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산책 연습』은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박솔뫼 작가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동명의 단편소설로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한 적 있다. 두 소설은 모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82년 3월 18일 네 명의 여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그들의 예상보다 더 크게 치솟았다. 같은 시간 유나백화점 6층 남자 화장실에서 한 대학생이 80년 광주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는 후에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다. 국도극장에서 같은 내용물을 뿌린 남자는 후에 빈민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고 유니백화점은 오늘날 은행이 되었다. 이때 같은 불을 바라보던 최명환이라는 직장인 여성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녀가 그날 모르는 남자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곳은 1929년 건립된 서양식 건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 지점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이후 부산에 진주한 미군 숙소로 사용되다 1949년부터 1996년까지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1
부산 미문화원이 부산 근대역사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지금, 검은 연기는 과거의 한 지점에서 피어올랐다가 꺼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더 먼 과거에서 그 불은 어떤 이들이 상상한 미래의 관문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3인칭 화자와 1인칭 화자가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며 그저 함께 놓여 있다. 1인칭 화자 ‘나’는 부산 대창동 부원 아파트 안 부원목욕탕에서 우연히 최명환을 만나 부산에 방을 구한다. 3인칭 화자가 바라보는 ‘수미’는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수감 되었다가 출소한 윤미 언니와 잠시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최명환에게는 같은 성당에 다니는, 김은숙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물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수렴되고 그 잠긴 돌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듯이, 독자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러니까 이 소설의 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공교롭게도 뚫린 공간이다.
“연기로 에워싸인 건물의 사진은 있지만 기름통을 들고 미문화원으로 가는 젊은 여자들의 사진은 없다.”2
소설의 동력이 욕망이라면 ‘그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을 알고 싶다’는 것이 ‘나’와 ‘수미’의 욕망이다. 출발지도 도착지도 아닌 질문들이 이어진다. 신문에 나온 코모도 호텔에서 묵으면 어떨까? 저 아파트의 목욕탕에 가 보면 어떨까? 배를 타고 밖에 나가서 외국에서 다른 삶을 살면 어떨까? 『미래 산책 연습』 속 인물들은 시간을 산책하고 있다. 시간을 산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향하기. 반복하기. 다른 사람으로 살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운명의 바람이 통하고, 살다 갈 구멍이 필요하다. 스스로 서 있으면서도 스스로 완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의 얼굴과 건축물은 닮아 있다. 개방되어 있고, 여러 번 들를 수 있다. 시간은 얼굴에 거주한다. 얼굴뿐 아니다. 이름, 사건, 건축물에는 넘치고 있는 시간이 있다.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있던 그 얼굴은 현재의 얼굴과 몇 년 전의 얼굴과 이십여 년 전의 얼굴이 합해져 떠올랐고, 바로 그 언제라고 할 수 없는 얼굴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수미는 깨달았다.”3
‘나’는 최명환의 생애를 곰곰이 떠올린다. 혼자서 돈을 모으는 최명환, 미친 여자 취급을 받던 최명환, 탄 냄새가 나는 블라우스를 화장실에 걸어 두는 최명환. 최명환의 옆얼굴이라는 문을 열고 그를 방문한다고 해서 그에게 켜켜이 쌓인 역사를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해란 어떤 지속적인 상태나 성취가 아니고 매 순간 빛을 발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명환이 없는 곳에서 그가 바라본 풍경을 상상해 보는 일을 반복한다면 후에 원할 때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솔뫼 작가의 문장은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간다.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순간 번쩍이고 지나가는 직관이나 몇 줄로 요약되는 긴 시간을 모두 비슷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니 문장은 주의를 둘 만한 지점을 임의로 선택한다기보다는 세계의 외면을 샅샅이 훑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이 소설이 정신적인 세계에서 물처럼 흐르며 진행된다고 느껴지는 이유이다. 전망대에서 P가 가리킨 아파트처럼, 다른 이에게는 그 위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파트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어디서 끊어지는지 명확하지 않은 동어 반복은 리듬감을 주고 이 문장들이 인간 정신 활동의 과정에서 흘러나왔다는 신뢰를 준다. 맛있는 것은 맛있다. 멋있는 것은 멋있고 좋은 것은 그대로 좋다. 걸었고 걷고 있다. 걷고 있으므로. 리스본은 부산을 닮았다. 어떤 요소가 서사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는 그것이 ‘나’와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에 달려 있어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 최선의 부피를 가진다. 정승, 고양이, 이웃,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마음을 사로잡는 토요코인, 옆집에서 들려오는 라디오의 진행자 목소리, 읽고 있는 『티보가의 사람들』 속 청년인 자크까지. 화자 주변의 존재들은 흘러가는 생각의 방향표를 툭 치고 지나간다.
“잠이 들면요? 눈을 뜨면 다음 날이 되고 다시 걷고 너는 그 일을 반복하게 된다. 대체 어디서요?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4
어디서요? 어디로요? 투명한 존재에게는 공간이 나를 꿈꾸고 공간이 나를 살아 보는 역전이 발생한다. 꿈이나 영화 내용, 자신의 상상을 말할 때도 현실처럼 진지하다. 현실과 다름없다. ‘나’가 잠시 용두산 아파트에서 사는 상상을 할 때 글은 용두산 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것이 된다. 만일 독자가 책을 읽다가 덮어 두고 물을 끓이러 나온다면 사실 이 화자 역시 상상된 존재라는 이중의 혼란을 눈치 챌 수 있을 텐데, 미래와 과거를 산책하는 ‘나’라는 존재에게 정말 선명한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곧 사라질 사람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걸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늘 때로는 그것만이 생생했다.”5
첫 번째. ‘나’는 아파트를 파노라마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수미는 윤미 언니가 같은 이름인 광주의 조윤미 언니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모두의 ‘말할 수 있는 여기까지’를 합치면 어떨까. 소설은 질문한다.
두 번째. 타인은 나와 같은 존재이다. 윤미 언니의 불확실한 미래는 커피를 마시며 잠을 자는 가장 보편적인 삶의 순간들로 구성될 것이며 심지어 그 시간을 타인과 함께 구부릴 수 있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공유한다. 부산 근대역사관이 어떤 역사를 가졌건 간에 현재 그곳에는 작은 창으로 햇빛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한때 그곳에서 책을 빌렸고, 미국 유학을 문의했고, 불을 붙였으며, 지금은 모두 다른 곳으로 흩어져 갔다. 이 흩어짐이 ‘함께함’이라는 기적을 강조한다. 최명환의 방이 어떤 시간을 담고 있었든 간에 잠시간은 ‘나’가 조용히 점유하는 공간이 된다.
소설의 첫 번째 챕터에서 최명환은 백 살의 생일을 앞두고 회고록을 쓰는 사람이다. 같은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 같은 현재에 머무르는 사람, 같은 미래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페이지라는 하나의 공간 위에 겹쳐진다. 박솔뫼의 글쓰기 형식이 언제나 현재인 동시에 과거인 만큼 이 구분은 더더욱 희미해진다. 현재이며 재구성된 대체 과거, 현재이며 재구성된 대체 미래가 미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지탱한다.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 나는 이 책의 번역자와 그와 함께 미문화원을 방화했던 이들은 광주라는 사건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그 이후 시간의 의미를 묻고 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80년 5월에 그들 자신이 광주에 있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음을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일 것이다.”6
이때 가장 적극적인 현재의 몫이 바로 이 먹는 몸에 있을 것이다. 어젯밤 같이 술을 마시던 조선의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화자가 사람들을 관찰하다가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유령이 된 것 같아 두려워하다가도 자기 자신으로 미끄러져 돌아오는 시간, 음식을 씹어서 넘기는 순간의 감각이 ‘나’를 독자와 같은 하나의 육체로 돌려놓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줄기차게 먹어 댄다. 장기적으로 먹을 것을 준비하는 일로 ‘나’의 부산에서의 세간은 마련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꼭 같이 식사를 한다. 광주에서 아줌마는 수미와 윤미 언니에게 밥을 차려 준다.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일이 호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는 듯이. 떡과 오향장육과 도넛을 같이 나누어 먹을 때 그들은 같은 맛을 느끼는 몸이 된다. 최명환의 세례명인 마르타는 남을 먹이는 성녀이다. 돌아갈 자리가 없어진 시간을 망각이 흰 죽처럼 먹어 치우지 못하도록 사람들은 서로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미래를 기억이 되도록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그것이 보인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미래로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7
이해 불능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이 공동이라는 현실은 진실의 통로가 된다. 불가능한 것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것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같은 미래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불가능의 지대에서 만나게 된다. 그것은 정치적 지향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종교가 될 수도, 각기 다른 언어로 된 볼라뇨 번역서가 될 수도 있겠다. 어느 끝에서도 시작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아주 작은 보폭에서부터 희망을 발견하며, 나는 『미래 산책 연습』에 머무른 나 이외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당신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