 혹은 보컬등을 이용한 합주 민족음악의 총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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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3》 작가 인터뷰 중 발췌,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전시 전경, 사진 장준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동명의 책 『Syncope』(오르간프레스, 2023)는 비평가, 문학가, 연주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필자가 협업하여 영상이 만들어지는 동안 동시에 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님의 말씀처럼 “비평의 당김음을 만들어 영상비평을 실험하는 책”7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비선형적인 시간성의 또 다른 형식이 작품 내외부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협업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를 꾸리는 과정에서도 물론 다양한 방식의 협업이 일어나지만, 책의 경우 협업은 동료들과 공통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전시장에서 이 책이 어떻게 작동할지는 저에게 아직 질문으로 남아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책은 관객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물이예요. 그래서 이 책이 유통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장소로 가지고 가 책의 시간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중요했어요.

사실 작품과 함께 책이 발행되면 대부분 책이 작품에 대한 해설로 읽히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그 기대를 배반하고 필자들과 함께 작품을 둘러싼 시간에 대해 실험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동명의 영상 작업인 〈Syncope〉를 진동시키는 소리, 음성, 기록, 비평의 차원에 있기도 하고 동시에 영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쓰인 독창적인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게 영상과 책의 관계성은 동어 반복이나 선후 관계를 벗어난 독립적인 작업들이지요. 때문에 이러한 협업은 제가 탐구해 온 담론과 매체에 대한 실험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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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3》 작가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에피필름I, II〉(2023)은 조각과 VR로 제작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가상 현실 기술을 이용한 작품을 만드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어떤 것도 확신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매체를 미리 정하기보다는 작업에 적합한 매체를 찾아서 배워가며 작업하거든요. 이번 작업에서 VR 조각을 만들기 위해 기계를 사고 프로그램을 새로 다루었던 것처럼, 모든 작업에는 새로운 배움이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배움이죠.

최근에는 방대한 지식을 활용하는 일이나 기술을 착취의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천으로 생태 그리고 기술과 같이 정반대에 있을 것 같은 두 요소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의 작업은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물질과 종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횡단을 이해하면서 그 가능성을 포착하려고 했어요. 이를 영상이라는, 기술적이기도 생태적이기도 한 몸으로 전유해 보고자 했고요. 나아가 영상 매체를 소비의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장소로 다시 보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VR 기기를 착용하면 사용자의 시점에서 자신의 신체 중 팔만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가상 세계에서 그 잘린 팔로 조각한다는 것이 단순히 현실에 있는 이미지를 잘 구현하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차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매체와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고 감각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장소로 존재하기를 바라게 되었지요.

결론적으로 가상현실기술을 이용한 작품을 계속 만들지는 모르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을 항상 유의깊게 보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작업하게 될 것 같아요. 특히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 혹은 지각과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지 주목하게 되겠지요.

근래 연구하고 계신 주제나 진행 중인 작품이 있으시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작업이 다음 작업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기존에 만들었던 작업에서 제가 충분히 발현시키지 못했기에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도 있고, 한편으로는 그 수행이 있었기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작업도 있고요. 저는 이런 작업을 두고 초콜릿 박스라고 불러요. 초콜릿이 작업의 씨앗이자 아이디어인 거죠. 이 박스가 가득 채워져 있을 때 행복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실험의 영역 혹은 다가갈 수 있는 장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니까요. 나아가 작업의 규모나 강도를 조율하면서 작업하는 건 중요하지요. 계속해서 호랑이만큼 몸집이 큰 작업만 할 수는 없고, 또 개미 같은 작업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Syncope〉의 경우 제작 기간은 작년 한 해를 가득 채웠지만, 작품을 구상한 건 3-4년 전으로 꽤 오래 되었죠.진동 폭이 큰 작업이기 때문에 다음 작업의 씨앗이 될 생각들을 많이 품고 있어서 아마 또 새로운 작업을 불러올 것 같아요. 가령 최근에는 고고학적 시간에 관심이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히 허수경 시인의 시간과 고고학적 태도에 주목하고 있어요. 과거를 발굴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를 다시 보게 하거나 미래로 돌려주는 태도를 유의 깊이 생각하는 중입니다.

예술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전에는 작업이 작가가 의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조건들을 마주하게 되더군요. 이 조건이라는 것이 작업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경제적인 것, 시간적인 것 또는 관계나 환경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저의 신분이나 위치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떨 때는 이러한 제약을 작업 안에서 일종의 장치로 전환할 수 있는 유연함이 흥미로운 결과를 내기도 하더라고요. 그 때문에 예술을 함에 있어서 한계를 마주할 때 보이는 과감함, 그리고 세심함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통해 성취의 경험만을 할 수는 없고, 오히려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 그려지는 새로운 길이 있지요.

본교에서 지도하시는 수업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 워크숍〉과 3, 4학년 학생들이 수강할 수 있는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창작 워크숍은 아티스트 콜렉티브와 아티스틱 리서치라는 두 개의 축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기존의 예술 교육이 창작자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아티스트 콜렉티브는 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을 두루 살펴보고자 해요. 작업 안에서 아주 많은 협업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단일한 창작자로만 훈련이 되어 있다면 협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다룰 힘이 없거든요. 게다가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동료의 존재가 참 소중한데 서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졸업하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그 때문에 이 수업은 이 시간을 빌려 학생들이 서로의 출발을 목격하고 지지하는 동료를 만들어보는 자리이기도 하고요. 나아가 사회와 개인 창작자가 맺는 관계까지 포함해서 폭넓게 창작자라는 주체를 확장해서 이해하는 수업이기도 합니다. 아티스틱 리서치는 작품 제작의 선행 자료 조사가 아닌, 다양한 감각들을 배치하는 또 다른 실천으로의 리서치에 대한 연구이고요.

스튜디오는 학생들의 개별 연구 주제를 발전시켜 가는 과정을 담은 수업인데요, 제가 운영하는 스튜디오는 동시대의 매체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과 많은 방황을 통해 장기적으로 자신의 연구 주제 또는 예술적인 실천의 방법론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를 함께 모색하고 있습니다.

매거진 〈K-Arts〉의 이번호 주제는 ‘하나의 지도는 다른 모든 지도들 속에서 그려진다’입니다. 창작자로서 경험하거나 떠올린 ‘지도 그리기’에 대한 견해를 여쭙습니다.

본 주제가 지도의 명징성과 정확성보다는 지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오류와 오해를 바라보려 한다는 점에서 저의 작품인 〈Syncope〉와 많은 점이 공명한다고 생각했어요. 가령 〈Syncope〉는 근대적인 시간에서 벗어나려는 탈선 또는 변속을 긍정하면서 다중의 리듬과 배치를 그리잖아요. 이 작품과 동명의 책도 여러 필자와 함께 복수의 시간을 써 내려가면서 작업과 비평의 안과 밖을 살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고요. 여러 존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탐색하며 서로 다른 지도를 만들죠. 이 지도가 동시에 울리는 서로 다른 음들과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현재를 비추는 거죠. 이것은 또 다른 최근작 〈Overtone〉에 담긴 얘기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관점으로 저는 제 작업을 통해 일종의 지도 그리기를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글 이도현
선험적으로 촬영 및 편집된 영상과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퍼포먼스의 경계에서 놀이하는 창작자다. 주로 몸짓의 사회적이고 동시에 개인적인 맥락과 의미를 재배열하는 데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