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 국제 실내악 콩쿠르 3위, ARD 국제 콩쿠르 실내악 부문 2위, 모차르트 콩쿠르 우승, ‘한국인 최초’ 순위 입상이라는 타이틀을 모두 달고 있는 이 화려한 경력은 모두 한 팀이 만들어 낸 것이다. 클래식 음악의 중심지인 유럽은 한국에서 온 어린 동양인들에게 꿈의 도시만은 아니었다. 차별적 시선을 넘어서 피부의 색이 음악의 색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 내기까지, 그 과정의 중심에는 포기하지 않는 도전의 정신이 있었다. 이제는 단연 국내외 최정상의 실내악 콰르텟이 되었음에도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노부스 콰르텟을 만났다.
오늘날의 노부스 콰르텟이 있기까지, 콩쿠르의 기억
김재영 : 잘된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전에 힘들었을 때가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멤버 교체가 이루어진 뒤 한 달 만에 콩쿠르에 나간 적도 있었어요. 또 참가할 때마다 저희가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가장 어린 나이였거든요. 콩쿠르에서 공정하지 못한 결과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심사위원들 간에 일종의 커미션 같은 것들이 있었다거나 하는 경우들이 많았어요. 억울하기도 했죠. 그러면서 점점 ‘우리가 다음에는 반드시 1등을 하자’라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러다 처음으로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1등을 했는데, 막상 감정의 크기가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 않더라고요.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콩쿠르가 잘되고 나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순간은 입상했을 때보다도 에이전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였어요. 당시 가장 크고 좋은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그때는 실제로, 혼자서 그 자리에서 방방 뛸 정도로 좋아했어요. 콩쿠르를 여러 번 참가하면서 유럽에서는 콩쿠르만으로 연주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한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 너무 필요했거든요. 에이전시가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그때 저는 비록 커리어는 쌓아가고 있었지만 30대가 되는 순간부터 심리적으로 ‘내가 잘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바닥을 치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전화가 왔을 때 그 바닥을 한 번 치고 다시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때가 기억에 좀 더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조율에서 해석까지, 노부스의 색
김재영 : 아무래도 팀들마다 조율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거예요.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연주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찾은 것이, 바이올린이 먼저 A음을 기준으로 주고 그 다음에 한 사람씩 맞추는 방법이거든요. 첼로 같은 경우는 조명에도 빠르게 음이 변하기 때문에 첼로에 맞추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고 할까요. 그다음에는 곡의 조성에 따라서 비교를 해 봐요. 확실히 다른 팀보다는 더,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조율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김영욱 : 작품을 해석할 때는 작곡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중점을 두는 것 같아요. 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눌 때 멤버들 간의 의견이 중구난방으로 나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음악적인 생각들은 어느 정도 틀 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해석의 차이가 많이 벌어지는 일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김재영 : 또 같은 작곡가의 곡을 여러 해에 걸쳐서 오랫동안 연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미 맞추어져 있는 상태이기도 하구요. 세부적인 디테일에 대해서는 조율하지만 작곡가에 대한 큰 틀은 이미 세팅이 되어 있는 상태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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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호흡, 에너지, 그리고 전율
김재영: 일단은 무대 위에 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전에 충분한 리허설 시간을 가지면서 몸에 미리 탑재되는 흐름이나 타이밍이 같은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저희 네 명이 호흡을 맞추는 방법에 대해 어떤 특별한 사인이나 약속 같은 것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실제로 기본적인 호흡과 소리에 대한 것들은 이미 그전에 충분히 교류가 되어 있는 상태거든요. 그것보다도 사람한테 나오는 ‘기’가 있다고들 하잖아요. 그 에너지들이 융합되거나 맞아떨어지면서 실제로 그것을 느낄 때, 그런 순간들이 개인적으로 좋은 콰르텟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특별한 싸인, 큐, 약속 같은 것들보다도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주로 음악에 이미 녹아 있는 사람의 호흡, 기본적인 흐름, 자연적인 탄력과 같은 것들에 의해서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에 대해, 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인 것 같아요.
김영욱: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가 있어요. 그리고 저희가 음악을 만들어 나가면서 그 공통된 ‘기’가 모여서 여러 가지 사운드의 안에 빠져들어 있을 때, 넷이 다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 종종 있어요. 그럴 때 이제 카타르시스 같은 것들이 느껴지죠. 그래서 마치 이것에 중독되듯이, 더 그만둘 수가 없어요. 이런 순간은 듀오 리사이틀이나 협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음악적 카타르시스인 것 같아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멤버 교체에 대해
김영욱: 새로운 연주자가 들어오면 달라지는 점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15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저희만의 색이 자리 잡힌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새로운 사람들은 오래된 팀에 들어와서 변화를 꾀하려고 한다기보다는 자신 스스로가 팀의 색으로 빠르게 녹아들고자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김재영 : 새로 들어온 사람이 지닌 의견과 저희가 고수하고 있던 작곡가에 대한 생각이나 이미지 같은 부분들이 맞지 않는다면 그때는 변화가 생길 수 있겠지만, 일단 저희가 가지고 있는 큰 틀 자체가 새로 들어온 친구들한테 특별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도 멤버 교체가 있을 때마다 사실은 두려워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소리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그래도 멤버의 변화가 생겼을 때 그렇게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던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이름의 가족
김영욱 : 재영 씨는 저희 팀의 리더니까 아무래도 가장이라고 할까? (웃음) 저희 팀의 아버지 같아요. 그리고 이건 제 주관적인 느낌인데, 저는 가운데에 있는 입장인 것 같고 규현 씨는 막내아들, 원해 씨는 이모부 같아요.
김재영 : 원해 씨는 뭔가 알아보는 일들을 굉장히 잘해요.
이원해 : 제가 딱히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메일이나 연락은 영욱 씨와 재영 씨가 하시고, 저는 해외 연주가 있을 때 차를 알아본다든지 그런 일들을 하는 편이죠.
김재영 :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원해가 그런 일들을 정말 잘해요.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할 일을 딱 찾아서 잘한 느낌.
김규현 : 저는 너무 좋아요. 형들이 다 해 줘서.
김재영 : 근데 규현 씨는 또 재밌는 걸 많이 알아요. 잡상식이 많아서 재밌어요.
노부스 콰르텟의 시작, 한예종 음악원
김재영 : 한예종을 다녔기 때문에 제가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때의 한예종은 완전히 음악뿐인 분위기였거든요. 모두가 너무 음악만 바라보던 시절이었어요, 또 음악원을 들어오자마자 콰르텟을 시작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미쳤어요. 학부 생활을 하면서부터 실내악에 대한 열정이 생겼던 거였어요. 당연히 한예종을 다니면서 시작이 되었던 것이라서, 한예종이 ‘나한테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의 개념보다는 한예종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초동 캠퍼스를 찾은 노부스 콰르텟(왼쪽부터 김재영, 김규현, 이원해, 김영욱)
학생으로서의 한예종, 선생님으로서의 한예종
김재영 : 세대가 너무 변했잖아요. 제가 03학번이니까. 지금이 21학번인가요? 너무 차이가 많이 나는데요. (웃음) 거의 17년에서 18년 차이가 나는데, 요즘 어린 친구들 보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저희 때는 뭉치는 일을 정말 잘했어요. 과별로도 잘 뭉치고, 다른 과랑도 너무 잘 뭉치고. 술 마시는 일이 반드시 뭉치는 일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의 학교 주변 술집들에는 학생들이 전부 있었거든요. 피아노과도 피아노과 안에서 엄청 친하고, 바이올린과는 바이올린과대로 엄청 친하고, 섞여서도 엄청 친하고, 뭉쳐서 놀고, 교류하고 그랬던 부분들이 지금 저에게 가장 그리운 그림이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부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고, 놀고 하다 보면, 또 그러면서 전공에 대한 열정도 불태우고 하다 보면 그 시너지가 훨씬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드는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제가 음악원에서 실내악 수업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서 느낀 점인데, 저희가 학생이었던 때보다 실내악에 대한 열정이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아요. 그때는 실내악 수업을 되게 가볍게 생각하고 그랬었는데, 지금 친구들은 실내악에 대해 굉장히 열의가 넘치고 그래서 이런 부분들도 변했구나 싶어요.
음악원의 후배들에게
김규현 :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이원해 : 저의 경우는 대학교를 외국에서 나왔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해외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에 친구들이 저에게 ‘너는 빨리 나가게 되었으니 더 많은 걸 볼 수 있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많이 해 주었고, 그 생각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한국에도 최고의 교육과정들이 있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외국에 나가서 시야를 넓히는 것도 우리가 하는 음악에 있어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재영 : 음악이 삶의 전부가 아니고 진짜 삶은 30대부터라는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김영욱 : 남들이 한다고 해서 다 따라가지 말고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아 진로를 찾으라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콩쿠르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콩쿠르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또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일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20대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많이 즐겼으면 좋겠어요. 너무 음악에 매여서 인생을 다 걸지 말고 여러 가지를 다방면으로, 현명하게 바라보면 좋겠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삶과 음악, 그리고 새로운 도전 : 쇼스타코비치 현악4중주 전곡 공연을 앞두고
김재영 : 지금 코로나로 인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멈춘 상황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갇혀 있는 상태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도 하고요.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시기는 매우 억압된 사회였고, 자신이 예술가로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할 수 없는 사회 체제였어요. 제한된 틀 안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어 했을지, 또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 그 내면에서는 어떤 것들이 부딪혔을지를 생각해 보면 저희의 지금 시기와도 굉장히 맞물려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 저희가 이 연주를 기획하면 청중과 저희 모두 그 이해도가 남다를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 연주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말은 쉽게 할 수가 없어요. 누군가에게는 듣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큰 파도가 올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좋은 경험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힘들지만 분명 큰 경험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한 작곡가를 깊게 탐험한다는 것이 저희에게는 말도 안 되는 도전에 가깝거든요. 나흘 동안이나 이어서 공연한다는 것이 완성도 같은 측면에서도 거의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청중의 입장에서는 나흘 동안 한 작곡가들 강렬하게 탐험하는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지금 저희의 시기와 작곡가의 성향과 시대가 이렇게까지 맞아떨어지는 공연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시기를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연주를 기획하게 됐는데, 실제로도 그런 시간이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명의 작곡가, 하나의 장르만을 이야기한다는 것
김재영 :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은 그 음악적 재료들이 모두 비슷하고 작품이 지닌 ‘기질’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부분들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요. 그런데 이러한 부분들을 음악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쇼스타코비치 현악4중주 전곡을 연주한다고 했을 때 혹시 듣는 사람들이 지루해할까 두려워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든지, 무엇인가를 저희의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다든지 하는 부분들은 저희가 굉장히 조심스러운 부분인 것 같아요. 다른 작곡가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작품들을 초기, 중기, 후기 나눠 볼 수 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 사람의 일생일대의 시간을 통해서 음악이 점점 어두워지거든요. 초기에는 그나마, 정말 조금이나마 긍정의 불씨가 남아있던 부분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모든 것이 다 타 버리는 듯해요. 그래서 비록 모든 작품을 연대별로 연주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부분들이 더 표현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작곡가의 마음의 안에서, 그 사람의 생각들이 어떻게 꼬여 가는지를 생각하고 싶어요. 후기 음악으로 갈수록 장조이든 단조이든 그 조성에 상관없이 매우 시니컬하고 회의적으로 변모하는데, 그 뒤에 놓인 ‘꼬임’들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음악이 비춰지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정말 듣기가 힘들 정도로 지겨운 부분도 많고, 계속해서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그것이 쇼스타코비치라면, 그냥 있는 그대로를 표현해내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
김재영 : 저희가 유럽에서 중요한 연주 일정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다 취소가 되어서 사실 지금 굉장히 슬픈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 쇼스타코비치를 시작으로 저희도 이제 다시 활발한 연주 생활을 향해서 조금 더 박동을 찾고 싶습니다. 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일정으로는 다음 주에 일단 독일로 출국을 해서 네 번째 음반을 녹음하게 돼요. 음반은 아마도 내년에 발매될 예정입니다.
또 8월과 9월 즈음에는 다시 유럽에서 연주를 시작하게 될 것 같은데, 그때는 일시적으로 해외를 오가는 정도이고 내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일정들이 시작이 될 것 같아요. 지금 굉장히 좋은 연주 홀에 초청이 되었던 일정들도 전부 취소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스케줄 조정이 되어서 다시금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또 앞으로는, 만약 저희 실내악 팀 창단 20년이 되는 해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그 즈음부터는 어느 정도 저희가 반열에 올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쉽게 쥐여 주지 않았지만 유럽의 동양인들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깼다. 이제는 모두의 앞에 세워진, 그 끝이 어디일지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좌절의 장벽 앞에서 노부스 콰르텟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통해 자신들이 깬 유리벽의 한 조각을 들려주려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과 용기가 필요한 오늘날 다가오는 연주에 담긴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서 예술을 만드는 삶이 아닌 삶으로서의 예술이 지닌 무한한 힘을, 또 그 힘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느낀다.