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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위상학을 위한 노트

유튜브는 나의 국적과 언어사용에 기반한 알고리즘을 생성한다. 스케치 코미디(10분 이내의 짧은 개그 콘텐츠)의 유행을 처음으로 감지한 것은 채널 ‘스낵타운’을 통해서였다. 당시는 구독자가 10만 명을 조금 넘었는데 빠르게 교차편집한 1분 내외의 코미디 영상이 주요 콘텐츠였다. 골목이나 원룸이 배경이며 중고 거래나 음식 배달이 소재여서 계급적 위화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반복해서 등장하는, 동성연애를 희화화하는 설정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구독 취소 버튼을 눌렀다.

영상이 뜰 때마다 보는 채널 ‘너덜트’와 ‘숏박스’도 아직 썩 맘에 차지 않는다. ‘숏박스’의 경우 개그의 밑바탕을 까보면 성별이분법이 나온다. 〈장기연애〉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연애 11년 차 커플의 현실 스케치 코미디로, 연인 간의 성적 긴장감이 유발될 만한 순간에 반전 행동으로 긴장을 불식하는 것이 포인트다. 콘돔을 사는 것이 귀찮아 모텔에 가서 하루 종일 누워 휴대폰만 보다가 온다거나, 카페에 가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SNS에 올릴 사진만 실컷 찍어주다 오는 현실을 보여주는 식이다. 웃음이 유발되는 이유는 성별 고정관념에 있다. 성별 반응이 상황에 따라 안정적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그에 따라 공감의 웃음을 불러일으키거나 반전 웃음을 노릴 수 있다. 문제는 웃고 난 이후다. 그 웃음은 시청자를 고정관념에서 해방시키기보다 고정관념에 옭아맨다. 시종일관 고정관념을 강하게 인식해야만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채널의 유머 소재 선택은 타깃으로 삼은 계층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너덜트’의 주요 타깃 연령대는 ‘숏박스’보다 높은 편이다. 주로 직장인을 소재로 한 유머가 많다. 〈으른들의 플렉스〉편은 갓 취업한 직장인들의 소비 행태를 소재로 한 스케치 코미디로, 미취업 청년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유머를 보여준다. 〈야근, 야근, 야근, 야근, 야근, 병원, 기절〉은 주 69시간 근무제 추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작된 블랙 코미디로, 만약 주 69시간 근무제가 도입된다면 어떤 일상이 펼쳐질지 한 직장인의 상상을 통해 보여준다. 영상의 결말은 현실로 돌아온 직장인이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너덜트’와 ‘숏박스’ 모두 유머를 베이스로 한 스케치 코미디가 전문이지만, 말 잘 듣는 선한 시민을 위한 안전한 웃음을 제조하며, 현실에 도전하는 위험한 웃음을 내놓지는 않는다. 서사가 어떻게 날뛰던 웃음의 성질이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는 점이 아쉽다.

정체성 유희: 집단

‘피식대학’의 〈피식쇼〉가 처음 떴을 때는 다른 채널과 달리 콘텐츠의 국적이 불확실한 듯 보였다. 섬네일의 자막은 죄다 영어인데 게스트는 주로 한국인인 것 같았다. 들여다보니 실상은 더욱 특이했다.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영어나 한국어, 심지어 콩글리시라고 할 수도 없는 “교포 잉글리시”1 라는 독특한 것이었다. 마치 한국어를 세계인의 공용어나 은어라도 된 듯이 영어에 끼워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오래전부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썼던 K팝의 관행과 비슷하지만, 그 비율을 거꾸로 적용한 것이다.

이런 언어 사용을 선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따져보자. 첫째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콘텐츠를 제작하면 ‘영어 사용권 지도’에 포함되어 알고리즘을 통해 타깃으로 할 수 있는 시청자 범위가 훨씬 늘어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어에 끼워 쓰는 전략을 통해 한국어의 가시성을 되려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도박에 가까운 전략인데, 영어 사용이 주요 원칙인 콘텐츠이므로 언제든 한국어가 희석되거나 뒤로 밀려나 잊힐 수 있다. 즉 한국어는 영어와 대등한 언어로서가 아니라 제2의 언어로 다뤄진다. 이는 언어 사용자 수의 단순 격차에 따른 냉정한 계산 결과이기도 하다.

셋째로 한국 문화(K-Culture)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된 듯한 착각을 형식으로나마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는 영미 유명 토크쇼의 패러디라는 콘텐츠 포맷이 이미 담지한 것이기도 하다. 특정 문화가 강세인 것이 명확할 때 패러디라는 대항 형식이 출현한다. 이 형식을 통해 자발적으로 하위문화에 위치함으로써 B급 유머를 창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피식쇼〉의 영어 사용 방식의 특이한 점은 영어를 사용하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강조한다는 데 있다. 그냥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조되지 않으면 쇼의 존립 자체가 흔들린다는 듯이 강박적으로 강조된다. 특정 배우의 나이대에 해당하는 한국 아저씨 표정을 지어보라고 주문한다던가, 미국 배우에게 한국에서 인사할 때는 나이가 중요하다며 무슨 띠냐고 묻는다던가, 프랑스 작가에게 한국에 대한 칭찬을 이끌어내며 “Can you feel my 국뽕?”하고 말한다던가, 나폴레옹과 이순신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묻기도 한다.2 이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되려 문화의 어우러짐과 혼종성이 아니라 한국문화와 외국문화의 차이다.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이런 독특한 얽힘과 위치선정은 김영삼 정권 때부터 한국의 세계화가 국가 주도로 추진되었던 역사와 관계가 깊다.3

결국 ‘피식대학’ 유머 콘텐츠의 가장 큰 기반은 한국 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여타 앞에서 언급한 채널들은 한국어로만 제작되어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당연시하고 그 안에서 기존 계급과 젠더를 재생산하는 유머를 제작했다면, 〈피식쇼〉는 영어라는 세계가 공유하는 언어적 정체성을 통하여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바깥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지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거나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들은 유머를 통해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기획4 한다고 볼 수 있다.

1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Psick Univ’의 콘텐츠 〈[한글자막] 브라이언에게 먼지가 묻다〉
2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Psick Univ’의 콘텐츠 〈[한글자막] 다니엘 헤니에게 뉴진스 다니엘을 묻다〉, 〈[한글자막] 크리스 프랫, 제임스 건에게 최고의 쇼에 초대된 기분을 묻다〉, 〈[한글자막]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개미투자자의 미래를 묻다 (통역 : 스텔라장)〉
3
신기욱,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이진준 옮김, 창비(2009), 319p.
4
마누엘 카스텔, 『정체성 권력』, 정병순 옮김, 한울(2008), 25p.

반면 〈탈북자 몰카〉 같은 경우는 좀 다른 견지에서 봐야 한다. 이는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우위 관계를 당연시하는 상황에서 발화된, 우월의식에 기반한 유머이다. 영어 사용자의 사회적 지위를 띄워주며 극을 이끌어가는 〈피식쇼〉와 달리 〈탈북자 몰카〉가 자아내는 웃음의 본질은 비웃음이다. 탈북민의 외적 특징 중 가장 쉽게 구별될 수 있는 차이인 어투의 차이를 흉내 내 희화화하는 것이다. 이 유머에 한 톨의 옹호를 할 수 있다면, 그동안 슬픔이나 근엄함 등에 한정되어 있었던 탈북민의 어조가 주는 정동의 폭을 다양화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상대를 나와 대등한 주체로 여긴 유머라 할 수 없으므로 조롱에 가까운 것이다. ‘헬조선’에 이어 국적 포기율 1위라는 오명5을 달고 ‘탈조선’을 택하는 사람들이 흔들리는 땅에 사는 자신의 불안을 부인하는 방식6의 도피적인 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이 “지배와 쾌감에 기초하는 것만큼이나 고통과 방어에 기초하고 있다”7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위 사례에서 실제 탈북민이 아닌 화자가 탈북민의 정체성을 이용했듯, 우리 안 타자의 정체성을 흉내 내기를 통해 재현한 비슷한 방식의 유머로 ‘나몰라패밀리 핫쇼’의 ‘다나카상’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흉내 내기 한 사례이므로 또 다른 맥락에서 접근하게 된다. 다나카상 역시 일본인스러운 ‘말투’와 한국어 ‘발음’이 희화화의 소재가 되는데 이것이 한국 시청자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맥락은 무엇일까. 36년간 일제 식민 지배의 잔재를 떠올리면, 그가 한국어 발음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일본어 사용을 강제당했던 과거의 억압 관계를 뒤바꿔 적용한 것이다. 또한 그의 캐릭터 중 일본의 호스트 바에서 호스트로 활동한다는 설정은 끝나지 않은 전쟁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의 서사를 자본주의 성 상품화의 대상자와 소비자로서의 관계로 비틀어 역전시킨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본의 메이드 카페를 탐방하며 부끄러워하는 등 8 일본 대중 문화를 하위문화화하여 웃음을 자아내려는 전략 또한 이미 역사적으로 형성된 반일 감정에 기반하지 않으면 한국 대중에게 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머의 소재는 개인이 자의로 택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세계 내에 설정되어 있는 자신과 타자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계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 자동적인 위치 지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웃음은 없을까. ‘우리’라는 집단의 정체성보다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더욱 세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형식이라면 어떨까. 정체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결국 큰 차이는 없을까.

5
신기욱,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문학동네(2017), 95p.
6
테리 이글턴, 『유머란 무엇인가』, 손성화 옮김, 문학사상사(2019), 217p.
7
호미 바바, 『문화의 위치: 탈식민주의 문화이론』, 나병철 옮김, 소명(2012), 177p.
8
유튜브 채널 ‘나몰라패밀리 핫쇼’의 콘텐츠 〈메이드카페에서 오이시쿠나레 하고 왔습니다〉

정체성 유희: 개인

정체성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테두리나 국경이기도 하고 깃발을 꽂는 점, 혹은 앵커리지이기도 할 것이다. 유튜브는 국경을 넘는 콘텐츠와 채널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듯하지만 웃음의 잣대는 기존 국경과 지형도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가 많다. 이 점이 나로 하여금 넷플릭스의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보다 한정된 섬으로 건너가게 했다. 개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다양한 채널이 이합집산하는 유튜브의 생태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1시간 이상 혼자 입담으로 끝장을 봐야 하는 무대의 뚜렷한 컨셉은 큰 매력이었다.

언제 어떤 쇼츠를 통해 넷플릭스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달아 보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본 스탠드업 코미디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데이브 샤펠(Dave Chappelle)이었을까? 어쨌든 유튜브의 안전한 웃음보다 더 수위가 높은 웃음을 끌어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해서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인 서사를 활용할 기회가 더욱 많기에 유머의 형태가 훨씬 다양하고 유연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코미디언은 자신의 정체성을 앵커리지 삼아 타인의 정체성을 탐색한다. 컴퍼스의 중심을 잡고 다양한 크기의 원을 그려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데이브 샤펠은 본인의 정체성을 기준 삼아 유머를 펼치는 대표적인 사례다. 흑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불변의 기준 삼아 LGBTQ 유머와 트랜스젠더 유머를 던진다. 반면 흑인들의 사회적인 성공을 다룰 때는 유머가 아닌 감동을 자아내는 진지한 스토리텔링으로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다.9 서로 다른 정체성 간에 편파적인 시각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다른 정체성에는 거침없이 쓴소리를 하면서도 본인의 정체성과 결부된 것에는 긍정적인 서사를 적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반대로 레즈비언의 관점에서 LGBTQ 유머를 던진다면 사정이 좀 달라질까? 호주의 레즈비언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Hannah Gadsby)는 2018년 넷플릭스의 스탠드업 코미디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로 영미권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10 그는 초반에는 일반적인 스탠드업 코미디를 이어가는가 싶다가 중반부터 스스로의 유머를 비판하며 분위기를 바꾼다. “저는 자학적 유머로 경력을 쌓아왔어요. 그런데 더는 그러기 싫어요. 비주류의 사람이 자학이란 걸 할 때 그것이 뭘 뜻하는지 아시나요? 겸손이 아니에요. 굴욕이죠. 저 자신을 낮춰서 발언 기회를 구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젠 안 그럴 거예요.” 그의 이야기는 그의 말마따나 “서론-본론만 있는” 코미디가 아니라 서론-본론-결론이 있는 진지한 스토리텔링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그의 농담 형식은 데이브 샤펠과 비슷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불변의 기준으로 삼아 긍정의 스토리텔링으로 마무리하고(“감히 그 누구도 완력으로 저를 꺾을 수 없어요. 뼛속까지 으스러졌다가 재기한 여성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모두 아시잖아요.”), 타인의 정체성은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것 말이다.(“백인 남자가 화내는 코미디는 정말 재미있어요. 웃겨 죽겠어요. 귀여워 죽겠다니까요. 근데 왜 화났대요?”) 두 코미디언이 다른 색깔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지서로 다른 고정점을 택해 다른 범위의 원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각각의 고정점은 서로 다른 권력과 위상을 갖고 있다.

정체성 유머의 측면에서라면 단연 독보적인 인물은 안소니 제셀닉(Anthony Jeselnik)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된 앵커리지처럼 이용할 때, 제셀닉은 자신에게는 딱히 정해둔 정체성이 없다는 듯이 유머를 던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성의 테두리 전체를 비꼰다고 할 수 있다. “병원에서 피검사를 받았는데 제 혈액형이 O-라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가 최고란 거죠. 누구에게든 헌혈할 수 있어요. 전 세계 누구에게든 제 피를 나눠줄 수 있죠. 그 사람도 에이즈 걸렸으면요.” 11 휴머니즘의 흔한 강조점인 가족애 같은 것은 그에게 가장 놀리기 좋은 소재가 된다. “어린 여자 조카가 있는데 3살 때 익사할 뻔했죠. 10년이 지난 지금도 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요.”12

9
〈데이브 샤펠: 뼈 때리는 이야기〉(넷플릭스, 2019)
10
Jenny Sundén, Susanna Paasonen, 『Who’s Laughing Now?: Feminist Tactics in Social Media』, MIT Press(2020), 47-48p.
11
〈안소니 제셀닉 : 금기의 농담들〉(넷플릭스,2019)
12
〈안소니 제셀닉 : 생각과 기도〉(넷플릭스,2015)

어쩌면 이것이 부족한 것 없는 강자만이 던질 수 있는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백인 남성으로서 외모도 호감형인 그는 불가피하게 가시화되어야 하거나 타인이 문제시할 만한 정체성이 딱히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성이라는 가장 모호하고 범위가 넓은 정체성을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달리 본인의 정체성을 가시화하고 고정하기까지 긴 투쟁의 시간을 거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정체성에서 자유롭고 싶더라도 세상이 정체성에 계속해서 옭아맸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 어떤 것이 더 비중이 큰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국가, 젠더, 인종, 계급, 성, 언어, 종교, 직업 등. 이들이 저마다 어떤 비중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것은 밧줄로, 어떤 것은 문신으로도 느껴진다. 차라리 모든 정체성에서 자유롭기를 선택하고 싶다. 그러나 정체성에서 자유롭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권력자인 것이다.

글 김주은
위험한 농담을 찾아 나선 유머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