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편안한 여행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좋은 지도를 구해야 한다. 그럼 좋은 지도란 무엇일까?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표시해 주는 지도,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는 지도, 거쳐야 할 곳과 지나쳐도 괜찮은 곳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지도가 아닐까? 그런 지도를 손에 넣는다면, 우리는 시간 낭비도 하지 않고, 위험한 일과 마주치지도 않을 것이며, 원하던 목적지에 확실히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길만 따라가는 여행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과 마주치기 어렵고, 설렘의 순간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정해진 행로를 따르기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여정이기 십상이다. 이른바 ‘정확한 지도’의 유일한 용도는 이미 알려진 것을 반복하고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이미 알려진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미리 정해진 여정을 뒤따르며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낯선 만남에 대한 기대감은 없어도, 무탈하게 주어진 여정을 마치는 데 목적을 둔 경우다. 그런 경우라면 정확한 지도가 꼭 필요할 테지만, 그 길이 ‘남들과 똑같은’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 이외에 어떤 새로움이나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나아가, 아예 지도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길이라면 어떨까? 흔히 ‘여행’에 비유되는 인생길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라는 보편적 개념은 있지만, 우리는 모두 각각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살아간다. 저마다 갖는 삶의 여정에는 미리부터 설정된 목적지가 없고, 심지어 목적이 존재하는 지조차 불명확하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며,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통해 ‘자기’를 만들어 간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구만큼의 삶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원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똑같은 지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삶의 여정에서 ‘정확한 지도’는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인생은 모두에게 공평무사하게 주어져 있다지만, 저마다 처한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계급과 성별, 인종과 민족,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환경 등이 빚어내는 차이는 우리 각자가 원하는 지도의 모습을 통상의 형태와는 다른 것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삶의 지도’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의 위치나 지역의 특성, 어느 길이 지름길이고 어떤 길이 에움길인지를 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길, 누구와 만나고 무엇을 할지 결정할 때마다 생겨나는 사건을 뜻한다. 바꿔 말해, 삶의 지도란 욕망의 지도이자, 그것을 그려나가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지도에 대해 말을 꺼냈으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더 보태보도록 하자.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과학에 대한 열정」에는 정확성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집착했던 왕국이 등장한다. 언젠가 그곳에는 현실과 완벽할 정도로 똑같은 지도를 그리려던 과학자들이 있었다. 정확함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여서, 끝내 현실과 1:1 수준으로 맞춘 지도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짐작하다시피, 1:1 축적으로 만들어진 지도는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세밀한 틈새나 보도블록 말단까지 정밀하게 묘사된 지도는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이상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현실과 똑같은 크기의 지도를 들고 다니면서 길을 찾을 것이며,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해 볼 것인가?
지도의 본질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문학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지도는 현실을 개연성 있게 묘사하는 동시에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빈 곳을 열어둠으로써, 그것을 읽는 저마다의 지도를 만들 가능성을 담아두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지도를 보면서 길을 가는 와중에 지도에 없는 샛길을 발견하기도 하고, 막힌 도로를 찾아 수정하기도 하며, 자기만의 휴식처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 모두는 단순히 주어진 길을 따르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없던 길을 만들어 내는 적극적이고 발명적인 활동에 가깝다. 삶의 길도 그와 다르지 않을 터. 비록 우리는 자기 삶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지만, 그 진로와 방향에 대해서는 늘 무엇인가 원하고, 그에 맞춰 살고자 노력한다. 표지판 없는 인생길에서 나침반과 지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우리를 지금 있는 자리로부터 밀어내며, 가보지 않은 길로 나서게 만드는 추동력이다.
그럼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갈까? 대개는 정해진 길, 주어진 삶의 좌표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간다. 인생에는 지도가 없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두가 어떤 지도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끼워 맞추며 살아가고자 한다. 무슨 말인가?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장래 희망이나 인생의 거창한 꿈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부모님이 대학에 가라고 성화를 부려서 떠밀리듯 진학하는 게 사실 아닌가? 대학에 못 들어가면 어딘지 사회적으로 낙오될 것 같은 두려움에 잘 알지도 못하는 학과나 학교를 선택하곤 하지 않는가? 천신만고 끝에 입학한 대학을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취직이다. 생계를 위해, 그리고 명절날 일가친척들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해. 직장을 얻으면 세상의 눈치를 보는 일이 끝나는가? 물론 아니다.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한다.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했는데 아이 없는 생활을 오래 하면 또다시 주변의 눈총에 피곤함을 느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다음에는 집을 사고, 자동차를 바꾸고, 아이들 입시에 매진하고, 노후 대비를 하는 등 ‘정해진’ 인생의 지표들은 널려 있다. 교과서에도 없고 법적으로 정해진 바도 없지만, 우리 삶에는 꽉 짜여진 지도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규정짓는 수많은 강제가 잠복해 있다. 여기에 욕망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원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욕망이 실제로 우리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되묻지는 않는다.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정신분석의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파고들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자신이 갖는 욕망은 실상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욕망이자 사회의 욕망이기 십상이다. 앞서 든 예를 다시 끌어오면, 대학에 가고자 하는 욕망은 부모와 사회가 그렇게 하길 바라기 때문에 나 자신도 바라는 것이다. 취업이나 결혼, 아이, 좋은 집과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나’가 원하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원하고 이 사회가 원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주체(subject)가 되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타인과 사회에 예속된(subject to) 삶을 살아가는 허수아비가 바로 우리다. 인생이라는 지도 없는 여정이 어째서 자신의 바람대로 갈 수 없는 길인지를 보여주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핵심은 자기 삶에 지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우리네 인생에는 한편으로 이미 주어진 지도가 존재한다. 타인과 사회의 욕망이 그것이다. 이른바 ‘잘 산다’라는 척도를 나 이외의 것, 부모나 친척, 스승, 사회에 맞추는 한, 우리의 삶은 규정된 길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삶이 정해진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왜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가 고민에 빠지고 번민과 후회를 거듭하겠는가? ‘잘 산다’라는 타인의 척도를 벗어나는 샛길과 에움길, 낯선 경험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가 허락하는 삶이 늘 옳거나 좋은 것이 아니다. 항상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미지의 경로가 우리 앞에 괄호 쳐진 채 존재한다. 관건은 과연 그 길에 첫 발자국을 뗄 만한 힘이 우리에게 있는지 여부이다.
욕망의 지도는 그렇게 매번 발명해야 하는 삶의 과정을 뜻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는 대개 타인과 사회에 의해 부여된 목표로서 무의식중에 떠안은 것이다. 노력해서 찾고 소중히 지켜가야 할 의미와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만들고 발명해야 할 미래의 대상이다. 인생을 지도에 비유한다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자기의 길을 만들어 갈 때 솟아나는 그 어떤 것이야말로 ‘의미와 가치’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삶의 과정을 ‘욕망의 지도 그리기(Cartography of Desire)’라고 불렀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욕망의 지도 그리기로서의 삶은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비견할 만하다. 여기서 참고할 만한 사람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다. 그는 과학과 구별되는 예술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 세심하게 고찰했다.
과학은 개별적인 사례를 보편적인 법칙에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성립한다. 가령 ‘2×2=4’라는 등식은 언제 어디서든 동일하게 반복되는 수학적 법칙이다.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거나 웅장한 건축물을 세우거나, 종이비행기를 날리거나 로켓을 쏘아올리는 등의 어떤 경우에도 저 단순한 수학법칙은 성립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개별적 사례들은 보편성의 틀에 맞춤으로써 과학성과 정확성을 증명해야 한다. 인생의 지도를 그런 기준에 따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 각자는 시대와 사회의 거대하고 보편적인 척도에 자기 삶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반면, 예술작품은 정반대의 과정에서 출현한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미술이든, 그 어떤 장르에서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기는 곤란할 것이다. 놀라움과 경이를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는 예술작품은, 다른 어떤 누구의 발상이나 작업을 통해서도 모방할 수 없는 특이성(singularity)을 갖는 유일무이한 대상이다. 그것은 예술작품 그 자체가 갖는 고유한 법칙으로부터 나온 효과인 셈이다. 다른 예술작품과 다르면서도, 감상하는 모든 이들을 한결같이 매혹시키는 예술작품의 특이성은 역설적 의미의 보편성을 갖는다. 욕망의 흐름에 따라 그려진 삶의 지도 그리기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미리 살아보는 인생이 있을 수 없듯, 인생 여정을 정확하게 예측해서 만들어진 지도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숨 쉬고 활동하는 한, 삶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으나,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미지의 시간은 의외로 간단히 영토화되거나 영원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창안의 과정일 수 있다. 전자는 타인과 사회에 의해 주어진 법칙을 따르는 길이며, 순탄하지만 복종의 굴레에 불과하다. 후자는 괴롭고 힘겨운 순간들로 채워지겠지만, 자기만의 의미와 가치를 충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사건의 정의가 예상하지 못한 마주침과 새로운 경험의 출현이라면, 욕망에 따른 삶의 지도 그리기가 바로 그것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욕망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욕망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물론, 몸과 마음을 고단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알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 욕망을 찾는 첫 번째 발걸음은,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충동이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복종한 결과인지, 그것과는 별개의 것인지 구별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자기 모습에서 타인의 욕망이나 사회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떼어내는 일이 결코 쉬울 수 없다. 분리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때로는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로서의 나’, ‘자기 자신만의 삶’을 정녕 원한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자기 삶의 지도에 표시되는 첫 번째 이정표는 그런 분리의 두려움과 고통을 겪지 않은 채 세워질 수 없다. 타인의 욕망에 예속되어 있던 삶이 스스로의 욕망을 따르는 주체의 삶으로 변화하는 순간이 거기 있을 것이다. 삶은 그 같은 욕망의 사건들로 늘 새롭게 세워지는 낯선 이정표들의 집합 아닐까? 지금까지의 인생행로가 어떤 지도를 그려왔는지, 앞으로 세워질 이정표와 그로 인해 새롭게 그려질 지도는 어떤 것이 될지 생각해 보는 하루를 당장 시작해 보자.
글 최진석
문학평론가이자 문화연구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저술서로는 『사건의 시학』, 『불가능성의 인문학』, 『감응의
정치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