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2024 SPRING49

세계를 구하지 말 것,
세계들과 살아갈 것
『플루리버스』

들어가며

멀티버스(multiverse)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이식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돌이켜보자. 위기에 처한 지구는 이제 가망이 없다. 히어로들은 우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가능성을 다른 우주, 멀티버스로부터 가져온다. 이야기는 돌파구를 찾고, 시리즈는 계속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것은 ‘하나의 세계(universe)’다. 명예로운 미군과 자본가의 숭고한 희생이 수호하는, 인간 비인간이 모두 영어에 능통한 서구적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멀티버스 속 무수한 세계들은 오로지 ‘하나의 세계’ 존속을 위해 일시적으로 가시화된다. 이와 다르게 플루리버스(pluriverse)에는 복수의 세계가 있으며, 다수성의 세계들은 자력(自力)으로 실재하고,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들이 상호무관히 완전 독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중 우주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멀티버스 개념과 구별된다.

『플루리버스』의 저자인 아르투로 에스코바르는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일련의 봉기가 끊이지 않던 멕시코 최남단 치아파스에 등장한 반자본주의 무장단체 사파티스(Zapatista)의 자치공동체로부터 플루리버스라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파티스타는 1994년부터 현재까지 멕시코 정부에 투쟁하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2001년 포르투알레그리의 정신1을 일으킨 최초의 세계사회포럼에 등장해 “우리는 수많은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세계를 원한다”2고 호소했다.

플루리버스는 세계화된 하나의 세계가 아닌 세계. 존재를 하나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세계화 프로젝트에 의해서도 끝끝내 점령되지 않은 세계. 서구를 중심으로 한 보편적 존재론에 대항하는 비존재들의 비가시적인 세계다. GDP로 측량할 수 없고, 달러로 소통할 수 없으며, 경쟁과 전략이 아닌 사랑과 공생으로 진화하는 생물들의 터전. 무지한 자들의 상호 배움. 모계적인 상속. 선형적 진보와 탈미래적 발전이 아닌, 미래를 간직한 채 종간(種間)을 횡단하는 공동체에서 참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정치체. 단 하나의 구원도, 대안 없는 차악도 아닌 다원적 미래, 다수적 가능성을 가진 복수의 세계들이다.

저자는 탈식민주의 에코 페미니즘 정치학과 더불어 마리오 블레이저가 제안하고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이 발전시킨 정치적 존재론(Politico-ontology)3을 통해 플루리버스를 사유하려 시도한다. 정치적 존재론은 서구 중심의 보편적 존재론에 저항하며, 존재와 세계의 상호작용에, 그 관계성에 주목한다. 근대 철학의 존재론이 차이를 동일한 세계 속의 변이로 인식하는 반면, 정치적 존재론은 이에 대항해 존재론적 차이의 논쟁을 활성화하여 헤게모니 없는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대안적 사유의 공간을 열어 존재의 다수성을 가시화할 수 있는 실천을 모색하는 것이 주된 과업이다. 저자는 역사의 가장자리였던 남반구,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정치체4로부터 플루리버스의 번영을 위한 실마리를 추적한다. 존재의 대안으로서, 비존재(서발턴)들의 비세계가 직조되고 있다. 이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생태계와 문명, 공동체가 관계하고 또 불화하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두가지 연구 방법론을 도구로 제시한다. 세계를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닌 비환원적이고 전일주의적인 유기체로 사고하는 ‘시스템 방법론(Systemtheory)’. 그리고 진화론적 맥락에서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급진적인 모계적 사유를 배울 수 있는 ‘사랑의 생물학’이 새로운 길잡이가 된다. 무엇보다 자연과 사회를 대칭적으로 사유하고 복수의 세계(들)를 지속가능한 공생의 모델로서 연구할 수 있는 비근대적인 인류학적 접근5이 중요하다.

1
세계체제론으로 잘 알려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용어이다. 그는 21세기 초, 세계에 두 가지 주요 정치 진영이 있다고 보았다. ‘다보스의 정신’(세계경제포럼- 녹색 자본주의)과 ‘포르투알레그리의 정신’(세계사회포럼- 대안적 사회주의)이다. 두 진영은 그 내부에서도 각각 두 극으로 나뉜다. 세계의 대중적 사회운동이 함께 모이는 ‘포르투알레그리의 정신’의 두 축은 ‘좌파 생산주의’와 ‘좌파 자유의지주의’이다. 탈성장이라는 논점을 두고 보면 에스코바르는 ‘좌파 자유의지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마티아스 슈멜처, 안드레아 베터, 아론 반신티안, 『미래는 탈성장』, 김현우, 이보아 옮김, 나름북스(2023), 18p, 에서 재인용.
2
원문은 “a world in which many worlds fit”, 출처: https://antipodeonline.org/2020/10/27/dont-save-the-world-embrace-a-pluriverse/" 본 리뷰의 제목은 해당 기사의 제목을 변용한 것이다.
3
아르투로 에스코바르, 『플루리버스』, 박정원·엄경용 옮김, 알렙(2022), 117p. 앞으로 본 저서가 인용될 때는 주석을 생략하고 괄호 속 페이지를 표기한다.
4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안데스 지역의 케추아, 아이마라 선주민들의 독특한 공동체인 아이유(Ayllu)가 있다. 편의상 ‘아이유는 상호 협력, 공동 소유 방식을 오랜 기간 걸쳐 유지해 온 공동체’라고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불완전한 설명이다. ‘아이유에서’ 인간과 비인간은 본래부터 연결된 자연·사회의 집합체로, 기존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명명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현상학이기 때문이다. ‘아이유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개간하거나 개발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 비인간은 분리할 수 없기에 함께 존재하거나 함께 사라진다. 근대 서구의 시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런 존재 방식을 어떻게 번역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본 글의 후반부로도 이어진다.
5
대칭적 사유, 복수의 세계(들), 비근대적인 인류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를 참고할 수 있다. 대표 저서로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2009).

플루리버스로 향하기 위한 존재론적 디자인

저자는 플루리버스를 사유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론의 한 실천으로서 ‘존재론적 디자인’을 제안한다. 서구의 소비주의적 일상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가장 근대적인 도구로 연상되는 ‘디자인’을 비근대로의 전환 실천으로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책의 가장 낯설고도 도전적인 과업이다.

이 책에서 디자인 개념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생산하는 것’이라는 좁은 의미에서부터 ‘체제나 방법을 재고하거나 전환하는 것’까지 매우 확장되고 있다. 디자인은 우리의 쓰임, 생활, 삶의 방식을 바꾸고 이를 통해 세상을 해체하거나 생성한다. 그 자체로 “삶의 다양한 형태”(26p)를 지칭할 뿐 아니라, “이론적·정치적 프로젝트”(29p)를 함의하기도 한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위해 대상의 존재 방식을 재규정하는 ‘존재론적 디자인’은 플루리버스의 사유이자 실천이다. 저자는 앤-마리 윌리스의 ‘존재론적 디자인의 이중 운동’을 이에 대한 핵심적 사고로 인용하며 독자를 설득하고 있다. “우리가 세계를 디자인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다시 우리를 디자인한다. 결과적으로 디자인이 디자인한다.”(28p) 플루리버스의 세계관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모든 인간 비인간의 강한 관계성을 전제하는데, 디자인이란 이 관계를 재규정하는 것이다.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다르게 실재한다. 우리의 다르게 살기가, 세상을 다르게 실재하게 한다. 따라서 삶의 다원성만큼 무수한 세상이 있으며, 삶의 변혁을 통해 세상은 스스로 달라진다.

칼 아르놀드의 1914년 신문 삽화 〈공작연맹 전시회에 대해Von der Werkbund-Ausstellung〉, 표준화, 규격화를 주장한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조성을 우선시하여 이에 반대 성명을 발표한 앙리 반 데 벨데의 논쟁을 담았다. 당시에는 이것을 ‘신념 전쟁(Glaubenkrieg)’이라 불렀다. 가장 우측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의자를 생산하는 목수가 표현되어 있다. (출처: Simplicissimus)
한네스 마이어가 1926년 구상한 협동조합 아파트의 실내 디자인 〈Co-op Interieur〉 (출처: Galaerie Berinson)

존재론적 디자인의 역사적 사례들:
‘전체주의 디자인’, ‘사회주의 디자인’, ‘제거의 디자인’

서구의 근대적 기획에는, 그 열정과 무관하게, 많은 실패가 있었다. 디자인은 실패한 이념들을 성찰했다. 디자이너들은 단지 사물이나 공간만을 생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생산한 시대의 미학은 이념의 실천이었다. 윌리엄 모리스, 한네스 마이어,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맑시즘과 파시즘, 그리고 그 샛길을 흐르는 아방가르드로부터 시도했던 미학에는 우리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인 ‘존재론적 디자인’의 실마리가 이미 잠재되어 있었다.

20세기 초반, 순수예술은 부르주아들의 ‘살롱 예술’로 전락했다는 꾸준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미술공예운동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던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는 모두 삶과 예술, 기술을 통합하려는 ‘총체적 예술’로서의 디자인을 지향했으나 구체적인 경로는 전혀 달랐다. 독일공작연맹을 창시한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건축가이자 외교관이었는데, ‘규격화’를 통해 효율적이고 계획적으로 통제 생산된 제품들이 곧 우수한 상품이 될 것이라는 산업적인 야망 혹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건축가, 예술가, 디자이너들을 동원하여 연맹을 만들고 이들에게 규정된 형태 외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시대적 형태를 찾기 위해 오로지 객관성과 기능성을 앞세운 국가의 총력전 속에서 ‘전체주의 디자인’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일부 계승하여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디자인 교육 기관인 바우하우스는 14년이라는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진 채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으나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을 회자할 만큼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바우하우스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구분을 폐기하고 예술가와 장인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고 선언하며, 수공업 역시 예술의 지위로 격상시키고자 했다. 짧은 시기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었던 한네스 마이어가 1923년 구상한 협동조합 인테리어(Co-op Interieur)6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재산이 아닌 거주로서의 ‘자기만의 방’을 꿈꿀 수 있도록 약속하는 ‘사회주의 디자인’이었다.

화가이자 바우하우스의 선생이었던 리오넬 파이닝거의 1919년작 목판화 〈대성당〉,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창립 이념을 대표하는 그림으로서 선언문의 표지로 사용했다. 건축물 위에 빛나는 세 개의 별은 각각 화가, 건축가, 조각가(공예가)를 상징한다. (출처: MoMA)
뉴욕 마천루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로비를 장식한 부조, 대표적인 아르데코 양식 건축물이다. 두 이미지는 시공간의 격차를 두고 시각적 유사성을 지녔으나, ‘삶의 토대 위에 예술과 기술의 통합’과 ‘자유지상 발전주의’라는, 전혀 다른 이념을 상징한다. (출처: esbnyc.com)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근대사의 디자인들은 결국 기능주의와 시장에 복속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이후 다수의 교강사와 졸업생들이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의 가장 유명한 고층 빌딩들을 지어댔던 것이다. 변절한 개혁들이 으레 그렇듯, 세상을 바꾸고자 했으나 실패한 디자인들은 서구 근대 사회의 트로피를 짓고 마천루를 그리며 그 열정을 소진했다.7 한편 1951년 UN 경제사회국의 발전주의 선언은(“편안한 삶을 추구하던 이들은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좌절할 것이다. 소수의 공동체만이 경제 발전을 위해 비용을 치르려는 준비가 되어 있다”) 20세기, 요동치는 거대한 기획의 경합 속에서도 돋보이는 비전을 제시한 매우 대담한 디자인이었다. 디자인 이론가 토니 프라이에 따르면 그것은 수많은 토착 디자인을 모두 ‘저개발’의 나락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제거의 디자인”(31p)이었다. 이 악몽과도 같은 발전주의 아젠다는 끈질기게 존속하여, ‘지속가능한 발전’, ‘녹색 성장’ 같은 말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디자인이 세계를 앞지르고, 많은 이들이 그 꿈에 심취하여 담론을 형성했다는 측면에서만큼은, 성공적인 존재론적 디자인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제거의 디자인’은 제1세계에게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약속하고, 그 외 모든 세계를 부역시켰다. 이후 ‘제거의 디자인’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럴듯한 거짓 비전을 제시하며 통제 불가능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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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은 단순한 몇 개의 요소(침대, 축음기가 올려진 테이블, 펼쳐진 의자 1개, 벽에 걸린 접의식 의자 1개, 선반 유닛)로 구성되어 있다. 한네스 마이어는 맑스주의자였고 당시 실제로 활발하게 협동조합 활동 중이었다. 이 거주 인테리어는 가사 노동이 가정이 아닌 공동체에게 할당되었을 때를 상정한 노동자 1인의 방이다. 마이어는 협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공동체가 개인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계급과 전통적인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이 이처럼 규격화와 표준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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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공황과 세계대전, 그리고 전쟁특수와 히피, 팝을 거치며 등장한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어땠는가. 이들은 모더니즘 디자인의 기능주의 미학을 해체하는 안티-디자인을 선보였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오래된 기치는 ‘형태는 자유를 따른다’로 패러디되었다. 그리고 삶과 공동체에 대한 이념마저 결여된 ‘안티-디자인’ 플라스틱 제품들이 싼값에 쏟아져 나오며 소비주의를 가속시켰다.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디자인:
‘전환 디자인’과 ‘자치 디자인’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 근대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을 상상해야 한다. 천재 예술가이자 남성 엘리트 디자이너에게서 전환의 도구를 되찾아오자. 우리 존재와 삶이 신비로울 만큼 강력하게 이 (복수의) 유기체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다는 유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먼저다. 우리는 터전의 일부가 된다. 영토와 함께 살고, 모든 것과 함께 변화한다.

플루리버스를 향한 디자인 중 대표적인 것은 ‘전환 디자인’이다. 인류세나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 채굴주의, 탈석탄 등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담론들을 경유할 수 있다. 특히 남반구의 독특한 전환 디자인인 부엔 비비르(buen vivir)8는 ‘참 살이’ 혹은 ‘더불어 잘살기’로 번역할 수 있는데, 포스트발전 담론의 대안으로서 추구되는 안데스 선주민들의 투쟁이다. 이들은 문명과 자연 관계의 재규정을 통해 발전주의 이념을 공동성의 이념으로 전환한다. 경제 발전의 목적의식을 인간 비인간의 권리에 대칭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해 2001년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기도 했다. 부엔 비비르에 의해 인간 비인간은 대상 없는 주체(들)로 공립한다.

한편 저자는 인간 비인간의 “공동체적 얽힘”(317p)인 세계의 복잡성을 들여다보기에 유용한 수단으로 시스템 이론을 동원한다. 이것이 하나의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수많은 강력한 상호작용 속에서 창발9과 차이에 열려 있는 자기조직적(self- organization)이고 자기생산적인(autopoiesis) 시스템으로서 세상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세계의 고유한 역동성, 스스로 원하는 삶과 세계를 혁신할 수 있는 자치성은 플루리버스의 번영을 위한 주요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디자인은 자치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엄격한 전통주의를 넘어선 토착적인 것의 재발명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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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지역 케추아(Quechua), 아이마라(Aymara) 선주민의 언어로 수막카우사이(Sumak Kawsay), 수막카마냐(Sumak Qamaña) 이다. 부엔 비비르는 이를 스페인어로 번역한 것이다. 에스코바르는 이런 식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정치체에서 배움을 길어 올리는데, 그때마다 이것을 완전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서구의 근대적 이원론인 인간 비인간의 분리로 이해하려다 보면 “그들의 대지-존재들을 단순히 ‘믿음’의 대상으로, 혹은 특정한 문화적 관습, 격세유전이나 무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격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4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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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본에는 ‘발현’으로 번역되었다. 원문 ‘emergence’는 하위 계층의 구성 요소에는 없던 특성이 상위 계층에서 돌연 출현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창발’로 고쳐 썼다.

플루리버스의 실재를 사유하기

결론 부분에서 에스코바르는 자신을 비롯해 자신의 이론적 동료들이 과학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완곡하게 말한다. 그러나 “실재에 관한 질문이 확정될 수 없기에 존재하는 상황을 통해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376p)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에스코바르는 무엇을 유보하고 있는가? 근대 서구의 관점으로는 불완전하게 번역할 수밖에 없는, 비존재들의 비가시적 세계를 어떻게 실재하는 것으로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다. 에스코바르가 라틴 아메리카의 대안적 정치체로부터 참고하는 급진적 관계성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독립체들이 관계 이전에 존재하지 않고 관계가 독립체들을 구성하며,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405p)된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브뤼노 라투르를 ‘비실재론자’라는 오명 속에서 괴롭게 했던 보편적 실재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을 소환한다. “어떤 과학도 과학적 실천의 연결망을 벗어날 수 없다. 공기의 무게는 실제로 언제나 보편적인 것이지만, 연결망 안에서 보편적인 존재이다.”(Latour, 76p) 케추아 선주민들이 그들이 거주하는 대지, 폭포와 분리불가능한 실재를 갖는 것처럼, 순수한 과학적 사실은 실험실의 공간, 도구들과 함께 서로의 실재를 구성한다. 실재에 대한 질문은 유서 깊은 철학적 논쟁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플루리버스의 대안적 토폴로지 위에 근대성을 비판한 현대 서구 지식인의 지적 투쟁을 겹쳐보는 것이 섣부른 비약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플루리버스의 대안적 가능성을 신유물론과 같은 서구적 담론에 손쉽게 봉합해버릴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합리성과 보편성을 비근대적으로 정초(定礎)하려는 이 시도들의 성과를 다음 세대의 철학을 위해 상속받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이 철학에 대한 오명과 필연적으로 동행할 것임을 믿는다. 우리의 사유가 부재하고 또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외계를 사유해 내려는 실재론의 사명으로, 비존재들이 살아가는 ‘세계 속의 세계들’을 사유하기 위해서.

덧붙여

나는 십 년 동안 여러 입시 미술 학원에서 미술 이론과 디자인 역사를 강의했다. 무척 명석하지만 떨칠 수 없는 피로 속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종종, 그들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네가 전공하고 싶다는 ‘디자인’이 뭔데? 그러면 네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 ‘디자이너’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이야?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행위하는 디자인 실천에 대해, 그리고 이념적 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의실 안에서 지적 권위와 신뢰를 획득하는 가장 손쉽고 또 비겁한 방법이다. 작은 강의실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이제 나는 질문을 던지되 말문을 막는 자가 아니라 끈질기게 대답을 요청받는 자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근대적 비지속성과 탈미래적인 관행의 뿌리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론적 약속, 관행, 서사, 존재론적 행동을 향한 디자인이 가능할 것인가?”(47p) 침묵이 흐른다. 그러나 몹시 오래전부터, 근대적 시간관의 저편으로부터, 인클로저10로 인해 욕된 영토 너머로부터 많은 존재들이 대답하고 있다. 내가 부양하는 모든 것들이 실은 나를 부양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투쟁이 세상을 만드는 존재론적 디자인이 될 수 있음을. 디자인은 언제나 감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삶은 수많은 세계들 속에 감각적인 것으로 펼쳐지며, 하나의 대답은 다른 모든 대답들 속에서 들려올 것이다.

우리 이 세계를 구하지 말자. 미래를 팔아 발전의 꿈을 사는 세계가 끝장나도록 내버려두자. 무수히 많은 미래가 가능한 세계들을 살아가자. ‘참된 삶의 기쁨’을 적었다가 지우고 다시 적는 것이 얼떨떨하거나 낯설지 않을 생을. 비선형적이고 다성적인 서사들을. 화폐가 아닌 언어로, 소비가 아닌 생활로. 감각으로. 아름다움으로.

10
Enclosure: ‘공공의 것’으로 인식되던 것을 사유화하는 행위를 일컫는데, 공유지에 말뚝을 둘러 사유화하던 행태에서 비롯되었다. 공유지는 농민 공동체에서 재생산을 위해 모두가 공유하는 토지였으며 또한 협업과 연대를 위한 터전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클로저는 땅에 말뚝을 박아 공동체를 와해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시초 축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글 임지지
글을 쓰고 무빙이미지를 만드는 여자. 폭풍이 닥쳐오면 좌표와 수치를 이해할 수 없게 기록해둔다. 다음에 또 폭풍이 와도 대비할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